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4, 양아치(수정)
* * *
인터넷은 아주 가끔, 무척 뜬금없는 데에서 힘을 발휘하고는 한다.
랜선으로 우연히 만났던 인간이 알고 보니 이성이라던가.
평범하게 야짤을 신청했던 인간이 알고 보니 같은 학교 동기였다던가.
그 동기랑 아무 생각 없이 대화를 하다 보니 비밀스러운 계획을 엿듣게 된다던가.
그런 일 말이다. 지금 자리에 앉아있는 내 상황이 딱 그랬다.
나는 지금 한 오픈 채팅방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눈앞으로 문자 내용이 명멸하듯 내비친다.
[글러먹은나: ─그래서 이런 계획을 생각 중인데 이게 통할 거 같아요? 일단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보인다고 하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서. 애초에 누굴 위협한다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hala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러먹은나’의 문자였다.
저번에 그녀의 고민을 들어줘서 그런지, 그녀는 가끔 나에게 이렇게 문자를 걸어주고는 했다.
아무래도 저번에 제 성벽을 밝히면서 꽤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뭐, 나로서도 심심함을 달래기 좋았기에 자주 상대해 주는 편이었다. 현실의 그녀와 대비되는 인터넷 속의 모습을 보는 건 그 자체로 즐겁기도 했으니.
그래서 평소 자주 장난치며 말 상대를 해준 것뿐인데··· 설마 이렇게 뭐가 얻어걸릴 줄이야.
얼떨떨한 상황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요거 봐라?’
요새 꽤나 잠잠하다 싶었는데 아주 앙큼한 짓을 꾸미고 있었네?
설마 이런 계획을 만들고 있을 줄이야. 상상조차 못 하고 있던 일이었다.
문자의 내용은 대강 이랬다.
친구에게 추천을 받아 남자를 불량배들에게서 구해준다는 쌍팔년도의 계획을 만들어냈는데, 과연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다는 것.
그래서 익명에서나마 이렇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덕분에 나는 은밀히 진행 중이던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부 알아차려 버렸다. 참으로 우연히도 말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허무하겠지만, 나로서는 꽤나 기꺼운 일이었다.
솔직히 안다고 해서 따로 훼방 내놓을 생각도 없고.
‘······.’
나는 잠시 그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으슥한 뒷골목, 여럿 여자에게 둘러싸여 겁박을 당하는 가련한 나의 모습을···.
‘오···.’
그걸 생각하자 조금 꼴려오는 듯했다. 이성에게 사방위로 둘러싸인 모습이라니. 이건 마치 하렘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물론 그들은 나를 협박하는 상황이겠지만··· 어쨌든 이성에게 둘러싸인다는 게 중요했다.
아랫도리에 있는 소중이또한 재밌어 보인다고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죄다 연극이라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애써 계획까지 만들었는데 내가 거절하기도 미안한 일이었다.
하여, 나는 그녀의 계획을 수락하기로 했다.
타닥타닥, 가볍게 키보드를 입력해 문자를 보냈다.
[hala: 괜찮은 것 같은데요?]
[글러먹은나: ..진짜요?]
[hala: 네 어차피 연극이잖아요. 뭐 어때.]
[글러먹은나: ...그렇긴 한데]
일단 괜찮다고 말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다.
역시 쫄보라 그런가, 그녀는 사람과는 잘 친해지면서도 이렇게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면 한 발자국 뒤로 빼는 경향이 있었다.
일을 실행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잔뜩 집어먹는 것이다. 이런 점은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신중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겠지만, 그와 반대급부로 망설임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덕에 당장 몇 주전 야스각도 놓치지 않았는가.
그다지 좋지 않은 성향이었다. 나는 그녀가 판단을 내릴 수 있게 열심히 설득에 임했다.
그렇게 몇 번 정도 대화를 주고받자, 이은별도 확실히 결정을 내린 듯했다.
좋은 쪽으로.
[글러먹은나: 알았어요 그럼. 조언 고마워요.]
그걸 본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됐다.’
자 이제 그녀는 며칠 안에 내게 수를 던질 것이다.
나는 불량한 무리에 사로잡힐 것이며, 그녀는 내가 겁먹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가 멋지게 무대 위로 올라올 게 뻔했다. 여기까지는 확정된 사실이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될까. 과연 그녀의 계획대로 내가 어멋! 하며 그녀에게 빠질까. 아니면 어색한 연기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질까.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변수가 발생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다만 이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뭐가 되었든 꽤나 기대가 되는 상황이라는 것.
“읏차.”
그렇게 대화를 끝마친 나는 침대위로 누웠다. 어쨌건 계획은 전해 들었다.
이제 자신은 편히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후에 찾아올 연극을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
──그렇게 하여 4일.
밤낮이 네 번씩이나 바뀔 동안의 시간. 그동안 놀랍게도 별일은 없었다.
그저 평온하게 일상을 이어나갈 뿐. 별다른 기색도,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계획을 알아챘다고 해서, 무언가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그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아 일종의 준비기간이라고 여겼다.
결정을 하고 실천을 하기 전, 인력을 불러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는 그런 기간.
실제로 이은별은 나를 찾아올 때면 이따금씩 호구조사를 하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는 어디 살아요? 가족이랑 같이 사시려나?”
“아니, 자취하는데.”
“오··· 그렇구나. 학교 오는데 멀어서 힘들지는 않으세요? 저는 이 근처이긴 한데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는 건 힘들어하거든요···.”
“나도 이 근처야. 오는데 2~30분 정도 걸리니까.”
대충 이런 식으로.
사는 곳은 어느 지역인지, 거리는 얼마정도 되는지, 구성원은 어느정도 되는지 등.
그녀는 꽤나 집요하게 이런 걸 물어오고는 했다. 물론, 대놓고 물어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대화를 하다가 잠시 틈이 날 때, 의식에 틈 사이로 아주 은밀히 한 두 개씩 질문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하마터면 이게 호구조사인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이다. 만약 내가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치챘고, 그게 사전조사라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정보를 내주었다.
왜?
그야 재밌어 보이니까!
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면 ‘우연히’ 불량배들을 만나기 어려울 테니까!!
재미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희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루한 나의 인생에 한 줄기 연극을 선사해 주겠다는데 이 정도면 충분한 값어치가 있었다.
사실 알려준 거라고 해봤자 완전한 집 주소도 아니고, 그냥 집 가는 길 정도 뿐이었으니 나로서는 거저먹는 이익이였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일부로 정보를 새어보낸 후.
나는 그녀의 분신인 ‘글러먹은나’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대충 어느 장소에서 계획을 실행하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그래야 나도 열심히 연극에 어울려 주지 않겠는가. 다행히 그녀는 순순히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글러먹은나: 음.. 솔직히 저는 이런 머리 굴리는 일은 잘 못해서... 일단 친구 말로는──]
내 정보를 토대로 계획이 구체화 되고, 그 구체화 된 정보가 다시금 가공되어 나에게로 들어온다.
아쉽게도 이은별도 완벽히 계획을 알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그녀의 ‘친구’라는 인간이 대부분의 내용을 짠 듯 보였으니.
그래도 일단 이은별의 대답을 요약하자면, 계획은 어느 뒷골목 으슥한 장소에서 시작될 예정이라는 듯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딘지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거기 말하는 거구나.’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골목길이 하나 존재한다.
전봇대도 없고 근처에 편의점이나 주거시설도 애매하게 떨어져 있어서 밤만 되면 새까만 암흑이 드리워지는 그런 골목길이 말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이 잘 거닐지 않는 길이었는데, 나 같은 경우엔 이 골목길을 지나가는 게 빨라서 자주 애용하는 루트였다.
아무래도 실행장소는 이쪽으로 결정한 듯 했다.
하긴, 이만큼 안성맞춤인 공간도 없긴 하지. 분위기 있고, 인적 드물고, 음습하기까지 한 장소라니.
나 같아도 이곳으로 결정할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잡생각을 돌리다보니 어느새 강의시간이 끝나 있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다 지나갔네요. 여러분들 수고하셨습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두 열심히 공부하시길 바라요~”
문득 시계를 본 교수님이 강의의 끝마무리를 통보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스프링처럼 일어나 문 밖으로 튀어나간다. 아무래도 강의가 꽤나 지루한 듯했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끄으으···!”
뿌드득.
굳어있던 근육이 풀리며 잠시 온 몸이 당겨온다. 그 불편한 감각이 지금만큼은 기분 좋은 청량감은 선사해 주고 있었다.
점차 수마속에 빠지고 있던 정신이 다시금 정신을 제정신을 차린다. 나는 속으로 가볍게 욕지거리를 날렸다.
‘거지같은 미적분.’
아니 시발, 분명 경제학과는 문과 쪽 계열인데 왜 수학을 배우는 거지?
왜 고등학교 때도 제대로 듣지 않았던 미적분을 더 집중해서 배우냔 말이야.
이건 말 그대로 좆같고도 좆같은 일이었다.
평생 수학을 4~5등급 근처에서 놀았던 나에게 미분 적분이란 크나큰 벽이었다.
f(x)가 뭐야··· 내가 그걸 또 왜 구해야 하냐고. 그딴 건 야짤 그리면서 기억 속에서 지운지 오래란 말이야.
“후···.”
잠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일단은 끝났으니··· 지금은 집에 돌아간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그대로 가방을 챙겨 학교 밖으로 나왔다. 사선으로 걸친 해가 내 망막을 찌른다.
해는 이미 저기 끝자락에 걸쳐져 있었다. 아직 석양까지 지지는 않았으나, 좀 있으면 붉게 물드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오늘은 특히 수업이 늦게 끝나버렸다.
안 그래도 수업이 두 개 있는 날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보충수업까지 잡힌 탓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오후 5시 정도가 되어서야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하암······.”
피곤하고 졸리다.
오랫동안 활성화되었던 뇌는 이제 자신에게 휴식을 요구했다.
당장 이대로 누우면 2~3시간 정도는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전에 가볍게 짱깨 같은 걸로 배까지 축이면 금상첨화겠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게 당장 글러먹은 개돼지가 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되지.’
아쉽게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며칠 전부터 고대하던 재밌는 이벤트가 마침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오늘이냐 약간 불만이 생기긴 했지만, ‘글러먹은나’의 말로는 오늘만큼 최적인 시간이 없다고 했다.
현재시각 5시.
직장인들이 퇴근하기엔 이르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교했을 시간.
4시와 6시에 딱 끼인 공백의 시간인 것이다.
그런 만큼 인적 드문 장소는 더 인적 드문 장소가 되었고,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묘한 감성을 품게 해주기 충분했다.
여기에 좀 껄렁한 양아치만 있으면 무대에 소품은 완벽히 준비된 셈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기를 한참··· 나는 드디어 약속에 땅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아.”
모퉁이 너머의 비좁은 골목길에 고개를 빼꼼 내밀자, 그곳에 뭉친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인원은 꽤나 많았다. 마치 그 많은 인원수로 골목길을 매꾸겠다는 듯, 총 5명의 여성들이 똘똘 뭉쳐서 서있었다.
나는 가볍게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살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
골목길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꽤나 괜찮았기 때문이다.
일단 입은 옷들부터가 무척이나 바람직했다!
하나같이 자신의 몸매를 뽐내듯, 가볍고도 날티나는 패션을 한 여자들.
어떤 여자는 형광색 팬츠의, 회색의 언더아머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그 꽉끼는 옷으로 자신의 몸매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흉부 위로 봉긋 올라온 가슴은··· 솔직히 말해 약간 작긴 했으나, 그래도 얇은 허리와 허벅지를 보면 꼴리기에는 충분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여자는 어떤가!
비록 아래쪽에는 흰 츄리닝을 입어서 별로 노출이 없으나, 상의로는 대담한 나시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새하얀 쇄골라인에서 시선을 내리면, 마치 명암을 주듯 깊게 파인 가슴골을 볼 수 있었다.
그 가슴골을 쳐다 볼 때면 조금씩 제 쥬지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맨 앞의 두 여자만 봐도 이 정도다. 이 두 여자 이외에 다른 3명의 여성도 꽤나 꼴릿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얇거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패션들.
짧고 꽉 끼는 언더아머 브랜드의 옷을 주로 입고 있었다.
전형적인 일진 양아치들의 패션이 이곳의 여자쪽으로 넘어온 모양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볼 때는 그것만큼 꼴불견인게 없었는데··· 여기서 본 일진패션은 그저 꼴릿할 뿐이었다.
일진들도 다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그들을 꼴불견 대신 꼴잘알로 칭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음속 깊이 안도하기도 했다.
‘휴···.’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못생긴 년이 있으면 어떡할까 했는데.
아무리 이게 연극이라고는 해도 만약 문신돼지육수국밥TS충 같은게 있었더라면,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도망갔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문신돼지육수국밥TS충이라니. 이 대체 무슨 혼돈이란 말인가!
내가 직접 말하고서도 이런 끔찍한 게 있다니 하며 경악할 정도였다.
그런 것은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되며,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될 불경스러운 존재였다.
가히 니알라토텝의 광기와도 비견되는 단어를 나는 얼른 머릿속에서 지웠다.
‘응?’
그렇게 잠시동안 고개를 내밀고 골목길을 살필 때였다. 본래 똑같은 풍경도 계속보다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몇 분 동안 여자들을 관음하고 있자, 그 뒤에서 조용히 않아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몇 번이나 보았었던 얼굴, 그 특유의 비음과 가식이 맘에 안 들었던 친구.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쟤가 왜 저기있어?’
한호철이 양아치들 틈에 껴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