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51, 무리
* * *
잠시 과거의 이야기를 하겠다.
일단, 지금까지의 내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게 흘러갔다.
핀박스 계정을 생성한 뒤로는 만화 그리는 일 때문에 눈코 뜰세 없이 바빴으니까.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달려와 구상그림구상그림의 행동을 반복한다. 우람한 금태양의 쥬지와 꼴릿한 히로인을 그리고 있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뿐이랴.
가끔씩 들어오는 커미션과, 성아린과의 야스를 하다 보면 하루가 삭제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삭제된 시간을 땜빵하기 위해 다시 몸을 혹사시키고··· 그런 식으로 살다보니 다른 일에 신경 쓰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이은별이랑 따로 놀지 못한 건 말이다.
마지막으로 같이 놀러간지 3주가 넘어가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나는 따로 이은별과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물론 그동안 그녀가 술 권유를 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꽤나 자주 놀자고 요청을 해오던 이은별이었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나, 채팅으로 대화할 때나.
하지만 나는 전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가 바빴으니까.
다가오는 통장의 압박을 느끼면서 술까지 먹을 만큼 내가 여유롭진 않았다.
솔직히 나도 술을 안 먹은 지 꽤나 오래되어서, 오랜만에 위장에 알코올 좀 들이붓고 싶었지만.
굳이 한 병에 5000원이나 내면서 수명을 단축시킬 생각은 없었다.
또한 성아린의 존재 유무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
예전의 나라면 뷰지 한 번 보겠다고 억지로라도 대작을 즐겼겠으나, 지금은 언제든지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섹파가 하나 있었으니.
굳이 이은별에게까지 신경을 분산시킬 이유가 적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3주 넘게 그녀와 논 적이 없다··· 그런 이야기였다.
그럼 여기서 당연한 추론이 하나 뒤따라온다. 그 정도로 소홀했으면 사이가 서먹해진 것은 아니냐? 이런 추론 말이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마음 편히 대답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렇진 않았다.
*
“하아암···.”
하품을 내쉰다.
입안에서 튀어나온 공기는 대기와 만나자마자 사방으로 해체되었다.
아직 겨울이 아니라 입김은 보이지 않지만 주변에 변화되는 온도는 미약하게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른 아침, 학교에서 있던 일이었다.
‘졸립네.’
어제 늦게 자서 그런지 눈이 자동으로 감긴다. 나는 하품으로 나온 눈물 한 방울을 대충 닦아내었다.
내가 그러고 있자 앞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졸려요? 엄청 피곤해 보이네.”
이은별이었다.
여느 때처럼 야구모자를 쓴 그녀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 보인다.
나는 대충 대답했다.
“응, 어제 매트리스 빠느라 좀 늦게 자서.”
“매트리스요? 아니 그건 갑자기 왜 빨아요?”
“······어제 거기에 물을 좀 쏟았거든.”
“물은 금방 마르잖아요.”
“아 좀, 정확히 물은 아니고··· 좀 더 찐득한 거야.”
“?”
내 말에 그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 그녀 나름대로 납득한 듯 보였다. 대충 음료수나 커피 같은 걸 쏟았다 생각하겠지.
정확히는 성아린이 뿜은 씹물이었지만, 그것까지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조심좀 하지. 매트리스 빨기 어려운데.”
“다행히 안쪽까진 안 스며들었어. 나중에 방수커버 사려고.”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 사이사이에 딱히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가득했다.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대화 또한 편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3주 동안 같이 놀지 못했다고는 해도 만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강의실도 같은 층인 경우가 많았으니.
그녀는 이렇게 짬이 날 때마다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따로 놀 수는 없으니 여기에서라도 대화를 하겠다는 듯.
뭐 나도 여기까지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흔쾌히 말 상대를 해주곤 했다.
어차피 핸드폰만 하고 있기에는 지루하니, 나로서도 말 상대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나는 이 강의실에 친구가 없으니까.
···좀 슬프군.
“어, 뭐야. 은별이 언제 왔어?”
아 그래도, 조금 달라진 점이 있긴 했다.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자, 한 여자가 은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옆에 선다.
유보람이었다. 이은별의 친구이며 나와 같은 학과를 다니고 있는 여성.
꽤나 날티나 보이는 그 모습이 인상적인 친구였다.
방금까지 막 담배를 피우다 강의실로 온 건지, 몸에서 미약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이은별이 자기 코를 잡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우, 아까 왔어. 냄새나니까 좀 떨어져라.”
그러면서 제 어깨에 걸쳐진 팔을 툭 쳐낸다. 그 손길이 기분 나쁠만 한데, 유보람은 그저 실실 웃을 뿐이었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이은별과 떠들고 있다 보면 때때로 다른 애들이 끼어들곤 했다.
본래 어색한 사이일 경우 둘보단 셋이 편한 법.
든든한 프렌드 실드라는 벽은 그 어색함을 한층 더 줄여주는 장치였다. 설령 자신이 대화하다 이야기가 끊겨도 곧바로 다른 이가 대화해 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다수라는 건 편안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있자니 유보람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선배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 응 그래. 좋은 아침.”
솔직히 야행성인 나에게 아침은 그저 좆같은 시간일 뿐이지만. 일단은 똑같이 대꾸해 주었다.
굳이 나를 찾아온 사람에게 냉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린 채 눈가에 적당한 호의를 담는다. 그것만으로도 어색한 분위기는 꽤나 풀어졌다.
이 무리에 참여하는 인간은 유고은 뿐만이 아니었다.
“야 유보람! 왜 이렇게 늦었냐?”
“또 담배피다 왔겠지. 이 새끼 꼴초잖아.”
그녀가 도착한 걸 본 뒷자리에 다른 여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프랜드 쉴드는 많을 수록 좋은 것이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분위기가 복잡해질수록 자신 하나는 묻혀가기 쉬워지니까 말이다.
그렇게 무리가 불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이은별과 나를 중심으로 활발한 여학생들이 둘러싸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그냥 친구와 대화하기 위해, 누군가는 그냥 애들이 이쪽으로 가니까.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여러 가지 시선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서로 친구들과 대화하는 척 신경을 분산시키지만, 가끔씩 제 가슴으로 향하는 시선을 눈치채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남자들이라면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겠으나.
솔직히 나는 기분이 좋았다.
여자들의 성욕섞인 시선은 꽤나 기분좋은 일이었다.
심지어 이번엔 시무라 아지매도 아닌, 한창때의 여대생이었으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세원 뭐냐구···.’
이런 게 개연성?
이런 게 외모의 힘?
‘이세원’이 한 짓중에 이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월세니 학교니 그런 거 다 좆까버린 건 꽤나 빡이 치긴 했지만.
그와 반대급부로 외모에 힘을 썼지 않은가.
고맙다 ‘이세원’. 네가 남긴 수분크림과 피부팩의 의지는 여전히 내가 잇고 있으니 걱정 말고 성불해라.
‘근데······.’
뭐 그래도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불편하군.’
나 아싸찐따 이세원.
소수에게 강하며 다수에게 약한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간.
나보다 소심해 보이는 새끼에겐 한없이 여포가 되지만, 이렇게 텐션 높은 인싸들 틈에 놓이면 자동으로 굳게 되는 나였다.
솔직히 말해 존나 어색했다.
“야 그러고 보니 이번 시험공부 좀 했냐?”
“공부? 게임만 존나 했는데.”
곳곳에서 여자애들이 여러 주제의 이야기로 떠든다. 얼핏 보면 꽃밭에 있는 느낌이지만, 실상은 곳곳에 놓인 장미 가시를 내가 피해 가는 느낌이었다.
자동으로 입이 무거워지며, 갑자기 내 행동거지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많은 관심을 받다 보면 고장 나는 아싸의 고질적인 병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 무리에서 혼자 외딴섬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대화는 끝없이 사방을 오고 가고, 내가 아는 주제도 여러 번 튀어나오는데.
정작 나는 겁먹어서 끼지를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한심한 내 모습에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같았다.
‘일단 가만히 있자.’
그래서 나는 무표정을 택했다.
애써 말을 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음으로써 내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다.
무표정은 좋은 일이었다. 냉정을 가장하다 보면 내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있었으니.
······뭐, 그래도 완전히 외딴 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보니 혹시 오빠도 게임 하세요?”
가끔 이렇게 대화를 걸어주는 고마운 인간들이 있었으니까.
“에이 뭘 그런 걸 물어봐. 남자들 게임 잘 안 하잖아.”
“아 왜, 할 수도 있지. 그거 남녀 차별이야.”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 하긴 하는데.”
이럴 때는 나도 열심히 대꾸해 주는 편이었다.
애써 다가와 줬는데 쳐낼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대답하자 방금 질문을 했던 여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 정말요? 라인은 주로 어디 가세요?”
“주로···탑을가.”
“오, 탑 재밌죠.”
한줌 남아있는 사교성을 이용해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다행히도 내겐 괜찮은 화법이 다수 있었다.
작년, 여러 알바와 노가다를 전전했던 경력이 있다. 거기에서 단련된 사교성은 대화에서 충분히 어색함을 줄여줄 수 있었다.
“응, 탑에 오는 오소리를 찢어 죽이는 게 낙이야.”
“아? 아··· 그렇구나···.”
아마도.
“야! 좀 떨어져라 좀. 선배 불편해하는 거 안 보이냐?”
“은별아 근데 그 레깅스 어디서 샀냐? 존나 편해 보임.”
아무튼 최근에는 이런 형식으로 돌아갔다.
나와 이은별이 대화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은별을 매개로 그녀의 친구들이 다가온다.
그렇게 되면 어느새 주변은 북적거려지고, 가끔씩 내게로 대화가 걸려오는 게 대부분의 일상이었다.
아직 어색하기도 하고, 말 걸기도 불편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이렇게만 지속된다면 나도 ‘친구’라는 걸 사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아, 친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이로써 나도 인싸의 세계에 한 발짝 들이미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항상 그렇듯, 일이 내게 좋은 쪽으로만 풀리는 일은 없었다.
이 북적거리는 무리들 사이로, 갑자기 한 인영이 끼어든다.
이 여초무리 사이로 끼어든 건 놀랍게도 남자였다.
“무슨 얘기해?”
한호철.
앞자리 남자애들 중 가장 활발한 남자애.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앞에 섰다.
잠시 나를 흘기면서.
‘···왜 쳐다보지?’
그는 이상하게도 나를 꼬라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