〈 65화 〉 65, 9000
* * *
뜬금없지만 여러분들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다.
자, 9387은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대체 어떤 뜻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정답은 간단했다. 이건 바로, 어제 올라온 돚거질 게시물의 조회 수였다. 어느 정도 중복조회수를 제외한다 치면, 대충 9000명 정도의 사람이 내 나체(그림) 사진을 보았다는 것이다.
무려 9000명··· 대충 비교를 하자면, 웬만한 고등학교 전교생 수의 무려 10배에 달하는 수였다.
이런 시발 세상에!
무려 10개에 달하는 고등학교가 나의 나체 그림을 본 것이다!
어제의 나는 진심으로 우에하라 아X였고, 동시에 시X켄이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 등골에 오한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그림이라 다행이지···.’
그림이 아니라 진짜 사진이었으면, 진작 사람을 특정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2D 그림일 뿐이었고, 그렇기에 이번에는 단순히 느낌만 비슷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따지자면, 애초에 9000명이란 숫자도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었으니.
우리나라 인구수가 대체 얼마인가? 이 자그마한 땅덩어리에 무려 5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5000만 명이라는 가늠도 잘 안되는 숫자에 비하면, 9000명은 그야말로 쌀 포대 안에 좁쌀인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공개 벗방쇼(그림)를 했다고 한들, 내 일상이 극적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평범하게 집에서 나오고, 평범하게 지하철에 오르며, 평범하게 학교에 간다. 여기에 갑자기 치한이 끼어든다거나, 누가 아는 척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상이란 이런 자그마한 일에 무너질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끄응···.”
지하철 안, 나는 지금 여러 힐끔거리는 시선들에 괜히 움츠려드는 중이었다.
분명 평소와 같은 시선이다. 평소에도 몇 개씩 따라붙는 사소한 시선들뿐이었다.
요즘에는 특히 날씨가 더워져서 내 옷도 점차 반팔 반바지로 변해가고 있으니.
타고난 성욕이 강한 이쪽 세계 ‘여자’들에 의해 가끔씩 시선이 꽂히는 건, 이제 나로서도 익숙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런 시선을 약간 즐기기도 했고.
하지만, 그러한 시선 또한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
무감정한 시선도 나르시시스트들에게는 하나의 자위용 수단이었고,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단순한 시선 강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내게는 저 평범한 힐끔거림도 지금은 어떠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이 가는 것이다.
만약 저것이 그저 본능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면?
어제 딸감을 찾다가 우연히 내 그림을 봤었고, 다시 현실에서 나를 발견함으로써 머릿속 기억과 대조시키는 거라면?
‘참···.’
무척이나 꼴리면서도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고작 그림 하나에도 이 정도로 신경 쓰이는데, 만약 실제 노출 쇼를 하면 어떻게 될까.
몰카 피해자들이 시선 공포증에 특히 잘 걸린다던데, 왜인지 그 마음이 조금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혼자 시선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순간, 내 옆으로 누군가가 찾아와 말을 걸었다.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기···.”
“흐잇?! 네, 네?”
이런 망할,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나를 알아본 인간이 드디어 나를 협박하는 것이다!! 핸드폰으로 내 나체 사진(그림)을 보여주며 공개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겠지!!!
그리고 따라간 나는 온갖 난폭한 짓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에로 동인지처럼!!!
상상만 해도 전립선이 찌릿찌릿해지는 상황에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상대방이 무슨 협박을 하든 나는 당당히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자아, 와라! 네가 나를 따먹으려 한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감당하리라!
그러나, 상대방이 하는 말은 생각보다 평범한 것이었다.
“그··· 신발끈이 풀려있어서요. 혹시 넘어지실까봐···.”
“아··· 네?”
나는 잠시 내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내 오른쪽 신발 끈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신발끈이란 생각보다 나약해서 이렇게 넋 놓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풀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 인생도 이렇게 잘 풀리면 좋으련만···.
“아···.”
엄습해오는 쪽팔림에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게 왜 풀려있지? 감, 감사합니다······.”
서서히 얼굴에 열이 올라온다.
나는 지금, 아침 출근길 등굣길에,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 전철 안에서 ‘흐잇?!’같은 소리를 낸 것이다.
거기서 찾아오는 쪽팔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을 덮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시발···.’
어쩌면 히토비를 끊을 수 있었던 게 다행히 아닐까. 뇌가 이렇게 망가에 절여져 있는데 차라리 강제로라도 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창피함에 몸서리치던 나는 겨우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후, 그래 당당해지자.’
거 시팔, 고작 그림일 뿐이잖아. 그런데 너무 씹게이처럼 쫄아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림 좀 보면 어떤가.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어차피 감상자가 9000명밖에 되지 않아서 내 그림을 본 사람을 만날 확률도 희박했다.
그렇게 잠시 자기 세뇌를 하자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평소처럼 일상을 영위해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역은 OO역, OO역 입니다. 내리실 분은──]
혼자 마음을 다잡고 있자, 어느새 전철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는 하품을 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오늘은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
요즘 학교는 무척이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유를 부릴 수 있던 학기 초와 달리, 지금은 학기 말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조금 있으면 종강이라는 무지막지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전에 시험이라는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니까 무슨 말이냐면, 지금은 시험 기간이라는 것이다.
비록 여기가 살짝 노는 걸 좋아하는 애들이 모인 학과라고는 해도, 시험 기간에는 다들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험이 한 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이곳은 조용한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야, 사회학개론 시험범위 어디까지였냐?”
“···그걸 지금 물어본다고?”
“아니··· 다른 거 공부하느라 바빴어.”
“야 이번에도 김혜선 교수님 문제 개빡세게 낼 거 같지 않아?”
“백퍼야 시발, 또 문제 하나로 한 페이지 채우게 할 듯.”
곳곳에서 시험 관련 주제로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책상에 펼쳐진 전공 책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기 전 잠시 교실을 둘러보았다. 유난히 공허하게 느껴지는 빈자리가 보인다.
‘이 새끼는 오늘도 안 왔군.’
그 자리는 호철게이의 자리였다. 저번 일이 있고 나서부터 호철게이는 학교에 오지를 않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기가 무서운 걸까, 아니면 그 잔뜩 부르튼 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일까.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학과에 은은하게 퍼진 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야, 쟤는 오늘도 안 왔냐?”
"내버려 둬 그런 인성터진 놈.”
본래 대학가란 작은 소문도 빨리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이제 막 사회물을 먹기 시작한 청년들의 입은 쉴 일이 없었으니까.
하물며, 폭력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큰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의 귓속에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관계된 인간도 몇 명 있었으니, 소문을 만들어내기란 케이크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특히 그 소문을 만들어내는 인간이 활발한 인 싸라면 더욱더.
“······.”
나는 말없이 뒤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유보람이 사람 좋은 미소를 한 채 앉아있었다.
문득, 눈이 마주친다.
“아··· 오셨어요?”
“···응, 안녕?”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만약 소문을 냈더라면 저 녀석이 냈겠지. 평소 이은별과 친하게 지내던 녀석인 만큼, 이 일도 가장 자세히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렇게 악의적으로 호철게이의 민심을 조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녀석의 출석 점수는 실시간으로 조져지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기분 좋기만 했다.
그러게 누가 함부로 공격하래? 함부로 살을 날렸으면, 자기 자신도 업을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하는 법.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쯧쯧, 민심 한번 조져졌다고 연중런을 튀다니.’
녀석은 좀 더 굳세어질 필요가 있었다. 강해지고 단단해져라 게이야.
그래도 다행인 건, 소문이 퍼졌다 뿐이지 전부 쉬쉬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자습을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미 모두 교재를 꺼내놓고 계시네요.”
그렇게 잠시 있자 강의실 안으로 교수님이 들어왔다. 언제나와 같이 수업은 지루했다.
*
“──이번 시험은 조졌군.”
수업이 끝난 후, 나는 강의실을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그래.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을 것 같았다. 국밥에 밥 말아먹듯 하주 거하게 내 학점이 조져질 각이었다.
이미 출석 점수가 대거 깎인 건 물론이오, 솔직히 수업들도 대부분 뭔 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으니까.
어쩌면 내 학점은 이미 운명론적 관점으로 망해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기 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던데, 내 학점은 상자를 열기도 전에 죽어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무슨 현대물리학의 모순이란 말인가.
애초에 수업 중간부터 들어왔던 과목들이다. 그런 만큼, 다른 애들에 비해서 기초 지식이 딸렸고, 딸리는 만큼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수업에서 뒤처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아예 바닥을 깔아줄 생각은 없었다.
‘암기과목 위주로 해야지.’
이해도가 딸리면, 차라리 통째로 외워버리면 되는 것. 다행히 단순 암기는 나름 자신 있는 편이었다.
입시 때 최저 점수도 거의 암기 과목으로 채웠으니까 말이다. 간단한 문제랑, 단답형 서술형 문제는 얼마든지 맞춰주리라.
나는 김혜선 교수의 한 페이지짜리 서술형 문제를 당당히 백지로 낼 자신이 있었다.
응, 문제 어렵게 내봐~
‘처음부터 포기하면 그만이야~’
나는 그렇게 속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며 복도를 걸었다.
아쉽게도 오늘은 오후 수업이 있어서 1시간 정도 시간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필 오늘은 이은별이 공강이라 같이 떠들 상대도 없었고.
같은 과 여자애들과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무리에 낄만큼 편한 사이도 아니었다. 남자애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싸의 서러움이란···.’
그래도 다행히 이 학교에는 나 같은 이를 위한 휴게실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터벅터벅 걸으며 근처에 놓인 휴게실로 향했다.
복도의 선선한 공기가 피부를 뒤덮는다. 창문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햇빛은 정신을 맑게 일깨워주는 듯 했다.
대낮의 인적 드문 복도는 그 자체로 운치가 있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복도의 반대편에서, 다른 학과 학생 두 명이 걷는 게 보인다. 둘이 친구 사이인지 서로 시험 얘기로 떠들고 있는 게 들려왔다.
“자바스크립트 시발.”
“데이터베이스 개새끼.”
나는 말없이 그녀들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시험 관련 얘기야 이미 지겹도록 들었으니까.
소재와 관련 없는 이야기들을 너무 지껄이면 사람들이 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아니, 인간적으로 시험 전주에 과제를 주는 게 말이···.”
길을 지나가다 문득, 여자들 중 한 명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고 있던 말을 끊고, 뭔가 신기한 걸 발견한 듯, 노골적인 시선이 나를 꿰뚫는 게 느껴졌다.
마치 탐색하듯, 잠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본다.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냥 그녀들을 지나쳤다.
이미 오늘의 나는 아침의 일로 한층 성장한 상태였으니.
과대망상으로 인한 쪽팔림은 아침에 겪었었던 일로 충분하다. 이 정도 시선이야,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그 여자들이 교차하듯 지나가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였다.
소리가 울려 퍼지는 복도라 그런지, 나는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 야. 나 어제 저 사람이랑 존나 비슷하게 생긴 야짤 봤다? 와 개신기하네.”
“아이, 미친. 변태 새끼야.”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이런, 시발.’
그걸 보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