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32화 (32/125)

〈 32화 〉 32, 글러먹은나

* * *

가끔 그럴 때가 있다.남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 자기만의 얘기를 털어놓고 싶을 때가.

심지어 그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종류라, 생판 남인 사람에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을 때가 말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의사소통을 원하는 욕구가 있었고, 그게 가끔은 분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글러먹은나: 니뮤ㅠㅠ 제 얘기 좀 들어주삼ㅠㅠ]

아무래도 지금 ‘글러먹은나’의 상태가 그런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저번 월요일 밤부터 조금씩 쌓여왔던 문자들.

다행히 제정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찾은 듯했지만 아직 속에 있는 이야기는 꺼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 때문에 월요일부터 저리 얘길 들어달라고 애원하지.

마침 궁금하기도 했겠다.

잠재적 고객의 관리 차원으로 나는 상대방 얘길 잠깐 들어주기로 했다.

[hala: 무슨 일이에요?]

카톡 방에 들어가 상대방에게 물어본다.

노란색 대답란이 뜨기 무섭게 사라져버리는 숫자 1.

답장을 보내자마자 확인했는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새 글이 올라왔다.

[글러먹은나: 저 진짜 등신짓 했어요ㅠㅠ]

그래 그니까 그게 뭐냐고.

[hala: 말해보세요 들어줄게요]

나는 상대방을 향해 말했다.

밤이 좀 늦긴 했지만, 어차피 늦게 자는 것 정도야 이제는 일상인 일이다.

그것보다 상대방의 얘기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사람이 저렇게 지랄발광을 해대는가.

내 들어준다는 대답에 제대로 말문이 트인 듯 ‘글러먹은나’가 말했다.

[글러먹은나: 아니, 제가 이번 월요일에 남사친이랑 술을 먹었었거든요? 단둘이서]

[hala: 호오..둘이서요?]

상대방에게 답장을 하면서도, 중얼거렸다.

“구라같은데.”

저 인간이, 남사친이랑 단둘이서 술을 먹는다는 게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상대방의 생김새를 모르지만··· 그 왜, 익명성 안에서의 행동이 있지 않나.

그게 사람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문득, 놈이 작성했던 글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아 젖꼭지 깨물리고 싶다···]

[누가 날 매도해 줬으면 좋겠다···]

.

.

하나같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시글들.

성욕이 만땅으로 충전된 인간이 글로써 욕망을 가감 없이 분출하면 저런 느낌일 것이다.

그런 걸 볼 때면 참 닉값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런 인간이 이성이랑 술을 마신다고? 그것도 단체가 아니라 단둘이서?

상대방이랑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억지로 이해하긴 했다.

매치가 안 될 뿐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저 인간은 제 스스로 자기가 사교성이 좋다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인터넷상의 이야기라 그다지 신빙성은 없지만··· 익명성 위의 이야기가 전부 거짓이란 법은 없었다.

믿지 못할 이야기라도 사실일 수는 있지.

당장 나만 해도 야짤 작가이면서 남자이지 않은가. 상대방도 내가 남자라고 말하면 못 믿을게 뻔했다.

결국엔 익명성 뒤에 상대란 어떤 의외성을 가지는 것이다.

와, 남자 야짤작가가 적은 세상이라니. 내가 희소 동물이라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신기했다.

내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상대방의 말은 이어졌다.

[글러먹은나: 네 둘이서. 아무튼 그렇게 술을 먹었거든요? 그것도 꽤 많이. 중간에 승부가 붙어서 한 사람당 소주 두병 반 정도는 마신 것 같은데─]

소주 두 병 반이면 꽤나 많은 양이었다.

평범한 사람 하나의 정신을 뒤집어엎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양.

당장 나조차도 이번 월요일에 그만한 양을 위장에 들이부은 적 있어서 잘 알았다.

덕분에 이은별이랑 야스까지 갈 뻔했지.

···그러고 보니 나랑 뭔가 상황이 비슷하네.

[글러먹은나: 그때 날씨가 꽤 더웠단 말이에요? 포차 안 에어컨도 빵빵하게 안 틀어져 있고 해서 상당히 후덥지근 했음.

그래서 위에 걸친 가디건을 벗었거든요. 더위 좀 식힐 겸. 그러니까 맞은편 남사친도 똑같이 가디건을 벗는 거야]

“?”

잠깐, 상황이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데.

[글러먹은나: 그때부터 공기가 달라졌어요]

우리도 그랬다. 가디건을 벗으니 가려졌던 몸이 보여서 괜히 상대방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뭐야?”

묘하게 흘러가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hala: 계속 말해봐요]

[글러먹은나: 네. 보통 남자애가 술 취한 상태로 반팔만 입고 있으면 꼴리잖아요. 그쵸?]

[hala: 그..렇죠]

솔직히 공감은 안 된다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야 얘기를 더 해줄테니까.

아마 내 입장에선 상대방이 가슴골을 내밀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며 대충 납득했다.

다행히 꼴림포인트는 글러먹은나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대충 튀어나온 근육이 꼴렸다든지, 움푹 들어간 쇄골이 꼴렸다든지. 커다란 손에 가슴이 움켜쥐어져 보고 싶다든지.

덕분에 아래가 젖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잠시 꼴림을 맛보고 있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욕망을 조금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술도 적당히 들어갔겠다. 상대방도 자기 몸을 살피고 있겠다. 그녀는 잠시 이성을 풀고, 급발진을 했다.

[글러먹은나: 그래서 제가 가슴 만져도 된다고 말했어요]

거기까지 들은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강렬한 기시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뭐지?”

뭐지 씨발.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트루먼쇼를 당하고 있는 건가? 저 글러먹은나라는 인간이 나를 상대로 서술 트릭을 시전하고 있는 걸까?

내가 겪었던 상황이랑 너무 똑같았다.

상대방이 말하는 이야기가, 내 머릿속 상황이랑 정확히 겹쳐져서 전개되어갔다.

그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생판 모르는 상대가, 묘하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기분.

문득,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이 사고를 스친다.

저 ‘글러먹은나’라는 인간이 내가 아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저 변태 마조가 이은별이라는 가정이 말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푸흐, 설마.”

말이 안 되도 적당히 안 되야지. 애니를 봐도 너무 많이 봤다.

이전 세계에서 동인지를 하도 봤더니 뇌까지 동인지화가 된 것 같았다.

이 얼마나 희박한 확률인가. 이 얼마나 극소치의 가능성인가.

같은 대학의 동기가, 알고 보니 나에게 야짤을 신청하고 있었다니.

사교성 넘쳐 보이는 여자가 알고 보니 1~2일에 한 번씩 욕망 글을 싸재끼는 변태라니.

지나가던 개새끼가 코웃음칠 일이었다.

‘망상 좀 그만해!’라고 옆에서 무언가가 외치는 듯했다.

···허나.

저 대화 속 인물이 이은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어도, 상황이 그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심증이 더 필요했던 나는 ‘글러먹은나’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글러먹은나: 다행히 내 말에 남사친도 금방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확실히 상대방도 분위기를 타긴 했는지]

썰의 무대는 이제 식당이 아닌 야외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남성은 그대로 포차를 나와 길거리를 걸었다.

가슴을 만지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다.

‘글러먹은나’ 왈, 제 몸을 훑는 남성의 눈은 꽤나 좋은 기분이라고 하더라.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마음속에 있는 기시감이 자꾸 들끓었다.

“그 남자 아무리 봐도 난데···.”

상황이나 하는 짓으로 보건대, 그냥 나 그 자체였다.

녀석이 말하는 ‘남사친’의 행동은 그때의 나를 쏙 빼닮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번 주 월요일 날, 이런 상황을 겪는 게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런 만큼 글러먹은나가 이은별이라는 가정은, 제 마음속에서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이어지던 이야기는 어느새 막바지 부분에 도달해있었다.

밤하늘이 예쁘게 펼쳐져 있던 월요일, 작은 골목길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때부터 나는 아예 상대방이 이은별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나의 감정이 아닌 그날의 이은별이 느낀 감정인 것이다.

[글러먹은나: 와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개 떨리더라고요. 좀 있으면 남자의 손이 내 가슴을 주무른다는 걸 아니까. 뭔가 대딸받는듯한 느낌도 들고.. 암튼 존나 설랬음.]

그런 감정을 느꼈단 말이지. 하긴 나도 그때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의 발을 들여놓는 듯한 설렘이 신체를 지배했었다.

[글러먹은나: 그 뒤로는 걔가 손을 올렸는데, 솔직히 적당히 쓰다듬다 말 줄 알았거든요?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는 해도 그 사람은 남자니까. 적당히 호기심만 풀다가 손을 뺄 줄 알았지. 나도 그 정도만 만족하려고 그랬고]

[글러먹은나: 와 ㅋㅋㅋㅋ 근데 아니더라고요. 그냥 과감하게 가슴을 움켜쥐는데,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게 상당히 흥분됐음. 그때 아래쪽도 엄청 젖었던 거 같은데, 다행히 들키진 않은 거 같았어요]

아냐 지금 들켰어.

내가 눈치챈 게 아니라 그냥 네가 네 입으로 다 말했어.

이제 나는 상대방이 이은별이라 확신했다. 이번주 월요일 밤. 그런 상황을 겪을만한 게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글러먹은나: 순간 이게 야스각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래, 야스각이었다.

서로 적당히 흥분했고, 마침 취했다는 명분도 있는 상태.

평범한 남녀라면 안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글러먹은나: 근데에에에ㅠㅠㅠㅠㅠ내가 도망쳐 버렸어요ㅠㅠㅠ]

그래 이 씨발. 대체 왜 도망쳤냐고.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됐다.

[hala: 아니 왜요;]

그래서 나는 물었다.

이번엔 이유를 듣고 싶었다.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