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9, 옷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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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아린에게 있어 약속이란 그다지 떨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럴만한 게, 그녀가 한 약속이란 대부분 친구들과 가볍게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주로 애들이 부르면 성아린은, 대충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약속 시간이 다 돼갔을 즈음에 대충 옷을 차려 입고 나오는 게 다였다.
약속이란 것도 대부분 별 것 없는 내용이었다. 보통 친구 한 명이 [피방 ㄱ?]라고 카톡방에서 날리면 누군가가 [ㄱ]라고 간단히 대답하는 게 약속의 전부다.
그럴 만큼 떨릴 일이 없는 것이다.
이미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면서 편해질 대로 편해진 사이다.
서로 목욕탕도 가서 알몸도 보고, 음담패설도 편히 할 수 있는 사이였단 말이다.
말하자면 부랄(클리)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만큼 약속에 몇 분 늦는 것 정도야 상관이 좆도 없었으며, 괜히 옷가지를 차려입을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색했다.
‘으으···.’
토요일 오후 12시 30분.
그녀는 지금 시내의 한 거리에서 이세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30분이나 남았는데도, 그녀는 굳이 나와서 어색함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쿵쿵, 가슴이 요동치고 있는 게 귓가에 들려온다. 그녀는 지금 난생처음으로 ‘약속’이라는 게 이리 떨리는 일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원래 자신이 해왔던 약속들이랑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데. 서로 알몸을 공유한 사이도 맞았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음담패설도 서로 몇 번 했던 사이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긴장은 평소보다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만나는 상대가 문제였다. 이번에 만나는 건 익숙한 여자가 아닌,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과 연이 없었던 일과 마주하다 보면 저절로 긴장이 되기 마련이다.
첫 출근일 때의 알바가 그랬고.
새내기 때의 대학이 그랬다. 본래 처음인 일은 대부분 떨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세원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미지의 세계나 다름 없었다. 물론 만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이긴 하다만···그때는 제가 거의 끌려다니기만 했으니까.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이세원이 주도한 자리가 아닌, 자신이 자진해서 직접 주도한 자리. 간단한 대화를 위해서 모인 게 아닌, 서로 웃고 떠들고 놀기 위해 만들어낸 약속이었다. 말하자면 데이트였다.
그런 만큼 설렘과 걱정이 연속돼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시 이틀 전의 일을 생각했다.
‘꺄아아악!! 미친년아아!!!!’
이세원에게 막 구질구질한 문자를 보냈었을 당시. 방금 막 보낸 따끈따끈한 문자에서 ‘1’이 막 사라지고, 2분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을 때.
그녀는 그 공백기 동안 온갖 감정을 느껴댈 수 있었다.
처음엔 제 눈 앞의 여동생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이 씨발년을 어떻게 죽일까 하는 분노를 느꼈고.
30초 정도가 지났을 땐 과연 어떤 답장이 올까 하는 걱정과 기대를 반반씩 느꼈으며.
이후 남은 시간동안은 ‘좆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슬픔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읽씹을 당한 걸까, 이대로 끝인건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막판엔 머릿속의 대부분을 채웠다.
그렇기에, 2분 후에 날아온 답장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래요 그럼]이라는 쿨한 답장 하나에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다. 본래 감정이란 낙차가 클수록 차이도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방금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지옥을 달리던 그녀에게, 새로 피어난 기쁨은 그만큼 커다랗게 다가왔었다.
아아, 사람은 단 2분이라는 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전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그 기쁨을 원동력으로 데이트 코스까지 짜놓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이세원과 만나 서로 웃고 떠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게 과연 계획대로 잘 풀릴지는 모를 일이지만.
‘잘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어색한 공기만 흐르지는 않을지, 지금 제 모습을 괜찮게 보이는지.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잠시 핸드폰을 들어 제 생김새를 재확인했다.
새하얀 순백색의 블라우스와, 그와 대비되는듯한 검은색의 스커트. 그리고 지갑과 핸드폰을 넣어두는 작은 크로스백까지.
전체적으로 무난무난하고 깔끔한 조합의 자신이 보인다.
여동생이 추천해 준 옷이었다.
여동생이 말하길, 본래 이런 만남은 튀는 것보단 깔끔한 게 낫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주말에 나온 시내에는 죄다 인싸들밖에 없었다. 모두가 멋들어진 복장을 입고, 밝은 웃음을 지은 채 연인들과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감 넘쳐 보이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자기는 계속 움츠려들뿐이었다.
뭔가 격이란 게 느껴진다. 그래, 이건 아싸와 인싸간의 넘을 수 없는 선천적인 벽이었다.
매일 시내를 거니는 저들과 달리, 동네 피방만 가끔씩 갈 뿐인 자신에게 이곳은 너무 어색한 곳이었다.
맞지 않는 장소에 온 건가··· 생각이 들 무렵.
띠링!
작은 알람음과 함께 문자가 왔다.
[이세원: 어디야? 나 도착했는데]
이제 준비를 마치고 도착한 모양. 성아린은 다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얼른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성아린: 저 ㅇㅇ족발집 가게 앞에 있어요, 아마 앞에 오시면 보일 거예요]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온다. 편하게 반말하라고 계속 듣긴 하는데··· 역시 빠르게 입에 익지는 않았다. 아무리 동갑이라고는 해도, 아직 어색한 사이에서 편히 말을 놓는 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잠시 저를 자책하며 기다리기를 잠시, 수많은 인파에 사이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수많은 인싸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빛이 바래지 않는 외모. 웃고 떠드는 사람들과 반대로, 무표정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보인다.
활발한 시내와 대비되는 듯한 차분한 분위기가 그의 근처에서 흘러나왔다. 위에 입은 검은색 박스티는, 그 분위기에 냉기를 더하는 듯했다.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에 그 주변의 공간만 별도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려운 분위기에 굳어있기를 잠시, 곧이어 이세원이 그녀를 발견한다.
검은색의 눈에 성아린의 신체가 담겼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 생기는 미소. 날카로운 눈매가 얇게 호선을 그리고, 무표정했던 얼굴에 웃음기가 들어간다.
곧이어 그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오랜만이네 아린아.”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의 주변에 있던 차가운 분위기가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잠시 홀리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괜히 부끄러워져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를 향했던 시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볼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애써 말을 꺼냈지만, 그것도 기어들어가는 듯이 작았다.
“오랜만이야···.”
머리가 새하얗다.
분명 만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해둘 말을 생각해두었었는데, 막상 지금은 전부 지워진 것만 같았다.
어색함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 병신아 뭐해···.’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자책했다. 지가 불러놓고는, 자기가 먼저 어색해하면 어떡하나.
눈조차 제대로 못 마주치는데 뭘 어떻게 놀겠다는 건가. 성아린은 용기를 내서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렸다.
그러자, 그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색상을 입고 있었다. 빛을 빨아들이듯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는 박스티와, 때묻지 않은 순백의 화이트진.
단색의 간단한 조합이었으나, 그런 만큼 외모가 확실히 사는 것 같았다.
특히, 어두운색의 티는 이세원 특유의 분위기를 잘 꾸며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제 복장을 보고 있는 건지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곧이어 그가 말한다.
“옷 예쁘네, 잘 어울려.”
그 말에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고, 고마워··· 너도 잘 어울려.”
간단한 칭찬이 오간다. 상대방은 긴장도 안 되는 건지 자신을 본 순간부터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웃는 얼굴이 확실히 잘 어울리기는 하나, 자신만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뭔가 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일단은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계속 있어봐야 자신만 어색할 뿐이었다.
그녀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아직 영화시간은 남았으니까. 그, 그동안 시내라도 돌아다니는 건 어때?”
“난 상관없어.”
다행이었다. 그녀는 굳어있던 다리에 힘을 주어, 한 걸음씩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돌아다닌다. 그러면 뭐라도 나오겠지. 요 근처에 인형 뽑기 가게가 있던데, 거기서 뽑기라도 하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떼던 와중,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옷차림이 비슷하네.”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박스티.
검은색 스커트와 깔끔한 화이트진.
마치 색의 대비를 노린 듯.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많은 옷의 조합.
그걸 보고 있던 이세원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보니 우리 커플티 같네. 안 그래?”
그걸 들은 순간, 성아린은 옷 추천을 해준 동생에게 치킨이라도 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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