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53화 (53/125)

〈 53화 〉 53, 흔들다리

* * *

언제나와 같은 화창한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세상에 밝은 빛을 내뿜어주었고, 살짝 덥긴 하나 아직 봄을 유지하는 날씨는 산뜻한 기분을 선사해 준다.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대낮의 공기는 나른한 정신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물론 이세원 같은 경우에는 이런 날씨조차도 덥다고 인상을 찌푸리겠으나.

여름에도 여러 번 뛰어다니는 이은별에겐 이 정도 더위는 그저 기꺼울 뿐이었다.

그녀는 맑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폐부에서 나온 한숨이 공기 위에서 흩어진다.

분명 하늘은 뻥 뚫리고 좋은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마음은 답답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분명 일상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정작 풀린 일은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 오묘한 괴리감에 괜히 기분만 다운되어가는 듯했다.

사실 그녀는 이 답답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세원. 그 때문에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술을 마시고 헤어진 지 벌써 3주가 넘게 지났다.

봄이었던 계절이 스멀스멀 여름으로 넘어가고, 무성했던 꽃들이 져버리고 울창한 나뭇잎이 피어날 시간.

한 계절의 생동감을 대부분 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그동안 그와 따로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만나는 일은 오직 학교에서의 제한된 휴식시간 때뿐.

그 감질맛 나는 시간동안 할 수 있는 대화라고 해봤자 별 거 없었다.

어제는 어땠냐···잘 지냈냐··· 이런 이야기들뿐.

일단은 그 시간을 이용해서 사이가 서먹해지는 건 막고 있긴 한데, 그 이상으로 무언가 관계가 진전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으으, 아니 왜 항상 거절하는 거지?”

솔직히 이 정도로 놀자고 달라붙었으면 한 번쯤은 같이 놀아줄 수 있잖아.

3주 전에는 같이 여러 번 술도 마셨으면서 갑자기 왜 거절하고 있는지··· 솔직히 그녀로써는 전혀 이해가 안 되었다.

물론, 이세원이 바쁘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원래 사람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같은 단어라고 해도 듣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변질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세원의 입장에서는 정말 바빠서 거절한 게 맞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는 그냥 변명같이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일단 그의 말이니 열심히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심이 싹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한 가닥씩 나온다···.

그렇게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야 너한테 이제 흥미가 없어져서 그렇지. 멍청아.”

유보람이었다.

제 옆에서 열심히 담배를 태우고 있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이은별은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눈과, 실실 웃고 있는 입꼬리가 보인다.

무슨 의도가 담긴 건지는 뻔하다. 놀리고 있는 것이다.

은별은 시큰둥한 눈빛으로 보람을 째려보았다.

자신은 이리 심란한데 친구란 년은 저렇게 놀리고 나 있으니. 당장 저 연기 가득한 인중에 죽빵을 놔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최근에 이새끼한테 불만이 쌓인게 많았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를 가장하며 유보람에게 말했다.

“야, 그만 끼어들어.”

“오잉? 뭔 소리임.”

“나 선배랑 이야기할 때··· 자꾸 끼어들지 말라고.”

안 그래도 이야기할 시간이 적은데. 자꾸 사람들이 끼어드니까 자꾸만 대화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

막상 대화하려고 해도 주변이 너무 북적거려서 목소리도 묻히고.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녀석에게 한 마디 한 것이건만···.

“어 싫어~ 나도 세원 선배랑 친해질거야~.”

유보람은 그저 웃으며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그걸 본 이은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그래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솔직히 예상한 반응이라 별로 실망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잠시 있자 유보람이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래도 걱정 마 야. 세원 선배는 우리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이은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아니··· 우리들 몰릴 때마다 세원 선배 인상 찌푸리잖아. 표정도 거의 무표정으로 있고. 딱 봐도 불편해 하는 게 보이는데 뭐.”

유보람은 이런 말 하기 거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본 이은별은 잠시 무슨소리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어쩐지 정작 대화에 끼어들어도 별로 말을 걸지 않더니.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세원 선배가 자신을 거북해하고 있다고.

보통 그렇게 느끼면 알아서 멀어질 법도 한데, 그러면서도 다가가는 유보람을 보면 참··· 심지가 굳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뻔뻔하다 해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단 은별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기로 했다.

“아마 그건 아닐껄?”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딱히 이유 없이 누군갈 미워하는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유보람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다가갈 때마다 거의 무표정이던데. 표정도 찌푸리고.”

“그건 아마··· 그냥 어색해서 그래. 그리고 찌푸린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눈매인거야.”

다른 사람들을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와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어보았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 미묘한 차이는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세원은 이들이 싫어서 얼굴을 찌푸린 게 아니다. 사실은 그냥 눈매가 사나웠을 뿐이고, 자꾸 얼굴에 표정을 지우는 것도 단순히 어색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날카로운 생김새와 달리 사실 그는 꽤나 소심한 편이었으니까. 지난 몇 주간 붙어있으면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얼핏 보면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그는 정이 많았으며 유쾌했고, 은근히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자신이 다가갔을 때, 어버버 하며 자신을 대하던 이세원의 모습을. 그 날카로운 눈매와 달리 당황하던 그 표정은 꽤나 인상깊었다.

온갖 신경질을 다 부릴 것 같은 생김새와 달리 생소한 그 모습은 여전히 제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걸 생각하자 자동으로 웃음이 나오는 지어지는 기분이었다.

“어, 뭐냐? 갑자기 왜 실실 쪼개.”

그리고 그 표정을 귀신같이 알아챈 유보람이 물었다. 보람의 눈에 의문이 담긴다.

그걸 본 이은별은 다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안 된다. 자신이 그를 생각하면서 웃었다는 걸 알아채면, 저 녀석이 실컷 놀려댈게 뻔했다.

유보람은 꽤나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다. 그 레이더에 걸린다면 피곤해질 게 뻔했다.

그녀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얼른 주제를 돌렸다.

“야, 그것보다 나 좀 도와주라. 요즘 진도가 안 나가.”

이건 반쯤 진심이 담긴 부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요즘 진도가 막힌 건 맞았으니까.

뭔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던 찰나였다. 혹시 조언을 얻을 수 있나 해서 그녀에게 물어본 것이고.

“야, 씨발. 5만 원이 걸려있는데 내가 도와주겠냐?”

물론 유보람은 거절했다. 그녀 입장에선 도와줄 이유가 없었으니.

굳이 리스크를 져가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은별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으니.

“아 그냥 좀 도와줘. 네가 뭘 해도 이긴다며. 혹시 쫄았냐?”

바로 이세원에게서 터득한 ‘쫄?’이라는 단어였다. 모든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할수 있는 기술.

이 단어에는 마법이 걸려있어서 들은 사람의 의욕을 고취시키고는 한다.

“크윽···.”

과연 이 마법에는 녀석도 별수 없는지 분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길 잠시, 보람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장난기 섞인 얼굴로 이런 제안을 했다.

“아, 그럼 이건 어때? 이세원 선배를 일부러 위협하는 거야.”

“···뭐? 야 미쳤냐?!”

그걸 들은 이은별은 빼액 소리질렀다.

이 미친년이 조언을 부탁했더니 그걸 이용해 사이를 깨뜨리려고 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제 내기돈이 날라가는 것은 물론이요, 애써 친해졌던 관계가 파탄날지도 몰랐다.

그래, 얘한테 부탁한 내가 미쳤지. 이은별은 고개를 절래절래 지으며 시선을 돌릴려 그랬다.

그러나 그것보다 유보람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아니아니, 들어봐.”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잇는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알지?”

“···들어는 봤지.”

안정된 다리보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이성을 만났을 때 호감도가 더욱 상승한다는 이론이었다.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그로 인해서 오는 신체적 변화를 상대방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꽤나 유명한 이론이었기에 은별 또한 한 번 정도는 들어본 적 있는 주제였다.

“그걸 이용하는거야.”

그녀는 유보람이 무슨 말을 하나 일단 잠자코 들어보았다.

녀석의 전체적인 계획은 이랬다.

일단 자신의 친구들을 모아 마치 불량배처럼 행동하게 한다.

그렇게 불량배가 된 친구들을 이용해 이세원을 위협하는 것이다.

돈 있냐? 너 좀 잘생겼다? 이런 식으로 그를 한없이 심리적으로 몰아세운다.

그렇게 이세원이 겁에 질렸을 때쯤 똬앗! 이은별이 출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퍽! 퍽! 팍! 불량배들을 물리치고 이세원을 구해낸다.

그렇게 되면 불안감에 젖어있던 이세원이 어멋! 하고 이은별에게 반한다─이런 전개였다.

놀랍게도 유보람은 저 의성어들을 전부 제 입으로 내뱉었다.

그 계획을 전부 들은 이은별은 웃음을 지었다.

“허.”

헛웃음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한숨의 또 다른 종류였다.

‘미친년인가?’

내가 대체 뭘 들은 거지? 쟤는 진심으로 저런 게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저런 난잡하고 성의없는 플롯이라니. 우연에 우연을 가장한 개연성 좆망의 상황이다.

성의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나름 눈치가 좋은 그라면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하여, 은별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무슨 개소리냐며 타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게 빨랐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어?”

그들의 옆으로, 한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끼어든다.

한호철이었다. 선하고 잘생긴 인상을 가진 그가 그들의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유보람이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잠시 대화가 오고갔다.

이은별 자신이 이세원을 꼬시고 있다는 이야기와, 지금 진도가 막혔다는 사실, 그리고 방금 유보람이 지껄였던 되지도 않는 계획까지.

‘아니···.’

그녀는 굳이 저걸 전부 말해야 하나 싶었다. 쟤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텐데.

심지어 ‘내기’라는 내용조차 쏙 빠진 상태였다.

‘이러면 내가 세원오빠를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이잖아.’

단순히 내기에서 지기 싫었을 뿐이다··· 그것뿐이었다.

친구 관계로서 그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성 관계로서 그를 좋아하는지는······.

“······.”

아직 잘 모르는 일이었다.

괜스레 이은별의 머릿속에서 3주 전, 그가 가슴을 만졌던 일이 재생되었다.

갑자기 그게 왜 생각나는지··· 그녀의 얼굴이 아주 미약하게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어느새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한호철이 보였다.

눈동자가 잠시 차가워졌다가, 가라앉고, 다시 빛을 찾기를 반복한다.

이은별이 이세원을 꼬시려 한다는 이야기에서 질투심이 잠시 발휘된 거였다.

그러나 그 낌새를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연기의 대가인 그는 금세 웃는 표정을 되찾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괜찮은데?”

유보람이 말한 계획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이은별이 반응했다.

“뭐? 아니 그딴 계획이 괜찮다고?”

“야! 그딴 거라니!”

옆에서 뭐가 반응하긴 했지만 무시했다. 솔직히 자신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딴 쌍팔년도 연출이··· 괜찮다니?

하지만 한호철의 의지는 확고했다.

“응. 솔직히 약간 조잡하긴 한데, 그건 방금 막 만들어내서 그렇지. 조금만 보완하면 통할 거 같아.”

“봐봐! 그렇대잖아 씨발~”

이은별은 황당했다.

‘···진짜?’

그 둘은 그 뒤로도 이 계획의 합리성을 설파했다.

원래 클리셰가 통하는 법이라느니, 흔들다리 효과가 개좆밥으로 보이냐느니.

그 열정적인 모습에 그녀 또한 점차 귀가 솔깃해지고 있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는 옛말이었다.

고작 세 명이면 실존하지 않는 것도 실물로 만드는데.

어색한 이야기를 솔깃하게 들리게 하는데에는 고작 두 명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기를 한참··· 이은별은 결국 설득당할 수 밖에 없었다.

“괜찮은 것 같기도···.”

위협을 한다는 것에서 약간 내키지 않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딱히 방법이 없었으니까.

만약 그가 겁먹으면 자신이 얼른 나서서 해결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은별이 어느 정도 이쪽으로 넘어오자 한호철은 회심의 한 수를 던졌다.

“에이, 어쩔 수 없다. 이번 일은 내가 도와줄게~”

마치 선심 쓰듯 자연스럽게. 이 일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이은별은 물었다.

“뭐? 진짜?”

“응~ 어차피 네 친구들한테 불량배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기도 애매할 거 아니야. 혹시라도 그 사람이 아는 얼굴 있으면 바로 들킬 테고.”

확실히 그렇긴 했다. 남자 하나 때문에 불량배 연기를 해달라니. 부탁의 부담감은 물론이오, 친구들한테도 오랫동안 놀림당할 게 뻔했다.

“그리고 원래 이런 일은 여자만 있는 것보다 남자가 같이 끼는 게 더 현실성 있어.”

“···그런가?”

솔직히 잘은 몰랐다. 하지만, 같은 ‘남자’가 하는 말이니 꽤나 설득력이 있는 듯 기분이었다.

“아니 그래도 너무 미안한데. 너한테 부탁하는 것도 똑같이 부담되잖아.”

“아니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리고······.”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한호철은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눈동자가 잠시 깊게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래, 그럼.”

이은별은 그대로 한호철의 제안을 수락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