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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20화 (20/125)

〈 20화 〉 20, 제목 뭐 쓸까요

* * *

챠라락.

그녀의 머리가 숙여짐에 따라 어깨에 걸쳐져 있던 머리카락이 아래로 찰랑거렸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마치 은하수를 타듯 흔들거린다.

갑작스럽게 머리를 숙이는 그녀를 보고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녀가 대체 왜 사과하는건지 짐작이 안 됐기 때문이다.

물론, 사과할 건 많긴 하다.

나를 가지고 내기를 하려 했다는 거랑, 0고백 1차임을 당한거랑, 섹스를 못했다는 거랑 뭐 등등.

···생각해보니 빡치네.

아무튼, 내면적으로 쌓인 죄는 많지만 표면적으로 나온 죄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상 내가 고백빵 내기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모르는 사실이고, 죄라고 해봤자 저번 식사때 늦은 거 밖에 없었으니.

‘아.’

혹시 진짜 그것때문인가? 저번에 늦은 거 때문에?

확실히 그 때 어색한 분위기로 헤어졌었으니 마음이 불편할만 했다. 그 때 이후로는 주말이라 만날 기회도 없었고.

굳이 카톡으로 하지 않고 얼굴을 보고 사과하려는 건, 이게 더 정성이 있어 보이기에 하는 일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단하네.’

내가 그때 김치짓을 좀 쌔게 해서 정나미가 좀 떨어질 줄 알았는데.

월요일이 되자마자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하는 걸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 저게 연기면 쟤는 체육교육과가 아니라 연기과에 있어야 한다.

“사실 제가 그 때 친구를 잠깐 만나고 왔었거든요. 잠깐 만나고 온다는 게 그만··· 원래는 솔직히 말하고 갔어야 했는데 거짓말 해서 죄송해요.”

심지어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까지 사과를 전하고 있었다.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이에게 사과하는 것 조차 많은 용기가 필요한데 하물며 거기서 죄를 스스로 고백까지 하고 있으니. 이건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빡쳤던 마음이 잠시 누그러졌다.

‘음···.’

나는 고갤 숙인 그녀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다.

그런 거짓말을 했냐면서 인성파탄자 처럼 지랄지랄 하던가, 아니면 성모마리아처럼 자애롭게 넘어가던가.

아아, 사람은 고작 선택 하나만으로도 인성파탄자와 성모마리아를 오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건 후자였다.

“에이, 괜찮아.”

사람이 언제나 밀어낼 수는 없는 법. 지금은 당기면서 어느정도 줄을 풀어줄 때였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 법이지 뭐.”

실제로 나도 사람들에게 구라를 자주 까는 편이었다. 야짤을 보냈다면서 혐짤을 보내거나, 혐짤을 도배하면서 내가 아니라고 잡아떼거나. 아무튼, 이 정도의 거짓말은 조금 괘씸하긴 해도 넘어가줄 수 있는 법이다.

“헤헤··· 고마워요.”

내가 괜찮다고 하자 이은별이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갈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너무 죄송한데··· 나중에 제가 밥이라도 살게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는 에프터 신청.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집밥 보다는 그래도 식당에서 먹는게 확실히 맛있는 법이다. 내가 아무리 요리를 잘 해본다고 한들 장인의 손맛과 건강이 걱정되는 수준으로 뿌려지는 msg를 이길 수는 없었다.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나에게 msg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석박사들이 만든 신.

“그런데 사과하려 지금까지 기다린거야? 이 낮부터.”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저도 아까까지 수업이었거든요.”

라고 말하며 그녀가 헤헤 웃었다. 야구모자에 의해 그림자진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갸름한 턱선을 따라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순간 나는 잠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와···.’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정말로 예쁜 외모였다. 고양이상의 갸름한 얼굴은 언뜻보면 도도한 느낌을 주었으며, 남색의 머리카락은 거기에 신비함을 꾸며주었다. 거기에 더해 운동으로 다져진 들어갈 때 들어가고 나올 때 나온 몸매는···.

‘후.’

아래로 내려가려던 시선을 다시 위로 고정시켰다. 저기엔 질량이 있다. 높디 높은 질량이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평화를 찾고 있자 이은별이 물었다.

“아! 맞다 오빠. 혹시 다음 수업 있으세요?”

“음? 아니 없는데.”

“그럼 지금 저랑 밥먹으러 가실레요?”

잘됐다는 듯 그녀가 손벽을 친다.

아예 밥을 사준다는 말이 나온김에 지금 당장 사주려는 듯 싶었다.

‘흠···.’

여기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마침 배가 고픈 참이기는 했다. 아침은 굶었었고 그 상태로 3시간동안 수업을 들었었으니.

복부 안쪽에 공허감이 어느정도 맴돌고 있는 상태. 식사 제안이 끌리기는 했다. 같이 밥을 먹다보면 어느정도 관계 진전도 시킬 수 있을테고.

그러나,

“미안, 집에 할 일이 있어가지고.”

나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거절했다.

지금은 거절할 타이밍이었다.

전에도 말했든 얘와 나 사이에는 거리감이 중요했다. 어느정도 가까워질 수는 있으나, 어느 부분부터는 선을 그어놓아야 했다.

그래야 얘가 나를 꼬시려고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일이 있긴 했다.

‘얼른 돈 벌어야지.’

요청한 커미션을 끝내놓아야 한다는 것. 저번에 5만원을 벌었다지만 나는 여전히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었다.

또 계정도 키워야 하고 어느정도 인지도를 얻을 필요가 있었기에 쉴 틈은 없었다. 슬슬 핀박스 후원시스템을 준비해야 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이유로 나는 지금 바쁜 몸이었다.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이은별도 일이있다고 하자 약간 아쉬운 기색만 보일 뿐 금방 포기했다.

얼굴에 잠시 시무룩한 기색이 보인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길레 그러세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구슬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딱히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질문.

그 덕분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엇?’

무슨 일이냐니··· 그야 집에서 야짤을 그리는 일이다.

안대를 쓴채 온 몸이 묶인 여자가, 진동기에 오르가즘을 느껴서 가버리는 그림을 그리러 가는 참이었다.

허나,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아무리 이곳이 남녀역전세상이고 내가 남자라고 해도 ‘나 야짤 그려’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당할 게 뻔하다.

하여, 나는 얼른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순간 사고가 가속하며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거짓을 만들어낸다.

‘똥이 마렵다고 말할까?’

하지만 시팔, 신체가 당황해서 그런지 그다지 도움 되는 변명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적당히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으··· 사실 그리고 있던 그림이 있는데 마저 완성해야 해서.”

어쩔때는 형편없는 거짓보다 일부의 사실이 더 도움될때가 있다.

그림을 그리긴 하나, 어느 그림을 그리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야짤을 그린다는 사실만 숨긴다면 나도 그냥 평범한 그림쟁이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미 내가 미대입시를 준비했었다는 걸 알고있었기에 딱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아하.”

다행히 이은별도 이 정도 대답이면 만족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감질맛 나는 대답에 약간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긴 하지만 더 물어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더 깊게 물어보기엔 우리 사이가 그렇게까지 가깝지 않았으니.

“저도 그림 좋아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구경하고 싶네요.”

지금 당장 볼 수도 있단다. 팩시브에 들어가서 대충 열 페이지 정도 내려가면 내 그림이 보일 거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다행히 그 뒤로 할 말은 끝났는지 은별이는 그대로 제 갈길을 갔다.

“그럼 나중에 봬요.”

“그래.”

가느다란 팔이 좌우로 흔들리며 작별인사를 한다.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녀가 모퉁이 쪽으로 사라지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진짜 식겁했네.

다음에는 변명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런 가벼운 돌발상황에도 쉽게 당황한다니.

‘야짤 그린다는걸 들킬 순 없지···.’

들키면 경멸받는 걸 넘어 사회적 매장이었다. 아니, 남녀역전 세상이니 꼭 그렇진 않으려나?

아무튼 조심할 필요가 있는 건 맞았다. 굳이 자랑할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앞으로 조심하자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강의했던 장소는 602호실. 즉, 6층이다.

내 발로 한층한층 내려가기에는 조금 귀찮고 먼 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기로 했다.

고등학교 까지는 엘리베이터는 감히 상상도 못 했는데 대학교는 꽤나 흔하더라.

아무래도 층 수가 높은 건물이 많고, 여러 종류의 사람이 모이다보니 엘리베이터는 필수로 설치하는 듯 했다.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특이하게 왼쪽 끝 모퉁이 부분에 있었다. 건물 끝자락에 따로 엘리베이터가 붙어있는 형태인 것이다.

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그곳으로 걸어갔다.

마침 엘리베이터는 6층에 멈춰있었다.

지금 시간이면 대부분 수업 끝나고 집에 갔거나 식사하러 갔을테니 자연스레 엘리베이터가 비게 되는 것이다.

“개꿀~”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 버튼을 누르고 그대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바깥에서 어떤 여성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야 열려있다! 빨리와 새끼야!”

“잠깐만! 가방 거의 다 챙겼어!”

“아오 굼벵이 새끼야! 존나 기다리게 하네.”

두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엘리베이터가 열려있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모양.

나는 그걸 듣고 열림 버튼을 눌러줬다.

‘기다려줘야지.’

저렇게 간절히 뛰어오고 있는데 쌩까고 문을 닫는 건 인정머리 없는 짓이다.

다행히 그 정도 배려는 할 수 있었기에 나는 느긋하게 기다려줬다.

“헤엑, 헤엑··· 감사합니다.”

그렇게 앞서 뛰어오던 여성이 엘리베이터 문을 집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거 보니 나랑은 다른 과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 다른 반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에요.”

내가 적당히 말하자 순간 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여자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방금까지 뛰었던 영향인지, 아니면 모종의 무언가 때문인지 얼굴에 피가 올라 옅은 홍조가 떠 있었다.

“야. 뭐해 안 들어가고 거기서······.”

그건 그 뒤에 찾아온 여성도 비슷했다. 엘리베이터 구석에 자리잡은 나를 보더니 잠시 굳어버린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와···’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기묘한 침묵이 잠시 주변을 사로잡았다. 두 세걸음 남짓한 거리에서 알지 못하는 시선이 오고갔다.

그 상황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

“아, 감, 감사합니다.”

좌우로 까닥이는 내 고개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들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두명.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도중에도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약간 불편한 마음으로 핸드폰만 만지작 거려야 했다.

‘뭐지.’

내 몸에 뭐 묻었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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