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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26화 (26/125)

〈 26화 〉 26, 만남 전

* * *

한밤중에 했던 결정은 꽤나 강렬한 의념이었던 걸까.한 번 했던 결심은 술이 깬 다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하고 굳건해졌을 뿐.

나는 차근차근 상대방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무작정 들이박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바로 만날 수는 없는 법. 무언가 얼굴을 맞댈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 명분은 이거였다.

[hala: 님, 님이 요청했던 커미션 이해가 잘 안 되는데]

[hala: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혹시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요청한게 이해가 잘 안 되니 만나서 설명해달는 소리. 본래 전달력이란 가까울수록 더욱 높아지는 편이었다.

평범한 글줄의 나열보단 직접 말로 풀어서 얘기하는 게 빨랐고, 그저 말로만 표현하기보단 손짓 발짓 써가며 얘기해주는 게 전달력이 좋았다.

그러기 위해선 만날 필요가 있다­ 이런 명분이다.

실제로 이번에 ‘레이프합법화’가 설명한 커미션은 조금 어려운 편이었다. 저녁감성에 머릿속에 마구 샘솟던 상상력을 잔뜩 투영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글줄이 길었다.

내용이··· 남자애가 여캐 옷을 강제로 벗겨 덮치려 하는 그런 상황이었나.

상황만 보면 그게 맞았으나, 주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변은 인적드문 골목길이었고, 여자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져 있다.

허벅지를 감쌌던 검은색 스타킹은 군데군데 올이나가 버렸으며, 큰 가슴을 가리던 브라의 끈은 끊어져 흘러내린지 오래인 상태.

여자의 옷매무새는 엉망이었으며, 그 전에 한창 실랑이를 벌였던 건지 피부 곳곳이 빨갰다.

그러던 와중 애써 몸을 지탱하던 다리의 균형은 엎어지고, 그대로 자리에 엎드려진채 남자의 거근에 한창 당하고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과연 ‘레이프합법화’라는 닉네임에 맞게 음습한 요청이었으며, 그 음습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한 요청이 그 어느때보다 길었던 덕분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소리를 해댈 수 있었던 거니까.

‘사실 지금도 그릴 수 있지한데.’

뭐 어때.

중요한 건 명분이다. 상대방이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하는 근거.

지금 이 순간 진실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내가 납득시킬만한 무언가를 쥐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레이프합법화: ?]

[레이프합법화: 만나는 건 좀 귀찮은데;]

[레이프합법화: 이해가 잘 안 되면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물론, 명분이 생겼다고 그녀가 곧바로 수락하는 건 아니었다.

새 인연을 트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필요했다.

하물며 우리는 다소 음습한 상황에서 익명으로 만난 상태. 굳이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얼굴을 맞댈 이유가 그녀에겐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턴 나의 장황한 대똥꼬쇼가 펼쳐졌다.

온갖 이유를 들어 상대를 설득하기에 바빴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글로 읽기보다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게 이해하기가 쉽다. 원래 작가들은 의뢰가 있으면 만나서 자주 대화한다.

물론 전부 개소리밖에 없었다.

채팅을 짐승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금 내 채팅은 개 짖는 소리로 가득할 게 뻔했다.

하지만, 개소리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도 그럴듯 하게 꾸미면 전문가의 연설이 되었다. 그럴듯 함이란 결국 자리가 만드는 것이다.

야짤 작가인 내가 ‘이쪽 업계’를 논하면 근거가 있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레이프합법화: 흠..]

[레이프합법화: 그럼 한번 만나보죠 뭐]

[레이프합법화: 마침 님 얼굴이 궁금하긴 했음]

“됐다!”

그렇게 받아낸 문자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내가 그쪽 지역으로 찾아간다는 말이 유효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초반에 거절했던건 정말 단순히 귀찮았기 때문인 모양.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데 딱히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그 뒤로는 가벼운 약속 잡기가 진행되었다.

언제 시간이 되는지, 어디에서 만날건지, 카페는 어디가 좋은지 등.

그나마 다행인 건 ‘레이프합법화’와 사는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국이면 어쩌나 했는데.’

30분 거리에서 살고 있더라. 이래서 세상은 좁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인터넷으로 알게 된 인물이, 30분 거리 내에 살 수도 있다니.

물론 대한민국의 작은 면적과 사람들 대부분이 수도에 밀집되어 있단 걸 생각하면 그리 희박한 확률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hala: 시간은 언제로 할까요]

[레이프합법화: 저 수요일날은 알바 안 가긴 하는데..]

[hala: 그럼 그때로 하죠]

[레이프합법화: 괜찮아요?]

[hala: ㅔ]

시간은 수요일 오후 6시. 상대방이 찍어준 카페로 가면 되었다.

오후 6시면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마침 수요일날은 오전수업밖에 없기도 하니 천천히 준비해도 여유로웠다.

그렇게 하여, 레이프합법화랑 만날 날이 정해졌다. 참, 약속 한 번 잡는데 이리도 번거롭다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솔직히 성별을 밝히면 좀 더 쉬웠을 거 같긴 한데···.’

익명성 위에서 ‘이성’이란 키워드는 묘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만약 먼저 남자라는 걸 밝혔다면 내가 장황한 개소리를 안 펼쳐도 됐을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재미없지.’

이런 재미난 이벤트를 굳이 선공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상대방을 보니까 날 철저히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만났을 때 무슨 반응을 보일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아, 그래도 이건 물어야지.”

그렇게 혼자 실실웃고 있자, 문득 주의해야 할 점이 생각났다.

그래도 의향은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까닥 잘못하면 ‘레이프합법화’를 진짜 레이프 할지도 모르니.

[hala: 님님]

[hala: 혹시 만약에 웬 모르는 남자가]

[hala: 갑자기 님을 막 덮치려 하면 어떨거 같아요?]

[레이프합법화: 오 뭐임 소재 추천해 주는 거에요?ㅋㅋㅋ]

[레이프합법화: 남자 어떻게 생겼는데, 잘생김?]

[hala: 음..적당히 생김]

[레이프합법화: ㅋㅋㅋㅋ]

[레이프합법화: 만약 그런 일 있으면 절하면서 먹히지]

“음음.”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

화창한 날씨였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엔 모르는 상대와 만나 야스를 한따까리 조져주고 싶은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5시 44분.

지하철에서 막 내린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레이프합법화: 어디에요?]

[레이프합법화: 전 지금 도착해서 카페에 앉아있는데]

[레이프합법화: 오른쪽 끝 부분임]

[hala: 거의 다 왔어요]

방금 막 나눈 대화들이다.

상대방은 이미 도착해 카페 안에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 근처에 사는 만큼, 먼저 준비해서 나온 듯 했다.

나는 카페쪽으로 한 걸음씩 발자국을 옮겼다.

가슴이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내 마음은 기대감과 걱정이 정확히 반반씩 나눠서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미지의 상대란 언제나 불안감을 심어주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핸드폰이라는 벽을 둔 채 대화를 나눴을 뿐, 실상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사람은 꽤나 속물적인 동물이라 사소한 게 맞지 않아도 금방 실망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만약 상대방의 성격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겉모습이 생각과 다르다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다. 특이 이런 걱정들은 사람과 만나기 전, 최대한 커져서 사람을 괴롭히고는 했다.

[레이프합법화: 아ㅋㅋ; 막상 만나려니까 떨리네]

[레이프합법화: 님 막 이상한 사람 아니죠?]

[hala: 그걸 약속시간 10분 전에 물어봅니까]

상대도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건 똑같은 모양인지 이런 카톡을 보내오기도 했다.

애초에 야짤작가와 커미션 신청자의 사이인데, 둘 다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기를 잠시, 나는 드디어 카페쪽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꽤나 고급스러운 느낌의 카페였다.

앉는 곳은 평범한 의자 대신 전부 푹신한 소파로 되어 있고, 창가에는 풍경을 꾸며주는 화분이 몇 개 비치되어 있었다.

‘오른쪽 끝이라고 했지···.’

나는 카페에 들어가기 전, 통유리를 통해 미리 안쪽을 확인해 보았다.

통유리이기 때문에 밖에서 확인하기 참 좋았다.

왼쪽 끝, 혼자 앉아있는 게 어색한지 자꾸 커피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여성이 보였다.

그모습을 보자, 속에 갖고 있던 걱정이 씻은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예쁘네.’

단발 머리를 한, 귀여운 인상의 여자애였다.

눈밑에 있는 옅은 다크써클을 제외하면, 때묻지 않은 듯 보이는 단아한 숙녀.

저게 ‘레이프합법화’라는 사실에 잠시 인지부조화가 오는 기분이었다.

허나 나쁜 기분은 아니다.

과연 상대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hala: 저 도착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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