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3, 속마음
* * *
[hala: 아니 왜요;]
상대방에게 답장을 보내자마자.
“씨발.”
갑자기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마음 한편에 있는 작은 불씨가 갑자기 발화한듯한···.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분노였다.
저번에 이은별이 도망치면서 남아있던 앙금이, 다시금 불을 지피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야스각이었는데, 그대로 쭉 갔다면 하하호호 즐거운 빠꾸리를 뜰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면 작은 짜증이 치밀었다. 마치 눈앞에 있던 떡을 바로 앞에서 놓친 기분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성아린이라는 새로운 떡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래도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다.
“설명 제대로 못하기만 해봐.”
새벽의 적막감이 감도는 방안 속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만약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었음’, ‘그냥 하고 싶지 않았음’ 같은 개소리를 지껄인다면 당장 이은별을 찾아가 분노의 스팽킹을 해줄 자신이 있었다.
하여, 나는 물었다. 우선 가장 아닐 것 같은 가정부터.
[hala: 생긴 게 별로였음?]
물론, 내 얼굴이 별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들었지.
내 스스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단 게 어이없긴 하지만, 이건 오만함에서 나온 자기평가가 아니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어제 성아린이 보여주었던 반응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여, 내 얼굴이 적어도 평타 이상은 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든 감상은 언제나 주관적인 법.
누군가에겐 천상의 음악도, 누군가에겐 한낱 불협화음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의 외모도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고 그녀에게 물은 것이건만.
[글러먹은나: 아뇨아뇨, 그건 절대 아님]
극구 부정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글러먹은나: 오히려 얼굴은 되게 잘생긴 편이에요. 솔직히 처음 보면 존나 까칠하게 생기긴 했는데, 친해져보면 성격도 나름 온순한 편이고. 오히려 내 취향에도 잘 맞아요.]
그 답장을 보고 나는 잠시 감탄했다.
“호옹.”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건가. 이것 참, 뭔가 옆구리 찔러 칭찬받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잠시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저 ‘존나 까칠해 보인다’라는 말이 잠깐 눈에 띄긴 하지만, 저거야 뭐 항상 듣던 이야기니까 그러려니 넘겼다.
‘내 얼굴이 그렇게 까칠해 보이나···.’
나로서는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외모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hala: 그럼 왜요?]
이로써 세 번째 묻는 ‘왜요’였다. 이 정도면 이미 성질 급한 사람들은 전부 답답해 뒤진 상황.
다행히 더 이상 끌 생각은 없는지 ‘글러먹은나’가 말문을 열었다.
마치 속에 숨겨둔 비밀을 꺼내듯, 아주 조심히.
[글러먹은나: 그...]
[hala: 그?]
[글러먹은나: 섹스하다가 내가 실수라도 할까봐..]
[hala: ?]
뭔 개소리야.
[hala: 뭔 개소리에요]
이런.
속에서만 한다는 말이 벌써 채팅으로까지 나왔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진짜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으니까.
마음속에서 뭔가 비밀을 꺼내긴 한 것 같은데 그 비밀이 개미똥꼬만 했다.
대체 섹스하면서 할 수 있는 실수가 뭐가 있을까.
구멍을 찾지 못해 당황하는 거? 애무를 제대로 하지 못해 교집합 부분이 뻑뻑한 거?
여러 가지 실수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의 기준.
그녀의 기준으로 할 수 있는 실수가 뭐가 있을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머리를 굴려서 몇 가지 실수를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였다.
[글러먹은나: 그...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뭔지 아시죠?]
[hala: ? 네, 알죠]
잠시 뭔 소리 하나 했다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냥 단순히 ‘성취향’이라 말하면 편할 텐데.
저렇게 돌려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취향을 밝히기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누가 ‘나 맞고 괴롭힘당하는 거 좋아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글러먹은나: 제가 성욕이 꽤 센 편에다가 취향도 확고한 편이라.. 평범하게 섹스하면 뭔가 만족을 못 할 거 같거든요...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대한테 부탁이라도 할까 봐..]
[hala: 괴롭혀달라는 부탁?]
[글러먹은나: ..네]
그니까···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부탁할까 봐 야스를 피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취향이 튀어나올까 봐?
평범한 섹스로는 만족을 못한다는게 무슨 개소리일까.
순간, 모 동인지 속의 히로인이 생각났다. 허공에 인절손(인생 절반 손해봤어요옷)을 외치며 가버리던 그녀.
분명 꽤나 하드했던 만화로 기억하는데···.
“으윽!”
순간 머리에 두통이 몰려왔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는 외쳤다.
머릿속에 해로운 게 들어오고 있었다.
후, 아무래도 동인지를 너무 본 것 같았다.
관련 단어만 쳐 봐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대가리가 반응하니까.
좀 줄일 필요가 있었다. 아, 생각해 보니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그 만화도 못 보네.
씨발.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상대방의 말은 이어졌다.
[글러먹은나: 아무튼 그런 이유로 도망쳤어요ㅠㅠ]
결국 제 취향이 밝혀질까 봐 도망쳤다는 말.
하나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었다. 그깟 취향, 그냥 밝히면 되는 거 아닌가?
[hala: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할 수는 없어요? 상대방도 이해해 줄 거 같은데.]
[글러먹은나: 안 돼요!]
[hala: 웨 또;]
[글러먹은나: 창피하잖아요. 만약 상대가 이해 못 해주면 어떡해요? 사이 어색해질 텐데. 그리고 혹시 소문이라도 내면요!]
“···진짜 성가시네.”
채팅창을 보던 나는, 이내 두 눈두덩이를 짚었다. 얘가 이은별이 맞나.
그 사교성 좋던 여자는 어디 가고 지금은 한낱 쫄보가 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래, 상대방이랑 취향이 안 맞을 가능성도 있지.
나야 수용 가능하다만, 아닌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거기서 끝날 일이었다. 굳이 그걸 소문낼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시 예전에 크게 데인 적이 있나? 갑자기 궁금해져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hala: 혹시 전에 뭐 이상한 놈한테 걸리기라도 했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다던가..]
[글러먹은나: 아뇨, 그런적 없어요. 다른 남자랑 잠자리까지 가본 적도 없고. 애초에 야스각도 이번이 처음임]
“오.”
이번엔 잠시 감탄했다.
처녀라니. 그래, 처녀 중요하지.
조금 의외의 사실이었다.
사교성 좋은 그녀라면, 특히 이쪽 세계에서 ‘여자’인 인간이라면. 어떤식으로든 남자를 따먹을 생각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내 마음속에서 이은별에 대한 호감도가 살짝 오르는 기분이었다.
허나 여전히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째서까지 저렇게 조심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상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글러먹은나: 그.. 우리집이 좀 가모장적이거든요. 여자는 항상 듬직해야 한다. 항상 당당해야 한다.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자라서..]
가모장적이라는 게 뭐지··· 가부장적의 이쪽 세계 버전인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잠시 인지부조화가 왔지만, 그래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있을법한 이야기였다.
하긴, 지금이야 양성평등이니 뭐니 해서 그런 게 많이 줄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성별에 따른 역할을 주입받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쪽 세계에선 ‘여자’가 기사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글러먹은나: 그렇다보니 뭔가 밝히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솔직히 m 성향 여자는 뭔가 듬직하지가 않잖아요. 어울리지도 않고..]
텍스트에서 질척질척한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글러먹은나: 솔직히 나도 이런 취향 가지고 싶지 않았다고..]
그렇게 들은 마지막 답장엔, 뭔가 감정이 들어가 있는 듯했다.
제 억울함을 토로하듯. 자신의 비관적인 부분을 인정하지 않듯.
음슴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텍스트 너머로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게 네 속마음이구나. 그녀가 제 안에 담아두었던 비밀이구나.
그쪽 성향의 여자는 뭔가 믿음직스럽지 않다. 당당하지 않고 듬직하지 못하다.
즉, ‘여자’답지 못하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공감은 안 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제 욕망을 꾹꾹 눌러 담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러먹은나: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니 마음이 편하네요]
욕망을 보이는 곳은 오직 인터넷 안에서일 뿐.
이곳에서는 상대방의 얼굴도, 목소리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무척이나 두터운 벽을 누구나 가지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도 편히 꺼낼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인터넷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그녀의 비밀을 확인할 수 있었다.
[hala: 그렇군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채팅을 모두 확인한 나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을 뿐, 이후로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로서도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구석에서 제 욕망을 싸재끼던 ‘글러먹은나’라는 인간이, 알고보니 이은별. 솔직히 아직까지도 잘 매칭이 안 되는 구도였다.
현실에서의 그녀와 인터넷상의 그녀는 그만큼 갭차이가 컸다.
이제 얘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연꽃처럼 둥둥 떠다녔다.
나를 생각 속에서 꺼낸 건 다시 울린 채팅창이었다.
[글러먹은나: 그래서 어떡할까요ㅠㅠㅠ 그런 상황에서 헤어졌는데]
어느새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그녀의 속마음을 듣는 입장에서, 이제는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는 입장으로.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주제는 엄연히 달랐다.
[글러먹은나: 어색해서 어떻게 만나요ㅠㅠ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는 해도 내가 도망쳤는데. 뭐라 생각하겠어요ㅠㅠ]
하긴, 그때 이후로 이은별을 만난 적이 없었지. 월요일 이후로 이틀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녀가 스스로 만남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내 관점에서 이은별의 입장을 생각해보았다.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른 시점··· 여자도 몸을 허락깢지 한 입장에서 내가 도망치면.
여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이가 없겠지 시발.’
답은 금방 나왔다.
혹시 성욕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매력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또한, ‘네 몸을 소중히 생각해서..’같은 되도않는 개소리는 통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현장에서 조용히 거절했겠지.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내가 잠깐 생각한 것도 이 정도인데, 현실에서 도망친 이은별이 여러 생각이 들을 만했다.
[글러먹은나: 저 어떡할까요? ㅠㅠ]
“······흐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상대에게 이렇게 답했다.
[hala: 그냥 사과해요]
여기서 ‘상대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하는 방법 없는 대답은 하책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제대로 된 해답을 내려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 편이 나도 관계를 풀어내기 좋으니까.
[글러먹은나: 사과를요? 근데 어떤 식으로 사과를 해요?]
[hala: 그때 술 많이 먹었다면서요. 그걸 명분으로 사과하면 되지. 자기가 그때 술에 꼴아서 기억이 잘 안난다. 근데 뭔가 확실하게 실수는 한 것 같다. 어쨌든 미안하다]
[글러먹은나: ..그게 통할까요?]
글쎄.
원래는 안 통하겠지.
자기 잘못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사과가 통할리가 있나.
그러나 나는 받아줄 생각이었다. 벌써 어떻게 받아줄지 대답도 생각해놓은 상태였다.
그것도 꽤나 괜찮은 대답을.
굳이 상대의 실수를 들추지 않고, 그날의 일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우리 모두가 아는 비밀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하, 진짜 착하니까 받아준다. 내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상대에게 답장을 보냈다.
[hala: 통해요. 통하니까 제 말 한 번만 믿고 사과해 봐요]
[글러먹은나: 흐음.....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까..어차피 방법도 없는 상태였고.]
다행히 내 말을 들어주는 듯했다.
[글러먹은나: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직접 만나서 얘기해볼게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 들어줘서 감사해요.]
[글러먹은나: 그럼 이만.]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제 자러 가는 모양이었다. 이미 12시를 넘은 시간이니 내일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일 사과하러 오는 건가.’
나는 마지막으로 보낸 답장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오늘 사이에 많은 걸 알아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걸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아파왔다.
“아 몰라, 나중에 생각해.”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냅다 매트리스 위로 누웠다.
지금 생각해 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이미 시계는 12시를 넘어 새벽 3시를 가르키고 있는 상태.
하염없이 얘기를 들어주니 시간이 금방 가 버렸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잘 필요가 있었다.
‘이은별에 대해서는···.’
내일 생각하면 되겠지.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따먹을 수 있는 카드를 한 가지 얻었다는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