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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17화 (17/125)

〈 17화 〉 17, 생물학적

* * *

사람은 가끔, 아주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답을 찾을 때가 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오래된 배양 베지에서 푸른 곰팡이를 발견해 페니실린을 만들어 낸 것이 그 예였고, 스펜서 실버가 강력 접착제를 만들려다가 실패한 후 어쩌다 만들어낸 포스트잇이 그 예였다.

이처럼 우연한 발견을 세렌디피티라고 한다. 완전한 우연으로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도 지금, 그와 비슷한 발견을 한 상황이었다.

물론 페니실린과 포스트잇에 비교하면, 무척이나 볼품없고 초라한 발견이지만.

이러한 발견이 발명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작은 깨달음으로 사라질 발견이지만.

적어도 나에겐 이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나를 그 거지같은 남캐 지옥에서 빼내줄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오.”

눈 앞에 놓여진 다큐 자료를 보고 나는 감탄을 했다.

첫 번째 커미션을 끝내고 인터넷의 바다를 한참 뒤적거렸을 무렵이다. 나는 나를 구원할 동아줄을 찾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쳤다.

히토비와 팩시브를 돌아다니며 원래 세계와의 차이점을 찾아보기도 하며, 남자 그림과 여자 그림의 가짓수를 분석해보기도 했다.

덕분에 상당히 내상을 입긴 했으나···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길 몇십분··· 눈에 띄는 성과없이,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아다닐 무렵.

아주 우연히, 나를 구원할 메시아를 조우할 수 있었다.

[포르노를 볼 때의 남녀 뇌파반응 차이]

그 제목부터가 존나 병신같고 흥미를 일으키는 다큐. 이 영상은 각각의 남 녀 그룹에게 다양한 포르노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성애자 남성은 여자보고 딱딱해졌고, 동성애자 남성은 남자보고 섰어요.]

그리고 그 포르노를 봤을 때의 뇌파를 통해 흥분도를 분석하고 기록했다. 어떤 부분이 꼴렸는지, 취향에 따라 얼만큼 갈리는지, 또한 성별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등.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남성 그룹같은 경우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야동에만 흥분한 반면, 여성 참가자들은 아무거나 시청해도 어느정도의 흥분반응이 있다는 결과였다.

남자x여자, 남자x남자, 여자x여자 등 전부.

[심지어 원숭이물 까지도요!]

물론, 여자라고 해서 취향에 따른 흥분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본 나는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영상은 내가 저번에 뇌내망상으로 지껄였던 가설을 현실에서 근거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녀간의 정조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뇌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여자’는 남자와의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자가 느끼는 흥분도의 스펙트럼이 남성보다 넓다는 것.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이 동성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것.

이건 이용할 수 있는 자료였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여기서 나는 구원을 느낄 수 있었다.

싱그러운 니알라토텝님이 나에게 부드러운 촉수를 건네고 있는 기분이다.

따스한 햇빛아래에서 열일 하는 개미에게 마치 그늘을 씌워주는 것 같았다. 아아, 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가.

이것은 그가 나에게 내린 작은 선물. 엿같은 남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

나는 거의 울다시피 중얼거렸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이제 남캐만 안 그려도 돼···.”

아니, 물론 그리긴 그려야 팔리겠지만···그래도 남캐‘만’그리지 않아도 되는 게 놀라운 발전이다.

이를테면 저번에 커미션 했을 때 그렸던 투 샷 그림처럼 남녀를 섞어서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여성은 동성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고 하니 소비자들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상황만 꼴리게 그려준다면 굳이 시각적인 자극이 크지 않더라도 분명 아랫도리를 적실 것이다.

좋아.

“바로 수정 드간다.”

앞으로의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한 나는 곧장 팩시브로 들어갔다.

계정탭의 메인화면에 띄어놓았던 공지를 조금 수정할 생각이었다. 이걸 바꿔놓으면 저번과 같이 별의별 이상성욕 새끼들을 초반에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커미션 신청하는데 공지조차 안 읽고 오겠어.

[앞으로 커미션 신청작은 투샷만 받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사항을 적어내린다.

[단, 게이짤은 안 받습니다.]

이게 핵심 포인트였다.

내가 팩시브라는 오염된 심연을 뒤져가며 자료를 모았던 것도, 그로테스크함이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방향을 선택해서 내 정신을 보호하려 한 것도. 결국에는 홀딱벗은 남캐를 그리기 싫어서 한 수단들이었다.

그런 이상 게이짤같은 그림신청을 받는 것은 모순이나 다름이 없었다.

“방법을 찾았으니 굳이 잔인한 건 안 그려도 되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존나 하드한 건 자제한다며, 되도록 순한 것들만 받겠다고 공지했다.

이래보여도 내 취향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누군가를 자르고 해체하는 것 보다는 평범하게 남녀 둘이서 야스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가끔 하드한것도 보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약과고.

어쨌든 나는 그렇게 공지를 수정했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바뀐 것은 없었다.

앞으로는 투샷만 받겠다는 것. 투샷도 남녀 한쌍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너무 하드한 건 앞으로 자제하겠다는 것.

별 거 아닌 글줄의 나열이지만 앞으로는 저게 큰 활약을 해 줄 것이다. 일단 커미션 맡길 때는 공지를 확인할 테니까. 걸러질 사람은 걸러지겠지.

그렇게 내가 쓴 공지에 만족한 후 잠시 롤 한판 때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 씨발! 이즈 개새끼야 앞비전 좀 작작하라고!”

언제나처럼 숟가락 년들의 사고방식을 혐오하길 잠시.

띠링!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갑자기 알람이 울린다.

대충 들어 확인해 보니 레이프합법화한테서 온 문자였다.

[레이프합법화: ? 뭐임?]

[레이프합법화: 공지는 갑자기 왜 바꿨어요?]

수정한지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그새 확인한 모양이었다. 참으로 성실한 딸쟁이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게임도 졌겠다. 나는 상대의 말에 답장했다.

[hala: 넹 거를 사람은 거를 예정이라]

[레이프합법화: 오..]

[레이프합법화: 저 근데 공지에 좀 심한 건 자제한다 했는데..]

[hala: 넹]

[레이프합법화: 혹시 제것도 걸러지나요..?]

“뭐?”

푸핫!

순간 실소가 터져나왔다. 어쩐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인다더니. 혹시 자기 때문에 이런 공지를 올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나 보다.

화면 너머 어정쩡하게 의자 위에 앉아 불안해 하고 있을 상대방을 생각해보니 뭔가 귀여웠다.

생각해보면 저 사람것도 은근 하드한 편에 속했지. 역강간이 순한 취향은 아니었으니까.

자신도 그걸 인지하고 있었나 보다.

[hala: 걱정마세요 ㅋㅋ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 정도면 약과였다.

‘네가 그 새끼들을 봤어야해···.’

아직도 기억에 아른아른 거린다. 남자 둘이서 좆 꺼내고 검대결 하는 거 그려달라는 새끼랑, 괄약근에 나팔인지 부부젤라인지 씨발 아무튼 관악기 꽃고 불어달라는 새끼들.

그런 심연에 사는 악마들에 비하면 ‘레이프 합법화’의 취향은 그야말로 정상.

충분히 천당에 올라갈 수 있을 법한 취향이었다. 염라대왕님도 ‘이 정도는 가능’하면서 망치를 땅땅땅 뚜드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취향의 그림은 예전에도 여러본 전적이 있으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모종의 기대가 생긴 나는 상대방에게 물었다.

[hala: 그런데 이런걸 묻는 건··· 혹시 다음에도 신청하실 의향이 있어서 그런가요?]

굳이 시간을 써가면서 나에게 묻는 이유가 있을 터.

자신의 요청이 걸러질까 걱정했었다면 그건 곧 다음에도 신청할 생각이 있었다는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게 맞는지 상대방이 다시 카톡을 보낸다.

[레이프합법화: 네!]

[레이프합법화: 아 근데 지금은 말고]

[레이프합법화: 나중에 알바비 들어오면 신청할게요 그래도 되죠?]

[hala: 네^^ 얼마든지요]

나는 재빨리 답장을 하고 얼굴에 웃음꽃을 띄었다.

내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재구매할 생각이 있다는 건데 안 좋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청해주기 마련이었다. 자기 생각으로 창조된 야짤을 보는 건 또 색다른 느낌의 쾌락이었으니까.

“캬 벌써 고정수입이 생기네.”

크, 고정수입.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예수님과 니알라토텝님도 고정수입이란 말을 들으면 분명 할렐루야라는 외칠 것이다.

돈이란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존재다.

하다못해 똥싸고 물내리는데에조차 돈이 들어가는데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돈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다름 없었다.

“커미션 했던 작품도 민심이 좋고.”

이번에 그렸던 그림을 팩시브에 올려봤는데 꽤나 민심이 좋았다. 드디어 순항을 하고 있다는 뜻.

이대로만 가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역시 돈이 문제인데···.”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매트리스 위로 다이빙 했다.

풀썩.

침대의 푹신한 감각이 내 몸을 마구잡이로 사로잡으며 제어권을 하나하나 사로잡는다.

사람의 몸이란 신기해서 한 가지 기관이 작동범위가 줄어들면 다른 기관이 증폭되어 열일을 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내 몸의 제어권이 침대에게 맡겨진 대신, 내 뇌가 열일하면서 잡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

‘역시 부족하단 말야···.’

이번에 5만원을 벌긴 했지만 고작 5만원일 뿐. 월세나 수도세, 학자금을 생각하면 아직 한참을 더 벌어야 했다.

심지어 내가 원할 때마다 5만원 씩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커미션을 항시오픈하긴 했지만 커미션 요청이 항상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신청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소비자였으니 결국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쩔 때는 한 달 가까이 커미션 요청이 안 들어올 때도 있었다.

‘아··· 한 달?’

세상에 한 달.

그때야 이미 벌어놓은 돈이 좀 있어서 괜찮았지, 지금 이 상황에서 한달이면 씨발 내가 말라죽고 변사체로 발견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순간 손발이 벌벌 떨리고 오한이 등골을 쓰다듬었다. 이건 죽음의 향기였다.

‘안 돼! 제발 아무나 신청해줘!’

갑작스럽게 느낀 죽음의 공포에 누군지 모를 신에게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진짜 기도가 통했는지 머리 위에 놔둔 핸드폰에서 경쾌한 알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핸드폰을 낚아챈 후, 상단바를 내려서 알림을 확인해보았다.

[글러먹은나: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도 요청 받나요?]

놀랍게도 진짜 커미션 요청이 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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