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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34화 (34/125)

〈 34화 〉 34, 무서웡

* * *

화창한 날씨였다.이른 아침의 태양은 기분좋게 대지를 달구었고.

봄 특유의 나른한 따스함은 사람들의 은은한 피로를 녹여주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사람들은 이제 밖으로 나와 활기찬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8시 42분.

온갖 직장인들과 대학생이 바쁘게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곳에서.

이은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는 지금 어젯밤의 일 때문에 깊은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시 정신줄을 놓고 생판 모르는 익명의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일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이 병신아···.’

그걸 생각하자 얼굴이 자동으로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뭔가 이상한 말들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아무리 익명의 상대라고는 해도, 그딴 것들을 지껄인 걸 생각하니 그저 쪽팔림만 가득했다.

대체 상대방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별로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자동으로 예상이 되었다.

아마 존나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냥 단순한 의뢰자와 구매자와 관계일 뿐인데, 별로 관심도 없는 사생활을 나열해댔으니.

지나치게 좁혀들어가려는 거리감에 거부감을 느꼈을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취향 하나만으로 글러먹은 년이라 생각하고 있었을텐데··· 그 생각에 ‘이상한 년’이라는 단어를 추가해버린 것이다.

‘내가 대체 왜 그랬지.’

학교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이은별은 생각했다.

답은 쉽게 나왔다. 어제 마셔대던 술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 항상 술이 문제였다.

어제는 따로 친구를 만나고 온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가지 걱정들 때문에 술을 마셔버렸다.

그것도 혼자서 두병이나 말이다.

삶이 고단한 사람들이 괜히 술을 퍼마시는 게 아니었다. 술은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

하루의 피로를 녹여주고 미래의 걱정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은별도 그때만큼은 고단한 사회인의 마음이 되어 술을 퍼마셔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안 좋은 버릇 하나가 나오곤 했는데, 그것은 입이 꽤나 가벼워진다는 것이었다.

진득한 알코올이 뇌에 껴있는 필터 하나를 제거해 버리는 건지.

자기도 모르게 급발진해서 나오는 말들이 많았다.

특히, 이 버릇은 현실에서보단 인터넷 상에서 더욱 자주 나타나고는 했는데, 비씨에 자주 써재꼈던 욕망글들이 그 중 하나였다.

물론, 맨정신으로 욕망글을 싸재낄 때도 몇번 있긴 했다만··· 대부분의 욕망글들은 그녀가 술을 마신 다음에 써내린 글인 것이다.

어제는 그 버릇이 특히 심해졌는지, 비씨를 넘어 1대1 채팅창에까지 난동을 부렸던 것이고.

아마 그만큼 속에 쌓인 말들이 많았던 것이리라 추측되었다.

“후우···.”

그래도 그녀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자신이 벌여놓은 행태는 좀 창피하긴 했지만, 그 ‘hala’라는 상대방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름 잘 들어주었었다.

딱히 짜증내는 기색도, 귀찮은 기색도 없이 말대답을 해주던 상대방이 머릿속에 기억났다.

덕분에 오랜만에 마음 터놓고 얘기를 했었지. 마지막에는 고민에 대한 제 나름의 해답까지 얘기해주었다.

‘솔직히 안 될 거 같은 해답이긴 한데···.’

뭐 어때.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는 상태였다. 관계를 풀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지금 경제학과 교실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틀동안 온갖 걱정을 떠올리게 했던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왜 도망쳐 가지고.’

이런 일을 만드는지. 그녀는 제 자신이 미웠다.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강의실.

그녀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큰 소리가 나든말든 상관없이 열어재꼈겠지만, 지금은 딱히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 그런가.

강의실 안에는 벌써 사람들이 가득했다. 뒷자리에서 티격태격하며 노는 제 친구 유고은도 보였고, 앞에서 수다를 떠는 한호진도 보였다. 그 이외에도 자기 할일을 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자기 할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이쪽에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은별은 눈동자를 굴려 잠시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찾던 인간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보였다.

오른쪽 창가 맨 뒷자리에, 혼자 조용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이.

마치 자신은 이 시끄러운 자리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저 고고하게 앉아있는 남자가 말이다.

그 모습이 시끄러운 주변 풍경과 대비되어 마치 그 혼자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그맣게 유리된 공간은, 그 특유의 날카로운 외모와 맞물려 주변에 오직 차가운 냉기만을 내뿜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 괜스레 긴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왜 애들이 다가가기 힘들어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표정일 때의 이세원은 그만큼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신은 대체 어떻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건지. 어떻게 친해졌던 건지.

새삼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마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서 그럴 수 있던 거겠지.

하지만, 죄를 짓고 사과를 하러가는 지금은 묘한 압박감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하긴 해야지.

이은별을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그의 신형이 커져간다.

그렇게 그의 지척에 다가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

작은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눈.

“응?”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의문이 담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속을 알수 없는 검은 눈이 자신을 꿰뚫어본다. 감정이 서리지 않은 얼굴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밑에 쌓인 다크써클 때문인가, 자신을 째려보고 있다는 느낌까지 드는 수준이었다.

‘망할···.’

이은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냥 이대로 갈까. 이런 식으로 사과하는게 맞나, 괜히 사과했다가 욕이나 먹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여기까지 제가 걸어들어왔으며, 이렇게 부르기까지 했다.

이제는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이은별은 hala라는 인간이 가르쳐준 대로 사과하기 시작했다.

“저··· 월요일날에 있었던 일 사과하려고 왔어요. 그때 제가 술에 취해있어서··· 솔직히 기억은 잘 안나거든요··· 그런데 뭔가 확실히 실수는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말하면서 생각했다.

‘좆됐다···.’

말하면서 서서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게 무슨 사과야.

자기 잘못한 것도 모르면서 아무튼 미안합니다 라고 하는게 통할리가 있겠냐고.

그냥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할까. 그때 제가 너무 당황해서 도망쳐버렸습니다.

저는 야스각이 나와도 먹지를 못하는 개쫄보 고자새끼입니다. 그냥 저를 존나 때려패 주시옵소서.

차라리 이렇게 대답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건 최소한 성의라도 보일 것 아닌가. 적어도 제가 미안해하고 있단 것 만큼은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오고갔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세원과, 눈조차 제대로 못마주치는 이은별.

그녀에겐 이 찰나들이 영겁같이 느껴졌다. 다음 들려올 대답을 기다리는 게 마치 곤장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사고 안쪽에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응?”

이세원이 입을 열었다.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아, 괜찮아. 어차피 나도 기억 안 나거든.”

전혀 신경 안 쓴다는 듯, 손바닥을 내젓는 그.

“나도 그때 너무 많이 마셨나봐. 눈 떠보니 집 안이더라. 어차피 나도 기억 안 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예?”

기억이 안 난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답변이었다.

마지못해 사과를 받아주거나, 아니면 짜증섞인 눈으로 사과를 거절할 줄 알았는데.

허나, 예상만 못했을 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필름이 끊긴 것이다. 제 아무리 주량이 강하다고 해도 소주를 두병 반이나 마셨는데 기억이 온전할리가 없었다.

이은별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그렇군요.”

의외의 사실에 그녀의 걱정이 풀어졌다. 여태껏 했던 부정적인 생각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찜찜하긴 하지만 그날밤의 일은 그저 꿈으로만 묻어두는 편이 좋았으니까.

애써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여러 미안하단 말이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생긴 공백에 그녀는 무슨말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잠시 둘 사이에 적막이 깔렸을 때, 그가 말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가끔 놀러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는 그.

그의 입가에 걸린 은은하게 걸린 미소가 보였다. 일자형으로 되어 있던 입을 그저 끄트머리만 조금 올린 수준의 미소가.

그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에 그리 티는 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치있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문득 이은별은 생각했다.

역시 그는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린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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