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 어디서 봤던 닉네임인데..
* * *
[글러먹은나: 혹시 지금도 요청받으시나요?]
눈앞에 온 문자를 보고, 나는 잠시 멍을 때렸다.
기도를 했다고 진짜로 들어줄 줄이야. 설마 신은 실존하는 건가?
우주의 거악 니알라토텝님께서 정말 나 같은 하찮은 존재를 보필하는 걸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멍 때리기를 잠시,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객이다. 성실하게 접대해드려야 했다.
[hala: 네! 당연히 가능합니다. 무슨 그림을 신청하실 건가요?]
[글러먹은나: 아 잠시만요.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잠시 말이 없어지는 상대방. 아무래도 무엇을 의뢰할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쯤 백스페이스바를 여러번 누르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채팅을 치는 걸 기다리고 있자, 걱정과 기대가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제발 정상적인 거 나와라.’
그래야 내가 돈을 벌지.
닉네임인 ‘글러먹은나’만으로는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인간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글러먹은 새끼가 한둘이어야지.
당장 몇 분 전에 연락했던 ‘레이프합법화’만 봐도 어느 관점에서는 글러먹은 년이었고, 방구석에서 그림이나 그리며 딸쟁이들 돈 뜯어먹는 나도 어느 관점에서는 글러먹은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저 닉네임으로는 무슨 취향을 가졌을지 확실히 유추하기가 어려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닉네임에 계속 눈이 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닉네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분명 어디서 봤는데···.’
확실히 봤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 닉네임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근데 막상 떠오르지는 않는··· 어딘가 가려운 느낌이었다.
‘아··· 어디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 경계선에서 확실히 움직이고 있는데 절대 의식 위로는 안 올라오고 있었다.
괜한 오기가 생긴 나는 녀석의 이름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저런 닉네임을 봤다면 분명 어딘가의 커뮤니티였을 터.
‘비씨였나?’
하여 나는 비씨로 들어갔다. 온갖 인간군상이 모이는 곳이며, 익명성앞에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성욕을 발산하는 곳.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sns도 비씨가 대부분이었기에 어디선가 봤다면 여기밖에 없었다.
나참, 고작 닉네임 하나 생각하겠다고 번거롭게 검색까지 하고 있다니.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잠시 현타가 왔다.
하지만 가려운 부분이 있으면 긁어야 하는법. 사람은 뇌는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도록 발전해 왔다.
즉, 내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뒷조사를 하는 건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다.
그렇게 검색창 위에 상대방의 이름을 다 적고 검색을 눌렀을 때였다.
순간 전류가 스치듯, 저 닉네임을 어디서 봤는지 기었이 났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갤러리를 돌아다녔던 때.
쥬지로 뒤덮인 팩시브를 보고 각혈하며 갤러리의 민심을 확인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저 닉네임을 한 유저가 게시글로 성욕을 분출하고 있었던 걸 기억한다. 꽤나 적나라한 욕망을 거리낌없이 풀어데던데.
그때 본 게시글 제목이···.
‘남자한테 밟히고싶다··· 였나?’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촤라라락!
녀석의 게시글들이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글러먹은나’가 제 손으로 직접 써재낀 게시글들.
상당히 양이 많은지 금새 한 페이지가 게시글로 뒤덮이고 페이지가 나뉜다.
나는 상대가 쓴 글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아 누가 내 엉덩이좀 때려줬으면 좋겠다..]
[젖꼭지 쌔게 깨물리고 싶다..]
[잘생긴 남자가 나를 모욕해줬으면 좋겠다..]
[와 스팽 존나 맞아보고싶다..]
[이야 ㅋㅋ 오랜만에 팩시브돌다 개꼴리는 짤 찾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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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자신의 욕망이나 바램을 적은 글들. 보니까 하루에 한 번, 못해도 이틀에 하나씩은 욕망글을 싸재낀 모양인데 그 갯수가 벌써 백에 육박해 가고 있었다. 세상에 씨발, 일 이틀에 한 게시글인데도 벌써 100개 가까운 게시글을 적었다면 이지랄을 한지 최소 100일은 넘었다는 소리다.
한번은 욕망을 분출하다 갑자기 억울함이 생겼는지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
[아니; 왜 나는 근처에 괴롭혀줄 남자가 없는거야??]
나 은근 예쁘고 몸매 좋고 사교성 오지는데 내 취향 맞춰줄 남자가 왜 하나도 없는거임?
근처에 나 좋다는 남자도 은근 많은데; 아 나도 섹스하고 싶다!
ㅇㅇ(322,128): 네 꼬라지를 봐봐요 씨발; 사람이 꼬이나
└글러먹은나: 아니 ㄹㅇ 나 밖에선 정상이라니까?
다마고추: 그럼 네가 하고싶다고 말해 네 좋아하는 놈들 있다며
└글러먹은나: 부끄러워서 못해..
└다마고추: 그럼 ㅆㅂ 어떡하라고 ㅋㅋㅋ
+
탁.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살짝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이정도면 대충 무슨 취향을 가졌는지 알 수 밖에 없다. 닉값을 제대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글러먹은 년이었네···.”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왜 신청하는 놈들마다 이모양인지··· 하긴 다 내 업보였다.
정상적인 걸 그리고 싶었으면 처음에 팔다리 짜른 걸 그리지 말았어야지. 이세원 이 빌어쳐먹을 새끼야.
‘아니 그렇다고 남캐야짤을 그릴 순 없잖아.’
할거면 나 말고 세상을 탓 해라 이세원 이 개같은 새끼야!
그렇게 잠시 내면의 나와 싸우고 있자.
띠링!
드디어 알람이 울려왔다. 당연히 상대방은 ‘글러먹은나’.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이제야 요구사항을 다 적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길게 텍스트가 왔을까 걱정하면서 들어가봤지만 생각보다 줄은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러번 지웠다 써서 오래걸린 모양. 물론 텍스트의 길이가 생각보다 적다고 해서 수위가 그리 낮진 않았다.
[글러먹은나: 수갑이랑 안대를 찬 여자가 남자한테 진동기로 괴롭혀지는 모습을 그려주세요. 여자는 두 젖꼭지에 핑크색 딜도 부착하고 아래쪽은 남자가 진동기로 쑤시고 있는 구도로 말이에요. 아! 여자는 막 가버린 상태라 괴로움에 몸부림 치는데 남자는 그걸보고 더 흥분하면서 진동기 세기를 올리는 상태···]
“이야··· 자세하기도 해라 대단한 년······.”
꽤나 자세한 요구에 다시한번 감탄이 나온다.
최소한 레이프합법화는 초반에 부끄러워하기라도 했는데.
녀석은 그딴것조차 없는지 아주 세밀한 것조차 거리낌 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갤러리에 성욕을 분출해와서 그런지 쌩판 모르는 남에게 취향을 알리는 건 거리낌이 없는 모양.
햐, 이게 전부 익명성의 폐혜였다.
상대가 누구든 인터넷 세상에선 두꺼운 가면으로 감싸주니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욕망을 분출하는 거 아닌가.
부분실명제를 도입할 필요성을 여기서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그릴 수 있는거라 다행이네.”
뭐, 막상 욕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릴 수 있는 정도였다.
공지대로 투샷이었고 남녀 한 쌍이었으며 하드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존나 하드한 편은 또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런 취향의 그림은 전생에도 꽤나 그려본 적 있었기에 오히려 자신있었다. 신청도 자주 왔었고 나도 거부감 없이 그릴 수 있었으니.
내가 놀란 건 상대의 성욕이지 취향은 충분히 수용가능한 편이었다. 아니 마조히스트 여자라니 오히려 만나보고 싶은데···.
‘이런 애가 현실에선 인기가 많다고?’
내가 볼땐 개구라 같은데. 본인이 하는 말이라 신빙성도 없었고, 원래 비씨같은 경우엔 반 이상이 구라핑이니까.
그래서 굳이 믿지는 않았다.
[글러먹은나: 가능할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다시 카톡이 올라온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잠시 구석에 치워두고 얼른 답장을 해줬다.
[hala: 넵 충분히 가능합니다!]
최대한 밝은 느낌으로. 고객은 언제나 서비스가 우선이다.
[hala: 돈은 여기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오리 10xxxxx······]
이번엔 선입금이었다. 상대방이 먹튀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원래는 레이프 합법화 때도 선입금을 받아야 했지만 그때는 상대나 나나 신뢰도가 없었으니.
신용을 쌓을 겸 후불제를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커미션도 완수했고 결과물도 잘 내놓은 상태다.
신용이 내가 더 높은 셈.
그렇다면, 이제는 선입금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글러먹은나: 앗 네 잠시만요~]
상대방이 답장을 하고 곧이어 돈이 들어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이걸로 또 다시 5만원 get이다.
다시 통장에 들어올 든든한 심사임당님을 생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hala: 감사합니다^^ 늦어도 3일 안에는 그려오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부터 그리면 2~3일 안에 완성이 될 것이다.
[글러먹은나: 오 빠르네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상대방은 대화를 마쳤다. 볼일을 마쳤으니 이제 사라진 모양.
순간, 작은 공허감이 몸을 감쌌다.
나는 시간을 확인해보기 위해 핸드폰 상단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새벽 2시를 가르키고 있는 시간.
꿈만 같았던 주말도 전부 지나가버렸으니 학생 신분인 나는 다시 아침이 되면 학교를 가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난 조금 일찍 잠들 필요가 있었다.
원래는 이미 조질대로 조져버린 생활리듬이었지만 수월한 일상생활을 위해서라면 고쳐야하는 법이니.
‘솔직히 2시도 꽤 늦긴 했는데···.’
뭐 어때. 그래도 새벽 4시 6시에 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다행히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났었기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데도 잠은 왔다.
다가오는 수마를 그대로 받아내며, 나는 잠에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