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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62화 (62/125)

〈 62화 〉 62, 할당제

* * *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화창한 봄이었으며, 오랜만에 날씨가 제정신을 유지해서 공기 중에는 따스함만이 감돌았다.

이런 날씨는 보통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그럴수가 없었다.

“으으···.”

지금 이 빌어먹을 몸뚱어리에 근육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근육통은 며칠이나 이어져서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중이었다.

근육통의 원인은 간단하다. 그날, 양아치들과 영혼의 다이다이를 뜨면서 상상이상으로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신기해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이상의 괴력을 낼 수 있다.

머리가 자동으로 걸어놓았던 리미트를 풀어 한계 이상의 신체능력을 내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때 내가 그런 상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꽤 많이 분비된 느낌이긴 했지.

덕분에 1대3 맞다이라는 개쩌는 매드무비를 찍을 수 있긴 했다만, 문제는 바로 다음이었다.

“존나 욱신거리네.”

한계 이상으로 힘을 낸 근육에는 당연히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내내 혹사당했던 근육들은 감히 씨발 주인도 못 알아본 채 열심히 항의를 하고 있었다. 다리를 움직이면 다리가 저려오고, 팔을 들어 올리면 크나큰 통증이 느껴진다.

무리 한 번 했다고 며칠씩이나 앓고 있으니 그저 억울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이토록 나약했었단 말인가···작년, 수십의 시멘트 포대를 나르면서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던 상남자는 어디 갔는가···.

변해버린 나의 모습에 눈물이 다 날것만 같았다.

‘진짜 운동이라도 해야겠어.’

안 그래도 최근에 그림을 핑계로 너무 안 움직이긴 했다. 슬슬 몸이 굳어가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이참에 운동을 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조금 있으면 대학도 종강이고 하니까 타이밍도 괜찮았다.

“···괜찮아?”

그렇게 혼자 다짐을 이어나가고 있자 옆에서 한 여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성아린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그녀가 잠시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그리움이 가득했다.

“어흐흑! 아린아. 너무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오랜만인 거 같냐······.”

“무슨 소리야··· 지난주에도 봤었었잖아.”

“···진짜?”

아닌데··· 적어도 체감상으로는 2주가 훌쩍 넘은 것 같은데···.

뭔가 그녀와 나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이곳의 시공간 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괴리감이 말이다.

그만큼 그날의 하루가 고단했던 탓이리라.

아무튼 나는 그녀의 허리를 껴앉은 채로 그대로 가슴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러운 면 티가 내 피부에 닿으면서 포근한 느낌을 선사해 준다. 지금은 무엇보다 힐링이 하고 싶었다.

“흐읏··· 잠깐만···.”

“어허, 가만히 있어. 스읍···하아.”

들이쉬고, 내쉰다.

천천히 호흡을 왕복할 때마다 마음속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잔잔한 바다였으며, 드넓은 초원이다.

온 세상의 평화와 안식만을 모아놓은 장소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래, 평화는 곧 가슴인 것이다!

전쟁 또한 가슴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우울증과 번민 또한 가슴이 앞에 있다면 치유될 게 뻔했다. 말하자면 가슴은 평화의 상징, 그리고 만병통치약이었다.

22세의 나는 조금 일찍 세상의 진리를 깨우치고 있는 중이었다.

‘헤헤.’

한호철 병신 새끼. 그딴 조잡한 협박을 할 바엔 성아린의 가슴으로 협박하면 통했을 텐데.

차라리 내 앞에 나서서 ‘너 이제부터 가슴 못 만진다!’외쳤다면 진지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허억!’

이런 씨발!!

앞으로 성아린의 가슴을 못 만진다니!! 상상만으로도 부랄이 떨려오고 쥬지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당장 알몸으로 도게자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 자신이 있었다. 니알라토텝님도 이번엔 내가 개가 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심하다··· 대체 누가 그렇게 한 거야?”

그렇게 혼자 개소리를 이어나가고 있자, 앞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린이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짐짓 화난 표정을 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로 인해 비롯된 화가 아니다. 정확히는 나를 이렇게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였다.

물론 내게 난 상처라고 해봤자, 작은 타박상과 근육통이 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감정은 진짜였다.

그녀가 사나운 다람쥐처럼 인상을 찌푸리려고 한다.

“대체 어떤 년이···.”

나는 흑화 하려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얼른 입을 열었다.

“야, 괜찮아. 그래도 유효타는 내가 더 많이 넣었어.”

“그래도···.”

“진짜라니까? 햐, 내가 장례식 매드 무비급 업적을 쌓고 왔는데 이걸 못 믿어주네.”

나는 분명 피로 된 진창에서 헤어나와 호젓하게 두 발로 섰거늘, 아무래도 그녀는 못 믿어주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쪽 세상에서 ‘남자’란 비교적 힘이 약한 모양이니까.

오랜만에 나를 본 그녀가 몸에 난 멍을 보고 걱정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가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성아린은 잠시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다, 다음에도 이런 일 생기면 그때는 내가 지켜줄게···.”

그녀의 똘망똘멍한 눈의 작은 결의가 담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뿌듯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쭈?’

일단은 ‘여자’라 이건가. 생긴 건 다람쥐같이 생겼으면서 일단은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기사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으나 무척 귀엽기는 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갸륵히 여겨 냅다 침대 위로 넘어뜨린 후, 그 위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가 작게 소리쳤다.

“꺄악­”

“그러려면 일단 침대 위에서 나부터 이겨야지. 안 그래?”

풍만한 가슴과 굴곡진 옆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걸 보자 저절로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들박 마려운 몸매다.

순간 나는, 내가 꾸준히 운동을 한다면 언젠가 들박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

좋아.

운동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

“잘가~”

“으윽···다리가 후들거려···.”

아무튼 그렇게 가벼운 야스를 끝낸 후, 나는 그녀를 대충 배웅해 준 다음 곧바로 의자에 앉았다.

열심히 논만큼 이제는 다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법.

내 몸에 있는 ‘나쁜 물’을 빼내었으니 이제는 남들의 ‘나쁜물’을 빼내줄 차례였다.

컴퓨터를 켜고 타블렛 펜을 잡는다.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나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크으, 그래 이거지.

왜인지 오랜만에 펜을 잡는 기분이었다. 분명 그림은 어제도, 그제도 그렸는데 어째서일까.

아마 이것도 초월적인 무언가에 의한 괴리감 때문일 것이다.

뭐가 되었든 지금 내 컨디션이 좋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손위에서 펜을 돌리며 그릴 것을 생각했다.

‘뭐부터 그릴까···.’

일단 지금 금태양을 그리는 것은 별로 안 땡겼다. 딱히 생각나는 히로인도 없었고, 일단 이번 주 원고는 대부분 마무리된 상태니.

굳이 이 좋은 컨디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나는 문득 어느 의뢰 하나가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은별이한테서 의뢰가 왔었지.’

‘글러먹은나’가 보낸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의뢰였다. 그때는 아린이와 쿵떡중이라 보지를 못했는데 이제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의뢰를 확인했다.

요청 내용 뭐, 예상한 대로였다. 애초에 그녀의 성취향을 알고 있으니, 약간 하드한 게 올거라고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상황 자체는 이렇다.

침대 아래에서 여자는 알몸으로 무릎 꿇어앉아있고, 목에는 개 목줄이 채워져 있다.

그리고 남자는 침대 모서리에 오만하게 앉아서 개 목줄을 당기고 있는 장면이었다.

여자는 점차 끌어당겨지는 개 목줄에 갑갑해 하면서도 절대 무릎 꿇은 자세를 풀지 않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괜히 발로 툭툭 건드리거나 매도한다.

흔한 수치플 장면 중에 하나였다.

머릿속에서 구도 자체도 금방 그려졌다.

로우 앵글로 여자의 엉덩이 중심으로 그리면서,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잘 강조시키면 되겠지.

사실 그림 자체는 나도 꼴리고 상대방도 꼴리게 잘 그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뎃?”

문제는 시발 상대가 요청하는 남자의 생김새가 아무리 봐도 나라는 것이다.

사나운 눈매, 눈 아래의 다크서클. 대충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 검은 눈. 거기에 내 체형에 대한 묘사까지 아주 자세했다.

물론 이 정도 특징만 본다면 그냥 단순히 겹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 개성이 얼마나 다양한데 저 정도라고 안 겹칠까.

문제는 상대가 ‘글러먹은나’, 즉 이은별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현실에서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과연 저 캐릭터가 어디서 나왔는지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에게 물어봤다. 혹시나 저거에 대한 모티브가 있었는지.

다행히 마침 핸드폰을 하고 있었는지 답장은 빨리 돌아왔다.

[hala: 묘사가 되게 자세하네요 ㅎㅎ..혹시 어디서 영감을 얻은 적이 있었나요? 예를 들어 실제 사람이라던가...]

[글러먹은나: 에이ㅎㅎ]

.

.

.

.

.

.

[글러먹은나: 설마요ㅎㅎ]

약간의 침묵 이후 오는 답장.

덕분에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뭐지?”

진짜 뭐지?

아주 찰나간의 정적이 있었다. ‘에이ㅎㅎ’ 이후 다음 문자를 보내는 데 확실하게 침묵이 있었다.

물론 그 침묵이라고 해봤자 1분 정도밖에 안 되는 정말 찰나의 침묵이었지만··· 나는 그 잠깐동안 모종의 내적갈등이 있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설마요ㅎㅎ’ 하나 치는데 1분씩이나 걸리진 않을테니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건지, 아니면 물이라도 떠온건지···.

“···흐음.”

조금 미심쩍기는 했지만 일단은 의뢰는 받기로 했다. 그리기도 쉬울 것 같았고 나름 꼴리는 시추에이션인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톡톡, 키패드를 두들겨 상대에게 문자를 보낸다.

[hala: 일단 알겠습니다. 바로 그려드릴게요.]

[글러먹은나: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ㅎㅎ 꼭 요청하고 싶었던 캐릭터였거든요ㅎㅎ]

그렇구나··· 이런 그림이 간절했구나.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일단은 타블렛 펜을 잡았다.

나는 돈을 받았고, 이제는 그 돈값을 해줘야 할 차례다. 이건 명확한 교환식이었으며, 이게 바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그려보자.

‘저 캐릭터가 진짜 나인지는···.’

그리면서 상대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을것이다.

나는 그렇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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