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5, 캐릭터
* * *
그 뒤로는 정말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아침밥은 먹었냐. 어제 늦게 자지는 않았냐.오늘 수업은 몇 개 있냐 등등. 뭐 간단한 것들 말이다.
본래에 찾아온 목적이 사라짐에 따라 딱히 나눌만한 대화가 없었고, 어차피 조금있으면 강의가 시작되기에 사소한 잡담만을 나눴을 뿐이었다.
“그럼 나중에 봬요.”
“그래.”
이은별은 그런 말을 끝으로 강의실을 나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렇게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이더니, 막상 일이 풀린 뒤로는 빠르게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안도한 얼굴로 강의실을 나가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대충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걱정될 일인가.’
야스각 도중에 도망칠 수도 있지.
그때는 눈앞의 떡을 놓쳤다는 생각에 잠시 빡이 쳤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은별이 ‘글러먹은나’라는 걸 몰랐다고 해도, 대충 사과한다면 너그럽게 받아줬으리라.
근데 그녀는 뭐가 그리 불안했던 건지.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생물이라더니, 이쪽 세계 여자도 그건 어느 정도 통하는 말인 듯했다.
순간 내 눈매 때문에 쫄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설마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지웠다.
암, 그럴 리가 없지.
아마도.
뭐, 어쨌든 이로써 그녀와의 관계 정립은 끝났다. 나는 그날의 일을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솔직히 별일도 아니긴 했지만, 굳이 들춰내서 어색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남녀 사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막상 둘이 알아서 잘 풀었다고 해도, 때가 되면 저절로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는 하는 게 말이다.
특히 ‘야스각’까지 쟀는데 어떻게 평소처럼 지낼까.
그럴바엔 그냥 조용히 묻어두는 게 나았다.
아예 없었던 일로 치는 것이다.
서로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면 결국 비밀이 되는 법이다.
현실에 있었던 사실이 이제 기억 속에만 살아 숨 쉬는 허구가 된 것이다.
나는 그걸 원했다. 지금은 이 정도 관계가 편했으니까.
‘글러먹은나에 대한 것도.’
일단은 묻어두기로 했다.
솔직히 잘만 사용하면 이걸 빌미로 따먹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뭐 내가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무작정 고추를 놀려댈 생각은 없었다.
안 따먹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돈이 급했다.
현재 내 통장에 있는 돈은 고작 10만 원 남짓한 돈밖에 없었다.
고작 그걸로는 이 험난한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심지어 거지 상황에서 좆도 내 좆대로 놀린다?
돈과 시간 둘 다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게 뻔했다. 그러면 나는 빠른 시일 내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겠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에 너무 놀긴 했어.’
그림이 직업인 놈이 그림은 안 그리고 술만 존나게 마셔댔으니.
이제는 슬슬 환쟁이의 본분을 찾을 때였다.
지금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을 늘려야 했다.
고작 커미션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5만 원 7만 원씩 들어오는 걸로는 씨발,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막상 통장에 돈이 들어와도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몇만 원이 숨풍 빠져있었으니까.
더 많은 양의 돈이 필요했다.
장독대 밑에 뚫린 구멍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돈이.
그러려면은 결국 새 돈벌이 수단이 필요한데···.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 어느새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여태껏 떠들던 학생들이 자리에 앉고, 가방에 있는 필기도구를 꺼낸다.
나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필기구를 준비했다. 지금은 일단 수업에 집중할 때였다.
어차피 중간에 지루해져서 잡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그럼 수업을 시작하죠.”
생각은 그때마저 하면 되었다.
“···결국 핀박스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를 대차게 굴려대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결국 핀박스밖에 없더라.
정기적으로 돈을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말이다. 사실, 진작부터 만들어두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일단 후원계좌를 열어두기만 하면 원하는 사람은 결제를 해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열지 않은 이유는, 역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쪽 세계의 ‘여자’를 꼴리게 해주면서도, 내가 역하지 않게 그릴 수 있을까.
이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자동으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친다는 속담이 있던데.
혹시 이 속담에 내가 포함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퐁퐁 샘솟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두 마리를 다 잡지 못하면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뒤지거나, 아니면 사회의 잔혹한 현실에 피가 말려 죽거나.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면 제대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나는 집에 오자마자 대충 옷을 갈아입고 의자 앞에 앉았다.
아까까지 밖에서 혹사당하던 몸이 매트리스에 누울 것을 권유했지만 애써 무시한다.
이런 작업은 머리가 활성화된 상태일 때 하는 게 제격이었다. 안 그러면 자꾸 차일피일 미루게 될 테니까.
타블렛 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나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일단 작품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취향은··· 그쪽으로 가는 게 맞겠지.’
한때 ‘레이프합법화’가 신청했던 것처럼, 또는 ‘글러먹은나’가 원했던 그림들처럼.
주로 ‘남자’가 상황을 주도하고 ‘여자’가 당하는 그런 장르.
소위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펨돔물을 그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역전세계로 왔으니 멜돔물인가.
아무튼, 이 세계의 마조 여자들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게 내가 그리기 쉬우니까.
이전 세계와 비교해도 내가 꽤나 자주 그렸던 장르였고, 무엇보다 내가 역하지 않게 그릴 수 있는 종류였다.
그리고 의외로 조회수도 잘 나왔다.
맨 처음에 올렸던 여자그림은 당연 말할 것도 없고.
호불호는 갈릴지라도 나름 인기 있는 장르인 고어보다도 두 배는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잔인한 게 뭐 어때서···.’
잠시 피의 유체역학을 선보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왔지만, 어쨌든 소비자들의 니즈를 파악한 건 좋은 일이었다.
돈을 벌려고 생각 없이 받아댔던 그간의 커미션들이 내게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팩시브의 나열된 그림들의 조회수가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멜돔물도 호불호가 좀 갈리는 취향이긴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듯, 생물학적으로 여성은 성에 대한 스펙트럼이 넓다고 했다.
이는 과학적인 실험까지 거쳐 인증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실력만 있다면 볼 사람은 본다는 것이다.
아무튼 작품의 특성은 ‘남자’가 주로 주도하는 것으로 나는 확정 지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인데···.”
톡톡.
나는 타블렛을 펜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한 번씩 펜심이 모니터에 닿을 때마다 새하얀 디지털 도화지에 검은 점이 찍힌다.
그 검은 점들이 마치 내 고민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곳은 ‘여자’가 주 고객층인 세상이다.
그런 만큼, 소비자를 끌어모으려면 남자를 주 포커싱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고추를 섬세히 묘사하고··· 평평한 가슴을 매끄럽게 그려주고··· 가끔씩 표정 묘사도 해주면서···.
“이런 씨발.”
그런 걸 생각하자 자동으로 욕이 차올랐다.
그래, 욕 나오는 일이었다. 결국은 나도 어느정도 세상과 타협을 해야하는 것이다.
여태껏 하던 투샷의 구도는 변하지 않지만, 남자의 비중을 어느 정도 늘려야 하는 것쯤은 인식하고 있었다.
‘원래는 대충 덩어리로 그려넣었지. 형태만 잡아놓고.’
저번 세계에 있던 대부분의 야짤의 특징이었다.
배우가 되는 여자 캐릭터는 아주 섬세히 그리면서, 그 주변을 차지하는 남자는 대충 그리는 것이다.
왜? 어차피 애들은 여캐를 보러 왔었으니까.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쥐뿔도 관심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 쪽을 표현을 안 한다거나, 아예 남자 몸의 형태만 잡아놓고 단색으로 채워 넣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코난 만화의 범인들처럼.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야짤안의 남자들은 검은색 쫄쫄이 대신 피부색을 띠고 있다는 것뿐일까. 고작 그 정도 차이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반전된 세계에서는 그렇게 했다간 욕을 뒤지게 얻어먹을 게 뻔했다.
돈 내고 남자의 나체를 보러 왔는데 웬 덩어리진 실루엣만 보이면 분명 짜증이 날게 분명했다.
그러니 결국 남자 캐릭터를 세심히 짤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시리즈물이니까 적당히 성격도 만들고, 외모도 제대로 정교히 작업해 주고.
이게 문제였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야 꼴리게 느껴지는가.
남자인 나로서는 남자를 꼴리게 그린다는 게 존나 역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상상하기도 싫고, 상상해 봤자 머리만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런 데에 전문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그 전문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hala: 님]
[레이프합법화: ?]
이번에는 성아린이 아니라 ‘레이프 합법화’의 지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어제 얘기했던 개인 채팅방을 놔두고, 일부러 오픈 채팅방을 이용했다.
다행히 핸드폰을 하고 있었던 건지 답장은 빨리 돌아왔다.
[hala: 꼴리는 남캐 만들게 추천 좀 해주삼]
[레이프합법화: 그걸 왜 나한테;]
왜긴.
[hala: 님이 전문가잖아요. 머릿속에 생각해 돈 캐릭터들 많을 거 같은데, 좀 매력적일 거 같은 남자 캐릭터 나열 좀 해보세요]
[레이프합법화: ...캐릭터 만들게요?]
[hala: ㅇㅇ]
[레이프합법화: 누가 그런 캐릭터를 머릿속에 생각해놔요; 저 그 정도까지 변태는 아님;;]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상대방도 아이디어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한탄이 아니었다. 저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란 사실에서 나온 한탄이었다.
내가 저 인간을 본 지가 얼만데. 저런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걸까.
여태껏 신청했던 커미션만 봐도 창의력이 범상치 않을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원래라면 [오 ㅋㅋ 이 분야는 내 전문이지]하며 망상을 늘여놓았을 그녀였는데. 점잖게 바뀐 그녀가 신기하면서도 슬플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몇 번 신호음이 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는 그녀.
“이봐 아린아.”
나는 받자마자 말했다. 이제는 그림작가와 의뢰자의 관계가 아닌, 완전한 현실에서의 관계였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그녀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으, 응?”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운 게, 아무래도 알바중인듯 했다. 그래도 전화를 받는 걸 보니 아마 휴식 타임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우리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자. 네가 신청한 것들만 봐도 망상력이 뿜뿜한데, 생각해놓은 게 없다고? 채팅에서도 재밌는 말 많이 써놨었잖아. 근육질 남자한테 들박당해보고 싶다. 바바리맨 교사랑 마주해보고 싶다 뭐 이런──”
“그만! 알았어! 얘기해 줄게!”
속사포로 내뱉는 나의 말에 그녀가 소리쳤다.
진작 그럴 것이지.
빼액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휴대폰을 멀리했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내가 스피커 모드라도 킨 줄 알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린아 무슨 일 있어?!
아뇨아뇨! 전화하느라! 죄송합니다. 마저 일하세요..
잠시 휴대폰 너머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인 듯했다.
대체 무슨 알바를 하는 걸까, 잠시 궁금증이 일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캐릭터를 구상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아예 인적 드문 장소로 옮긴 건지 전화기 너머로 딱히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다만 성아린의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잠시 입이 열려 음성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약간 날라리 같은 남자한테 당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을 예전에 해본 적이 있어···.”
“오.”
날라리 같은 캐릭터.
그걸 듣자마자 뭔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날라리··· 고마워 아린아. 일단 끊을게.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
“나는 전문가가 아니”
뚝.
나는 그렇게 전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뒤에 아린이가 뭐라 한 것 같기는 한데, 휴대폰을 멀리해서 그런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이미 지나간 말보단,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잡아내는 게 중요했다.
‘날라리 캐릭터라···.’
손가락에서 돌리고 있던 타블렛 펜을 다시 고쳐 잡는다. 분명 이전 세계에서 저런 특성과 비슷한 남자 캐릭터가 있었던 거 같은데···그 순간 머릿속에서 한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금태양.
이른바 금발 태닝 양아치. 망가 속 위험한 남자 top3에 들어가며 주로 ntr 장르에 등장하는 그 새끼였다.
그래 ntr···.
“으윽!”
거기까지 생각하자 순간 머리가 아파왔다.
머릿속에 또 해로운 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야!”
ntr이라니. ntr은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야짤 작가에 고어 그림까지 쳐 그린다 해도 ntr은 선을 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
다시 한 번 생각하자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장르에도 잘 맞고, 캐릭터성도 확고한.
금발 태닝 양아치··· 이 특출난 개성을 가진 캐릭터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아니 괜찮을지도?”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꽤나 좋았다.
유일한 단점인 ntr만 빼놓고 어떻게 굴리면 꽤나 괜찮은 시리즈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저 의자를 고쳐 앉았다. 책상 위에 삐딱하게 올려놓았던 다리를 내리고, 굽혀져 있던 허리를 편다.
슬슬 나의 창작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근육질에··· ntr은 빼고······.”
집중력은 순식간에 발휘되었다. 굳었던 사고가 슬슬 움직이고, 타블렛 펜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렇게, 적막한 방 안에는 한동안 펜 움직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