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38화 (38/125)

〈 38화 〉 38, 문자 보내기

* * *

사람은 각자의 고뇌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동물이었고,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고뇌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이 고뇌란 무척이나 다양한 곳에 생기는 일이었다.누군가는 인류평화라는 엄중한 일에 온 정신을 기울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열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

주제는 다르지만 그중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고뇌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도, 제 기준에선 무척이나 깊은 고뇌를 하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인류평화에 기여하지는 않지만, 고뇌의 깊이만큼은 데카르트에게조차 뺨을 갈 길 수준.

그 고뇌는 바로 이세원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림 잘 보고 있어요.. 잠시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성아린은 지금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톡톡. 그녀의 가냘픈 손이 아주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움직인다.

키패드 하나가 터치될 때마다 천천히 문장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되시면..’

“···으, 아냐아냐! 존댓말 하지 말랬잖아.”

그러나 그러길 잠시 그녀는 다시 문장들을 지웠다. 이로써 13번째 반복되는 문장 초기화였다.

여태껏 머리 굴려가며 만들었던 몇 줄짜리 문장들이 다시 공백으로 대체된다. 몇십 분 동안 써내린 문장들을 전부 다 지워버리는 데에는 1분이면 충분했다.

저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그냥 문자 한 번만 보내면 되는데 뭐가 그리 어려운 건지.

글을 쓰고 지울 때마다 옅은 창피함이 몰아쳤지만, 그녀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그녀는 지금 약속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으니까.

‘여자’인 그녀로써 ‘남자’에게 애프터 신청을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리 물을 수 있다.

아니, 어차피 섹스도 하고 볼장 다 본 사이인데 그냥 만나자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서로 가끔씩 연락하는 걸 보면 상대도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편히 밥 한 끼 하자고 할 수도 있지 왜 그러냐.

그건 그녀를 몰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녀는 뭔가를 주도하는 성격의 인간이 아니었다.

친구와 만날 때도 주로 친구가 불렀을 때야 겨우 나가는 편이었으며, 이렇게 이성에게 무언가 문자를 보내본 적도 중학교 때 말고 없었다.

심지어 중학교 때 보냈던 문자들도 대부분 팀 숙제에 관련한 얘기가 대부분···.

그녀는 가슴이 컸지만, 그 소심한 성격 탓에 ‘남자’랑 인연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성적 판타지가 그쪽으로 발전한 것도 그런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소심한 성격의 그녀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데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리드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강한 것이다. 비록 그게 강제적일지라도.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성아린은 아직도 이세원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상대적으로 쌔보이는 그에게 성아린은 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날카로운 눈매는 이제 어느 정도 적응된 편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은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혹시나 물어봤다가 거절당하면 어떡할까, 그 뒤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어찌 머리를 싸매가며 문장을 써 내려가길 잠시, 그녀는 다시 문자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존댓말은 없었고, 문장도 그리 무겁지 않으며, 제가 원하는 뜻도 제대로 눌러 담았다.

그 때문에 그런지 약간 비굴하고 꽤나 글이 길어지게 되었으나··· 그래도 지금까지 쓴 것 중엔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자였다.

노력의 성과가 나오는 듯했다.

“흐음.”

그러나, 역시 그 정도로 만족할 그녀가 아니었다.

비굴함을 빼야 했고, 문장 또한 줄여야 했다. 이렇게 보내버리면 분명 질척거리는 여자라고 인식될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싸맸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잠시 고민하고 있자 문밖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맑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성아린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제 여동생이 의문섞인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아린은 그녀를 보고는 조용히 표정을 굳혔다. 그다지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유진.

자신과 2살 터울의 동생이었으며, 으레 자매들 사이가 그렇듯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았다. 소심한 자신과 달리 동생은 꽤나 활발하고 사교적인 편이었으니까.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녀는 제 동생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이 두 살이나 더 먹었는데, 동생이 자신보다 앞서가는 느낌이 들다 보니까.

성아린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별일 아니니까 절로 가.”

“별일 아니기는, 그런 사람이 머릴 그렇게 싸매고 있어?”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동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아린의 침대를 비집고 그녀의 옆으로 들어갔다.

가냘픈 성아린의 팔 사이로 성유진의 머리가 들어온다. 향긋한 샴푸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방심한 제 언니의 핸드폰을 확인한 성유진이 피식 웃었다.

“푸훕, 뭐야. 언니 남자 생겼어?”

“보, 보지마!”

성아린은 얼른 핸드폰을 위로 올렸다. 뭔가를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게지는 기분이었다.

시선이 멀어짐에 따라 채팅창의 화면이 자연스레 축소된다. 덕분에 써놓은 문자들도 더 이상 안 보이게 되었지만, 성유진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름이 이세원? 진짜 남자네. 오올~ 언니 좀 하는데? 먼저 약속도 잡고. 언니가 번호 딴 거야?”

아니, 내가 따였어. 처녀랑 같이.

속에서 저절로 대답이 나왔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는 일. 성아린은 다시 한번 짜증을 내며 유진에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보내지 않으면, 즐길 거리를 찾은 그녀가 계속해서 달라붙을 것이 틀림없었다.

“알려줄 생각 없으니까 가라고.”

성유진을 발끝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를 지탱하던 팔베개를 치워버리고, 매끈한 발로 동생의 등을 밀었다.

물리력의 행사에 동생은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치,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니야.”

입이 툭 튀어나온 성유진이 말한다. 성아린은 그걸 듣고 작게 안도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혈연을 너무 매몰차게 거절한 거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소라면 받아주겠지만 이번엔 무려 ‘남자’와 관련된 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함부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야짤 작가와 신청자와의 관계인데··· 어떻게 말해.

성유진이 떠나가는 걸 본 후 성아린은 다시 핸드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다시 집필의 시간이다. 무수히 많은 퇴고를 반복하여 비교적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비굴함을 좀 빼고, 문장도 좀 줄이면서.

음, 다시 보니 지금 만든 문자들도 확실히 쓰레기 같았다. 이렇게 보내게 되면 마이너스 감정밖에 안 쌓일 것 같은데.

당장 지워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얍.”

마치 어둠에 숨은 암살자가 단도를 던지듯. 의식의 틈새로 살금살금 들어온 성유진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띠링.

그와 동시에 전송되는 그녀의 문자.

고도로 발전된 오늘날의 인류 문명은, 아무런 막힘도 없이 문자를 광속으로 전달해 주었다.

보낸 지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 숫자 ‘1’이 사라진다.

“꺄아악! 미친년아아!!”

성아린은 얼굴이 빨개진 채 소리 질렀다.

*

[성아린: 안녕! 이렇게 먼저 연락하는 건 처음인 것 같네 헤헤. 그림 잘 보고 있어 ㅎㅎ

다름이 아니라, 여쭤볼 게 있어서.. 혹시 이번 주 토요일 날 시간 돼? 마침 영화 티켓이 두 개 생겼는데 같이 볼 사람이 필요해서.

절대 강요는 아니야! 혹시 바쁘면 거절해도 돼! 그냥 같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얘기한 것뿐이야. 기껏 영화 티켓이 생겼는데 사용하지 못하면 아깝잖아. 그러니까 혹시 시간 되면 나한테 얘기해 줘. 이번에는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아!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저번에 네가 이쪽으로 왔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그쪽 지역으로 가는 게 맞는­]

문자는 그 이후로도 몇 줄이 더 있었다.

난 놀랐다.

“워우.”

뭐지.

뭐지 시발.

뭔데 이렇게 질척질척한 게 묻어 나오지.

씹물같이 끈적한 감정들이 텍스트를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핸드폰 하다가 잘못 눌러서 문자를 클릭한 것뿐인데, 이렇게 부담스러운 걸 보게 될 줄이야.

잠시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대충 문자를 보니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날 수 있냐는 이야기 같은데.

이렇게나 장황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그냥 간단하게 용건만 전하는 게 가독성도 좋고 부담도 안 될 텐데.

[루카스쟝: 님, 그림 다 그렸다면서요 언제 주세요?]

그렇게 잠시 문자를 읽고 있자, 다른 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생각해 보니 본인, 지금 하나의 커미션을 마친 후 상대방에게 그림을 보내고 있던 도중이었다.

준다고 하던 그림이 오질 않으니 재촉한 모양.

무려 7만 원의 돈을 주고 커미션을 신청해 준 나의 소중한 고객이다. 나는 얼른 그림을 보냈다.

[hala: 아, 죄송합니다. 잠시 일이 생겨가지고]

[hala: (사진)]

[hala: 여기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뭐 별거 없었다. 이번에 내가 그렸던 금태양이라는 캐릭터를 좀 더 자세히 그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상황은 작품 속의 첫 번째 히로인 유재희 와의 거친 야스장면.

‘하응­! 하앗­!’신음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거칠게 제압한 금태양이 피스톤질을 반복하는 정도의 이야기다.

그 정도야 뭐,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 금방 그려주었다.

[루카스쟝: ㅜㅑ 고마워요]

[루카스쟝: 캐릭터 ㄹㅇ 개꼴리네 ㅋㅋ]

쿨하게 답장을 하고 사라지는 상대방. 다행히 내 타블렛 위에서 탄생한 금태양은 순조롭게 순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올라온 건 이제 고작 2화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커미션까지 들어오는 걸 보면 확실히 캐릭터 자체에 매력은 있는 모양.

좋은 일이었다. 2주 가까이 집에만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려 댄 보람이 있었다.

뭐 어쨌든 용무는 끝났으니, 나는 다시 성아린이 보낸 문자로 돌아갔다.

글이 많이 길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의도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무려 먼저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기특하네.”

안 그래도 슬슬 만날까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말이다.

집에만 있어서 성욕은 쌓이는데, 그 성욕을 풀어낼 데가 없었으니까. 심지어 저번엔 그저 간단히 대화만 하고 바로 야스를 했으니 따로 놀 시간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요청은 나름 달가운 편이었다.

‘토요일이라.’

토요일이면 지금부터 이틀 뒤였다. 일단 주말이니 가장 놀기 좋은 요일이긴 했다.

솔직히 바쁘긴 한데, 뭐 하루 정도 노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향해 답장을 보냈다.

[이세원: 그래요 그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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