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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60화 (60/125)

〈 60화 〉 60, 죄악감

* * *

교육(?)은 호철이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더 때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정말로 기절할 거 같았기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끄으···.”

마지막에 바라본 호철의 얼굴은 형태도 못 알아볼 만큼 두 뺨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세원은 그걸 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설마 이 정도로 했는데 또 지랄해오진 않겠지.’

잠시 그의 머릿속에 ‘형사고소’라는 무서운 말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자기가 한 짓을 아는 이상 신고도 못 할 테니, 어차피 해봤자 정당방위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이후로 세원은 은별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요 지경까지 벌어졌는지.

호철이 무슨 연유로 자신을 담그려 했는지, 무슨 모욕을 들었는지 등.

어안이 벙벙해하던 은별은 세원의 설명에 대충은 납득한 듯 보였다. 그녀도 이곳으로 뛰어오면서 스스로 생각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네···.”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리는 은별을 보며 세원은 쓴웃음 지었다.

‘못 볼 꼴을 보여줬네···.’

당한 걸 갚아준다는 명목으로 너무 행동을 강하게 한 것 같았다. 실제로 화가 나서 말투랑 목소리가 날카롭기도 했고.

평소 웃고 떠들던 이에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었다. 아마 그녀 입장에서는 꽤나 놀랐었겠지.

그렇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자 세원이 억지로 말을 꺼냈다.

“일단 나갈까···.”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 같았다. 어쨌든 상황은 마무리된 상태였고, 계속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걷는 게 나을 테니.

그리고 솔직히 이제는 집에가고 싶은 그였다.

그렇게 세원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은별이 호철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 저건요?”

"내버려 둬. 일단 깨어는 있으니까. 자기가 직접 걸어 나가거나 지 친구를 부르거나 하겠지.”

“아, 네.”

은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뒤따랐다.

잠시 두 뺨이 부운 호철의 모습이 눈에 밟혔으나, 그녀는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도 꽤나 컸기 때문이다. 그가 도와준다는 것을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이용당할 줄이야.

만약 이세원이 그의 예상대로 겁을 집어먹었더라면, 정말로 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생각하자 지금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이세원에게 물었다.

“저··· 그런데 오빠 혹시 예전부터 운동 배워왔거나 그랬어요?”

“응? 아니? 고딩때 깔짝거린 거 말고는 없는데.”

“그러면 혹시 3대 400이상을 친다거나···.”

“난 좆밥인데 무슨 소리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보통 좆밥이 여자 5명을 상대로 3명을 때려 눕힐 수는 없는데···.

오늘따라 그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는 듯한 그녀였다.

평소에 사람이 몰려들면 굳어버리던 평소 모습과 달리, 그는 오히려 완전히 적대관계가 되자 평소와 달리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트러블이 생긴 거 제멋대로 하자는 생각이었을까··· 어쨌든 평범한 남자의 반응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에 그 모습.

시정잡배들이 모두 떠나가고 골목길에 호철만이 남자 세원이 지었던 표정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와 지금까지 알고 지내면서 처음 보던 표정이었으니.

화난 그의 모습은 꽤나 위압감이 넘쳤다.

얼굴에 있던 희미한 호의마저 지운 채, 차갑게 노려보던 그 눈이 머릿속에서 연상된다.

분명 얼굴은 시릴 것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검은 눈 너머에서 넘실거리던 분노는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나운 눈은 제 역할을 찾은 듯 열심히 사람을 짓눌렀다.

목소리 또한 그렇다.

별로 거친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언성을 높인 것도 전혀 아니었다.

다만 평소보다 어조가 좀 더 깊게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그곳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쉽게 무시할 수가 없는 종류였다.

당장 그녀 또한 그 모습에 잠시 얼어붙어 버렸으니까.

그가 호철의 뺨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데에도 제대로 막지 못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적극적으로 막았다가 그 눈이 자신에게 자신에게 향할까 봐···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꽤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원의 표정을 상기하던 그녀는, 이내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그가 잘 싸워서 다행이었다. 차라리 화내는 모습이 그가 당하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나았으니까.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히 앞을 쳐다보았다.

“오늘 날씨가 좋네···.”

자신보다 몇 발자국 앞서서 걷는 세원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어색한 건지 멋쩍게 볼을 긁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거리는 고작 몇 걸음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은별에겐 오늘따라 그게 너무 멀리 느껴졌다.

단지 그가 생소한 모습을 많이 보여줘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전에, 자신이 한 짓에 죄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을 저지른 건 한호철이지만, 좋든 싫든 그 일을 도와주었던 건 자신이었다. 거기에 대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옥죄이듯 답답해져온다.

불안감으로 요동쳤던 심장은 가라앉았지만, 그 대신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올라간 기분이었다.

“······.”

“···날씨가 좋아.”

그렇게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조용히 걷고 있을 때였다.

“···어?”

그녀는 문득, 세원의 어깨 쪽을 볼 수 있었다.

어깨 위에 피부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은별은 저도 모르게 세원의 팔을 낚아챘다.

터벅터벅 걷던 발걸음이 멈추고, 잠시 세원의 몸이 뒤쪽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뭐에요···.”

그것은 멍이었다.

무언가에 가격 당해 피부 안에 출혈이 발생해 생겨난, 상처의 일종이었다.

비록 크기는 작았으나, 그것은 어쨌든 상처였고 그렇기에 그가 맞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아 씨, 뭐야 멍들어 있었네. 어쩐지 욱신거리더라··· 그 망할 년 진짜.”

은별은 투덜거리는 세원을 무시하고 좀 더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어깨에 난 멍뿐만이 아니다. 세원의 팔은 여러 자잘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어느 부위는 빨갛게 물들어 있기도 했고, 어느 부위는 돌벽에 긁히기라도 한 듯 긁힌 자국이 나있기도 했다.

가벼운 상처 수준이었으나, 그게 은별의 가슴을 후벼파기에는 충분했다.

전부 무언가를 막거나 회피한 흔적들이다. 고작 팔 하나만 확인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과연 옷 안쪽은 어떨지 그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게 정상이긴 한데···.’

그래,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그가 잘 싸웠다고는 해도 사람 한 명이서 해내는 일은 한계가 있다.

필연적으로 생기는 손해가 있었고, 거친 몸싸움에서는 상처가 날 게 뻔했다.

그는 엄청난 싸움 기술로 손쉽게 승리를 따낸 것이 아니다.

처절하게 싸우고, 힘겹게 버텨서 겨우 3명을 쓰러뜨린 거였다.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연한 현실을, 자신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분명 지금도 쓰라리고 욱신거릴 텐데, 그는 이 상황에도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야, 야, 별거 아니야. 이 정도는 침만 발라도 나아.”

“별거 아니긴요!!!”

“워, 깜짝아! 갑자기 소리는 왜 질러.”

그녀가 팍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저렇게 된게 누구 때문인데···.

가슴속에 죄악감이 좀 더 깊게 눌러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몸에 난 상처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속에 박혔다.

은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자신이 좀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폐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리를 빨리 놀렸다면···.

아니 애초에 그전에, 이딴 계획 따위 세우지 않았다면···.

그가 이런 일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가 상처를 입은 건 자신의 탓이었다.

그녀는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죄악감이 입안에서 넘실거렸다.

“제가 정말 죄송해요···.”

목 안에 돌이 걸린 듯 갑갑했다.

자신이 잘못한 일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연상된다.

그에게 죄진 게 너무 많은 느낌이었다.

“제가 괜한 짓 하지 않았으면, 걔한테 정보를 안 알려줬으면. 선배가 이런 일 겪으실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은별은 천천히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계획에 참여했었던 일, 며칠간의 대화가 사실 호구조사였으며 그대로 호철에게 전달했던 일 등.

그녀는 지금, 자신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음절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그녀의 고개가 내려갔다. 고해성사가 늘어날수록 은별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선지 자꾸 두려움이 일었다.

지금 감히 세원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다.

화났겠지? 분명 화났을 거야.

자신이 이 일에 동조한 걸 이제 그도 알 텐데 결코 평온할 리가 없을 것이다.

시선은 비록 땅바닥을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만큼은 이세원을 그렸다.

방금 전에 한호철을 노려보던 그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세원이 상상되었다.

차디찬 어조로 자신을 꾸짖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상상 속에서 그려진 세원의 모습은 호철에게 보여준 것 이상으로 차가웠다.

은별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다시금 가슴이 쿵쿵거렸다.

‘끝이다···.’

그녀는 이 친구관계의 끝을 확신했다.

은별은 세원의 입에서 나올 칼날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편, 이세원은 당황스러웠다.

‘응?’

사실 그는, 은별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얘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미안하다고 얘기하더니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이내 혼자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녀가 나열한 죄들도 그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뿐이었다.

이미 ‘글러먹은나’상태로 그녀가 한 번 떠벌린 적이 있었으니까. 이미 한번 들었던 정보라 그런지, 별로 감흥이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세원은 별로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 미친놈이 배신때린거지.’

결국 따지고 보면 은별도 이용당한 것뿐이었다.

설마 어떤 미친놈이 진짜 사람을 담굴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 누가 예상했을까.

거의 천재지변 수준의 일이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똥은 한호철 그 녀석이 다 싼 것이다.

세원은 진심으로 은별에게 별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 이용당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긴 한데.’

애초에 자신도 그런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참여한 상황이다. 따지자면 자신도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막 호철을 조져버린 상황이라, 기분이 꽤나 상쾌하기도 했다.

‘음···.’

세원은 잠시 앞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부들부들 떠는 이은별이 보였다. 평소에 느긋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지금은 겁먹은 고양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놔두면 울 것 같은 수준.

‘솔직히 좀 놀리고 싶긴 한데···.’

그랬다가는 진짜로 울 거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는 은별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나긋하게 말했다.

조용하지만, 다정한 어조로.

“···괜찮아.”

그리고 우는 아이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골목길로 달려오면서 모자는 어디 날아간 건지, 지금은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은 석양빛이 졌을 때도 무척 잘 어울렸다.

세원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별로 화 안 났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쓰담쓰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린다. 손에 달라붙는 생머리의 감촉은 꽤나 재미가 있었다.

그 자체로도 꽤나 즐거운 장난감이었다.

“···어?”

은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꾸짖음이 들려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차디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세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려했던 그 표정은 없었다. 다만, 미약하게 웃음 지은 그가 서있을 뿐이었다.

마치 불안해하는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자상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어쨌든 구하러 와줬잖아. 그거면 된 거지.”

“······.”

은별은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얼굴에 그려진 미소를 확실히 머릿속에 담았다.

붉게 물든 석양빛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힌다. 측면에서부터 찾아온 빛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반사되었다.

따스한 색체가 눈앞을 가득 매웠다.

어딘가 낭만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광경이다.

어째선지 자신이 위로받는 그 아이러니한 장면에.

“아···.”

그녀는 홀린듯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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