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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24화 (24/125)

〈 24화 〉 24, 가디건

* * *

저녁의 밤거리는 활발하다.하루의 고단한 일과를 마친 사회인들이 저녁만 되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었다.

어쩔때는 학교가 끝난 청소년들이 맛집과 노래방을 돌아다니기도 하며, 퇴근한 회사원들이 무한 회식 열차를 달리기도 하고.

어쩔때는 청춘을 불태우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시내에서 날뛰기도 했다.

갖가지 욕망과 감정이 한 거리에 만나 뒤섞인다. 시내거리는 어떻게 보면 욕망을 잡아먹는 하나의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그 괴물의 뱃속을 탐방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괴물의 배는 피와 위벽대신 맛있는 먹거리와 즐거운 놀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오후 7시.

우리는 지금 술집을 찾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오빠 제가 좋은 포차 찾아놨어요.”

내 앞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은별의 목소리였다. 앞장서서 걷는 그녀는 어딘가 신이 나 보였다.

발걸음이 경쾌하고, 목소리가 평소보다 올랐다.

하긴, 저녁의 거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을 돋구는 무언가가 있었다.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 여기저기서 돌아다니는 사람들. 오직 놀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에너지는 주변 공기에도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당장 나 조차도 약간 기분이 들뜬 상태였으니.

‘거의 열흘만에 술 마시는 거 같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술 마신 다음 그 특유의 몽롱함과 붕뜬 느낌은 나에게 좋은 기분으로 다가왔으니까.

또한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주고 논리적인 사고를 방해해 잡생각을 사전에 차단하기도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성격이다.

그렇다보니 잡생각을 하다보면 저절로 우울한 쪽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술이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혼자 있을때도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최근에는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요즘엔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술도 돈과 시간이 있어야 마실 수 있는 법.

그러나 최근에는 커미션과 학교 등 할 일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술과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이제는 슬슬 후원계정 핀박스에 업로드할 만화도 구상해야 했기에 머리로 생각할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술로 사고 작동을 멈춘다니. 원래라면 안 될 일.

‘솔직히 오늘도 바쁘긴 한데···.’

뭐 어때.

사람이 어떻게 효율적으로만 살까.

기계조차도 일하다보면 과열이 나기 십상인데 사람은 그보다 배는 쉬어줘야지.

가끔씩은 이렇게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이은별과 만나지 않은지도 오래 되기도 했다.

밀당을 핑계로 만남을 꺼린지 거의 일주일 정도 됐으니.

그러니 이번 약속엔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저 얇은 옷차림도 어쩌면 이유중에 하나일 테고.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그녀가 3층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1944라고 적혀져 있는 간판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저게 술집 이름인 듯 했다.

먼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터벅터벅. 신발이 지면을 밟는 소리가 얇게 울린다.

시선을 올리자 자연스레 은별의 뒤태가 보였다.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트한 청바지가 몸매를 여실히 표현해주고 있었다.

잘 단련된 슬림한 허벅지와, 그와 대비되게 커다란 골반.

압도적인 뒷태가 한 칸 한 칸 오를때마다 강조되고 있었다.

“큼, 큼···.”

남사스러운 광경에 나는 그만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 가볍게 애국가를 부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가사가 진행됨에 따라 머릿속에 번뇌가 조금은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후,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이 주 가까이 욕망을 참은 상태에서 이성을 잃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걸친 가디건은 훌륭한 억제기였다. 비록 뒷태를 가리는게 좀 성가시긴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그 성가심이 도움이 되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다행히 계단은 몇 층 되지 않았기에 금방 끝났다.

입구앞에 도착하자 그녀가 마치 어느 가게의 종업원처럼 안쪽을 두 손으로 가르킨다. 제 나름의 장난이며 에스코트였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가게 안의 풍경.

“오.”

짧은 감탄이 나왔다.

술집 안은 꽤나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은은한 조명이 깔려있고.

가게 중앙에 달린 작은 샹들리에와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은 분위기에 고급스러움을 추가하고 있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있으면서 적당히 활기차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괜찮네.”

“그렇죠? 여기 안주도 맛있어요.”

그녀가 마치 자랑하듯이 말했다.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친구들과 자주 와 본 모양이었다. 하긴 얘는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으니까 여러 군데 돌아다녔겠지.

우리는 가게의 적당히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앉았다.

중앙은 너무 시끄럽고, 가장자리 끝은 너무 음침하니.

구석에서 두 세칸 정도 떨어진 장소가 딱 적당한 장소였다.

자리에 앉자 대화는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첫 주제는 당연히 술과 음식에 관한 토론이었다.

“뭐 마실래요? 여기 소주 종류도 다양한데. 자몽소주, 청포도 소주. 아 민트 소주도 있네. 마셔볼래요?”

“그런 걸? 개도 안 마실 거 같은데.”

“개는 원래 술 안 마시는데요? 뭐 어때요, 함 경험해 보는거지. 혹시 모르잖아요? 맛있을지.”

그렇게 정해진 건 얼큰한 짬뽕탕 하나, 닭껍질 튀김 하나, 평범한 소주 두 병이었다. 그리고 민초 소주 하나··· 기어코 저걸 시키더라.

아무래도 은별 양은 도전정신이 강한 거 같았다.

“와, 처음부터 소주 3병이네. 두명인데. 우리 초반부터 너무 달리는 거 아니에요?”

“네가 민초소주 시켜서 그래. 그리고 나중에 템포 조절하면 될 거야.”

“민초소주 맛있다고 하지나 마요.”

그렇게 가벼운 술판이 벌어졌다.

짬뽕의 얼큰한 향이 콧속을 찌른다. 튀김의 고소한 향이 미각을 자극시켰다. 나는 술을 하나 까서 가볍게 위세팅을 했다.

소주의 쓴 맛을 느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적당히 마셔야지.’

물론 이 말이 지켜진 적은 없었다.

*

좋은 안주와 이야기할 상대가 있으면 술잔은 금방 비워지는 법이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한 모금씩 홀짝거리다 보면 한 병이 비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특히 얼큰하고 짭짤한 안주를 시킬 때면, 달아오르는 속을 달래기 위해 술잔을 자주 집어들어야 했다.

물을 마시면 되지 않냐고?

아니, 물은 안 된다.

물 같은 건 게이들이나 마시는 거다.

···아니, 원래 물 마시는 건 사람들 자유이지만 지금만큼은 게이가 맞았다.

처음 은별이가 물을 마시려 할 때 무심코 ‘쫄?’이라 말한 게 컸다.

쫄이란 마법의 단어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사람도 어느새 싸움대 위에 올려 버리니까.

그 때부터 약간의 자존심 승부가 성립되더니 어느새 물 마심 = 게이 = 레즈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 이 상태.

쉴틈없이 술을 들이킨 그들은 현재 소주를 네 병 째 비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네 병 반 정도. 민초소주는 반 정도 먹다가 버려버렸으니 네 병 반이 맞았다.

역시 맛이 없더라.

민초 특유의 쓴 맛과 소주의 쓴맛이 합쳐지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억지로 비우려다 포기했고, 민초소주 값은 은별이가 내기로 했다.

“끄으···.”

세원은 고개를 탈탈 털었다. 머리 자체가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잠시 힘을 풀고 눈꺼풀을 감으면 그대로 고개가 떨궈지는 것이다.

사고가 마비되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시야가 어지럽혀지며 가끔 손가락이 두 개 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당히 마신다고 했는데··· 술자리에서 그게 지켜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은 있었다. 세원은 객관적으로 봐도 술이 센 편이었으니까.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은 무려 두병 반.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가려면 적어도 3병까지는 들이켜야 하는 그였다.

잔으로만 대충 따져도 17~21잔 사이.

그런 만큼 승부에 자신이 있었고 술자리가 오래가도 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체육과는 체질부터가 남다른 건가.

은별은 세원의 주량을 엇비슷하게 따라잡고 있었다. 서로 균등하게 2.25병씩 마신 상태.

이미 위장의 절반은 술로 가득 찬 거 같은 기분이었다.

은별은 고개가 떨궈진 세원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어어 뭐에요? 설마 벌써 끝난 거에요? 처음에 쫄리냐고 한 게 누군데.”

도발이 몽롱한 머릿속을 파고 들어온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조롱의 외침은 분명히 들려왔다.

물론 세원은 그딴 망발을 듣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어허!”

세원은 대뜸 소주잔을 들더니 그대로 목구녕으로 넘겼다.

꿀꺽꿀꺽. 차가운 알코올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아직 어림도 없다!”

세원이 빈 술잔을 높이들고 외쳤다. 자신은 아직 멀쩡하다 그리 외치는 것 같았다.

은별은 그걸 보고 하하 웃었다. 평소의 차분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모습이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놀라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미쳤네···.’

쉬지않고 마셨는데.

살짝 들뜬 모습이긴 해도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보였다.

고개를 떨구긴 하지만 자는 것은 아니었고, 가끔 헛소리를 내뱉긴 해도 대화 자체는 잘 이어지는 편이었다.

사실 그녀도 취한 상태라 제대로 된 판단은 불가능했다.

소주 두 병이면 그녀에게도 부담스러운 양이다. 사실 그녀는 거의 한계치에 다다른 상태였다.

아마 두 세잔 정도면 그대로 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하지만 도발을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은별은 세원을 따라 잔을 들이켰다.

“···크으.”

차고 쓴 알코올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간다.

분명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차가운데 머릿속은 더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빨리 날이 뜨거워진 탓에 에어컨을 조절하지 못한 걸까, 공기가 묘하게 덥게 느껴졌다.

하여 그녀는 아무생각 없이 걸친 가디건을 벗었다.

“···후아.”

드러난 피부에 시원한 바람이 스친다. 얇은 브이넥의 크롭티가 그대로 드러나며 고운 피부를 보여주었다.

뾰족하게 아래로 늘어난 브이넥의 끝자락에, 그녀의 가슴골이 노출된다.

순간 고개를 들었던 이세원의 눈이 그대로 못박혔다.

‘어···.’

시선이 마치 끌어당기듯 가슴골로 향했다.

얇은 천막을 치워낸 그녀의 몸매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잘 관리되어서 복부에 드러난 십일자 복근과, 적당히 크게 부풀어 오른 가슴. 얇고 굴곡진 호리병 몸매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아랫단쪽에 피가 몰린다.

술로 마비되어버린 사고는 이성부터 치워버리기 마련이었다.

비워져버린 뇌의 구석에는 그렇게 본능이 차올랐고, 본능은 곧 원초적인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남성은 어째서 가슴에 집착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보면 저건 단순히 지방의 덩어리일 뿐인데.

심하게 부어오른 살덩이가 그저 물풍선의 형태를 취했을 뿐인데. 남자는 저기에 환장했다.

화끈한 열기가 온몸을 잠식하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활발해진 혈류에 온몸에 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른바 더위의 연쇄작용. 가열된 머리를 잠시 식히고자 이번에는 이세원이 가디건을 벗었다.

집에서 대충 골라입은 흰색의 반팔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번엔 이은별이 반응할 차례였다.

‘······엇?’

그녀의 시선이 세원의 몸에 못박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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