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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40화 (40/125)

〈 40화 〉 40, 데이트 코스

* * *

힐끔.

길거리를 걷다 보면.

힐끔.

누구것인지 모를 시선이.

힐끔힐끔.

이따금씩 찾아오고는 한다.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스치는듯한 시선들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웃고 떠들던 남녀가 우리와 교차하며 지나갈 때면 그들의 눈빛이 우리들에게 꽃히는 것이다.

미약한 감탄이 섞인 눈빛, 묘한 질투가 담긴 눈빛 등등 갖가지 감정이 저를 꾀뚫고 있다는 걸 성아린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

햇볓이 따가운지 작게 인상을 찌푸린 이세원이 보인다. 그녀의 입장에선 그 찌푸린 얼굴조차 뭔가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외모에서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아까 전에 그녀가 격이니 뭐니 했었던 말이 있을 것이다. 인싸들과 아싸들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말 말이다.

성아린은 그 벽을 이세원에게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저 걸어 다니는 인싸들보다 한층 더 높은 벽을.

다가가고는 싶으나 섣불리 다가가면은 찔릴 것 같은 분위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는 그가 제 옆에서 걷고 있다는 게 아직 제대로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다. 꿈속같이 행복하긴 하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 같은 느낌에 불안감도 같이 느껴졌다.

그 느낌에 사로잡히기를 잠시, 그녀는 이내 고개를 휘저으며 잡생각을 지웠다.

‘일단 놀자.’

계속 불안해해봤자 정신만 피폐해질 뿐이었다.

지금은 일단 그를 즐겁게 해주는 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준비는 충분하다. 인터넷에 여러 번 검색해가며 데이트 코스도 짰으며, 한창 남자들에게 인기 있다는 영화도 구매해 둔 상태였다.

스케줄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것이다. 그러다가 밤중이 되면 헤어지는 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더 할 수 있으면···.’

밤도 같이 보내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이 빨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살색 배경이 난무한다.

“큼···.”

아무래도 잡생각을 지우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

주말의 시내는 언제나 북적이는 편이었다. 사회에 찌든 현대인들이, 또는 학교에 지친 학생들이 주말만 되면 뛰쳐나오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하루 동안 신나게 놀며 푼다. 활동적이고 좋은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다.

솔직히 나도 노는 것은 좋아했으나, 그와 반대로 사람이 많은 곳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거리를 걷는 게 불편했고, 날이 더울 때면 사람의 열기가 더해져 더위를 두 배로 느끼게 해줬으니까.

불편하고 덥다. 그러다보면 짜증이 절로 올라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필 오늘은 날씨가 꽤나 좋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어서 태양이 내 피부를 격렬히 태우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체 왜 이리 꼬라보는지 그때마다 괜한 불편함을 느껴졌다.

‘솔직히 이대로 모텔가고 싶긴한데···.’

뭐 일단은 참기로 했다.

그녀 모습을 보니 뭔가 많이 준비한 것 같던데, 거기에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가 어색한 사이인 건 맞으니까.

저번에 어찌해서 야스까지 갔다고는 해도,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서로 대화할 만한 주제도 얼마 없었고, 서로가 어느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남녀 사이에 ABC가 있다면 우리는 AB를 넘겨버리고 바로 C로 직행한 수준이었다.

존나 신기한 관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만남은 어색함을 풀기에 적합했다. 하루 정도야 이끌려 다녀줄 수 있었다.

“이쪽이야.”

그렇게 처음 도착한 곳은 인형 뽑기 기계가 주르륵 늘여진 한 가게 안이었다.

“이, 일단 여기서 시간이라도 떼우고 있자.”

긴장한 그녀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온갖 귀염 뽀짝 한 인형들이 기계 안에 무더기로 쌓여져 있었다.

폭신폭신하고, 핑크핑크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감탄했다.

“오···.”

벌써부터 나가고 싶군.

이런 아기자기한 공간이라니. 나랑은 뒤져도 맞지 않는 공간이었다.

실용적이지도 않은 인형을 어디다 쓰는가. 귀엽게 생기긴 했다만, 저런 걸 집에 놔두었다간 씹게이 소리만 들어댈게 뻔했다.

아, 생각해 보니 여긴 씹게이가 대부분인 세상이다.

씨발.

“누나, 저거 귀엽다! 뽑아줄 수 있어?”

“오 그래! 누나만 믿어!”

마침 근처에서 씹게이 하나가 인형을 바라보며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그 꼴이 아주 귀여워서 딱밤을 존나 쌔게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조관념만 역전된게 아니었나.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러고보니.’

인형 뽑기 가게도 인싸들의 데이트 장소 중 하나였지.

주로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이성을 위해 ‘여자’들이 자신의 뽑기 실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활약을 하는 인간은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귀염뽀짝한 걸 좋아하는 건 아닐텐데. 너무나도 편협한 시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성아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뭐 가지고 싶은 인형 있어? 내가 뽑아줄게.”

“······.”

약간 실망감이 들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못 어울려 줄 건 아니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통 이런 곳에는 개꼴리는 피규어도 몇개 들어있기 마련인데. 세상이 바뀌어서 그런지 피규어도 전부 역 TS당해버린 듯했다.

하는 수없이 나는 폭신한 사자 인형을 골랐다.

지잉.

천 원짜리 지폐가 기계안으로 삽입되고, 음탕한 집게가 사자 인형을 범하기 위해 움직인다.

성아린은 저 안에 영혼이라도 저당잡힌 듯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어찌어찌 사자 인형을 집게가 붙잡고 그대로 끌어올려진다. 위태위태하게 다리를 붙잡힌 사자 인형은 순조롭게 위로 올라왔다.

그걸 본 아린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툭.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게 사장님에 의해 조작당한 집게는 위로 끌어올려지자마자 사자 인형을 놓아버렸다.

씹쫄보 인형 집게는 결국 사자 인형을 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

옆에서 아린이의 탄식이 들려왔다. 꽤나 아쉬운 기색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한 마디 해줬다.

“오, 아린이 존나 못해.”

“······아직 기회 몇 번 있으니까.”

그녀는 다시 천 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뭔가 불이 붙은 듯했다. 역시 사람은 도발을 해야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다.

다시 집중력을 발휘한 그녀의 눈에서 레이져가 나오는 것 같았다. 기세를 보면 조만간 뽑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성아린의 인형뽑기를 관람했다.

결국 뽑긴 하더라.

“잘했어~ 잘 뽑았어~”

나는 대충 말끝을 늘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가벼운 오락을 끝낸 후, 우리는 다시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재 내 오른손에는 작고 귀여운 사자 인형이 들려져 있는 상태였다. 부드러운 갈퀴가 내 피부를 간지럽힌다.

손에 잡히는 감각이 푹신푹신했다.

분명 뽑긴 뽑았는데, 그녀는 은근 침울한 기색이었다. 물론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은근히 놀리는 말투로 말했다.

“근데 1만원은 좀 많긴 했어~”

이 작달만한 인형을 뽑는데 무려 만 원씩이나 썼기 때문이다.

물론 뽑을때야 좋았다.

10번 가까이 실패만 하다가 처음으로 한 번 성공을 한 거니까. 어찌 안 기쁠까.

그때만큼은 나도 소리를 내면서 기쁨을 표했다. 성아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막상 뽑고 시내로 나오니 현타가 오는 것이다. 퀄리티도 그다지 좋지 않은, 한 손에 겨우 들어올만한 인형이 만 원이라. 과연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뜨끈하게 국밥 한 그릇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래도 뽑긴 뽑았으니. 패배한 호구보단 승리한 호구가 낫지 않은가. 그녀는 승리한 호구였다.

“그런데 시간이 좀 남았네요··· 어떡하죠?”

“반말.”

“아, 어떡하지?”

그렇게 그녀를 놀리며 걷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역시 인형 뽑기는 효율이 안 좋았다.

돈을 먹어대는 것에 비해 시간은 별로 안 지났지 않았는가. 결과적으로 영화 시간까지 꽤나 남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비어버린 공백의 시간에 그녀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설마 인형 뽑기만으로 영화 대기 시간을 날먹하려고 한 건가. 어딘가 어설픈 데이트 코스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음,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그냥 돌아다닐까?”

“그래도 돼?”

“난 상관없어.”

어차피 영화 시간까지 많이 남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동안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길을 걷다가 재밌는 게 보이면 노는 거지 뭐.

우리는 그렇게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성아린이 왼쪽에 서고, 내가 오른쪽에 서서 나란히 걷는다.

그다지 대화가 많이 오가는 편은 아니었다.

“오늘 날씨가 좋다. 그, 그치?”

애초에 서로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으니. 가끔씩 침묵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아린은 그 침묵이 꽤나 어색한 건지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곤 했다.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건가, 안절부절못하는 상대방이 보인다. 이런 걸 보면 뭔가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말의 시내는 역시 커플이 많았다.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서 걷는 게 꽤나 자주 보였다.

옛날에는 저런 걸 보면 저주부터 날렸을 텐데. 지금은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아아, 나도 C를 겪어서 그런가.

그렇게 지켜보길 잠시, 나는 커플 대부분이 손을 잡고 걷고 있단 걸 깨달았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어색해 하는데 여기서 손을 잡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서 나는 냅다 성아린의 손을 잡았다.

“!”

그와 동시에 움찔하는 그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했다.

“떨어질지 모르니까 손잡고 있자.”

“······.”

성아린은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 좀 더 다채로운 반응을 원했는데.

그래도 얼굴은 빨갛게 만들었으니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손가락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부드러운 감촉이 제 손을 감싸고 있었다.

꽤나 편안한 오후였다.

“아.”

그렇게 걷기를 잠시. 문득 궁금한 게 생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볼 영화가 뭐야?”

“아, 말할 수 없는 비원이라고··· 멜로영화야.”

“아하···.”

응?

“장르가 뭐라고?”

“멜로영화.”

뭐가 좋은 건지, 해맑게 웃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감탄했다.

“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아린, 얘는 데이트 코스 짜는 능력이 없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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