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5,기만의 기만
* * *
“고백은 못 받을 거 같은데.”
이은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시발 왜!’
이세원은 순간 소리 내어 외칠 뻔했다.
여기 남역세계 아닌가?
자기가 먼저 꼬리치듯 다가오고는 사귀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경우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이은별도 이해가 안 되는 대답이었는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병신이야? 너한테 호감 있는 거 같다며. 그럼 사귀고 확 먹어버려야지.”
유보람, 그녀가 보기에 이세원 정도면 상당한 미남이었다.
아니, 이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미남이고 매력이 있었기에, 학년 초에 선배들이 이세원에게 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걸 전부다 거절했었고 말이다.
술집까지 같이 갔던 인간도 전무하다시피 한 게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부러 호감을 보여주고 고백까지 해온다?
자신이라면 분명 받을 것이다.
마음의 문제를 넘어 타이틀의 문제였다.
남들은 다 거절하던 전설의 포켓몬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유보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성격이 별로야? 막 도저히 감당 못할 만큼 쓰레기같다던가.”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유보람의 극단적인 말에 은별은 손사래를 쳤다.
“성격은 괜찮아. 말도 잘 통하고.”
오히려 지금까지는 좋은 인상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고, 성격도 것모습에 비하면 꽤나 유하고 유쾌하다. 외모도 솔직히 마이너스인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정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래도 이 한 단어로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음··· 굳이 따지자면 취향때문이지.”
취향.
정말 간단한 두 글자 짜리 단어지만, 또 그렇기에 어디까지고 어려워질 수 있는 단어.
남들에겐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취향 때문에 이은별은 지금까지 사귀고 싶었던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사귀기도 뭐하고···.’
그게 그녀의 거절의 이유인 것이다. 단순히 취향.
‘하.’
그런 이은별의 말에 이세원은 속으로 헛웃음을 내쉬었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좆같네.’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였다는 사실도 어이없었고.
지금까지 저 년들의 내기에 가지고 놀아졌다는 생각에 분노가 용솟음쳤다.
솔직히 섹스를 못한다는 것도 개빡쳤다.
“아니, 또 그놈의 취향 문제야? 도대체 시발 어떤 고결한 취향이길레 지금까지 너 좋다는 애들을 다 차냐. 솔직히 말해봐 너 생식기능 없지?”
“아니, 뭔 소리야···.”
그 뒤에도 유보람과 이은별이 뭐라고 떠들었지만, 딱히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것보단 당장 저 자리에 들어가서 엎고 싶었다.
그가 충분히 지랄을 해도 될 상황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사람을 상대로 내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상황이니.
그녀들이 스스로도 업보를 알고 있다면, 자신이 들어가서 지랄하며 따져도 쟤네들은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들어가서 엎을까 생각했지만.
‘···아냐.’
이내 생각을 바꿨다. 고작 그거로는 부족했다.
그의 안의 분탕충의 기운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서 깽판을 치는 건 하수일 뿐이라고.
지금 깽판치면 그게 끝일 뿐이라고.
좀 더 계획적으로 엿을 먹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상황 자체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머리가 뜨거워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조금 식힐 필요가 있다고 이세원은 생각했다.
하여, 우선 먼저 술집 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웬만한 이야기는 다 들은 상황이었다.
휘이잉.
마침 찬바람이 불어오며 정신을 약간 맑게 했다.
덕분에 생각이 가속한다.
얻은 정보들을 조합하며 그 안에 있는 열쇠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은 마침 이런 데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녀석들의 내기 내용, 승부의 대가, 내기의 승리 조건 등.
여러 요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침몰한다.
슬슬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기를 몇 분, 어느새 이자카야 건물앞에 도착해 있었다.
꺄르륵, 깔깔.
여자와 남자가 서로 깔깔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야외로 나와 분산된다. 따스한 분위기의 주황등이 창문 밖으로 튀어나와 밤하늘에 지워진다.
그 쯤에 이세원은 웃음을 지었다.
“좋네.”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들은 모두 정리된 참이었다.
이세원은 유유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은별이 얼른 오기를 바라며.
*
후우, 유보람이 내뱉은 담배가 어지러이 흩어진다.
매캐한 향이 은별의 코로 들어가 괴롭혔다.
무려 6미리 짜리 담배다. 타르 함량이 6mg이나 들어가있는 담배의 연기니 독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은별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어우, 야 좀 비흡연자 앞에서는 안 피면 안 되냐.”
“내 맘임.”
물론 보람은 쥐뿔도 안 들을 뿐이다.
얘는 만나면 즐겁긴 한데 이 담배가 문제였다. 간접흡연이 더 안좋다던데.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바닥에 침을 뱉는 모습이 그냥 양아치같을 뿐이다.
은별은 그녀와 잠시 거리를 벌리고는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현재 시간이 메인 화면에 떠오른다.
9시 27분.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억!”
“왜, 왜 갑자기 발작임.”
“야, 큰일 났다! 세원 오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정신없이 떠들고 있다보니 어느새 15분이나 지나있었다.
이미 많이 늦은 상황.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특히 그게 남자 혼자 기다리게 하는 때라면.
“야! 나 이제 간다!”
“어, 어 그래. 이왕이면 패전보를 기대할게.”
이은별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술취한 거리를 지나 이자카야 안으로 들어간다.
구석진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 무표정하게 다물린 입술.
그녀는 최대한 숨을 가다듬고 테이블에 다가갔다.
“하아,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응, 많이 늦었네.”
이세원은 핸드폰을 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약간 숨이 차오른 이은별이 보였다.
딱 봐도 방금까지 떠들다 급히 달려온 모습.
허나 그걸 딱히 내색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숨찬 모습을 눈치 못 챈 듯 농담을 섞어 묻는다.
“배가 좀 많이 아팠나 봐?”
“네? 아 네, 제가 변비가 좀 있어서··· 헤헤.”
세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자리에 앉은 은별이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닭꼬치 다 떨어졌는데 뭐 먹을까요?”
물론 언제나 보던 생글생글한 웃음도 함께였다. 지금 이게 일부러 꼬시려고 하는 행동인 걸 깨달으니, 그저 가식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음···.”
세원은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가, 이내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그냥 오늘은 이만 쫑내자.”
잠시간의 정적.
“···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멈췄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 시선이 그에게 정지한다.
그가 뭐라고 한 건지 순간 머리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원은 그런 그녀를 위해 특별히 한 번 더 말해주었다.
“못 들었어? 오늘은 그만 끝내자고.”
살짝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채 말한다.
순간 은별은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감을 느꼈다.
세원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금 그가 하는 건 일종의 생리질이었다.
별것 아닌 걸로 신경질을 부리는 일.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뿐인 일이다.
실제로 기분이 나쁘긴 했으니 무표정을 꾸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 예? 왜요?”
은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왜이러는지 머리를 팽팽 굴리는 게 뻔히 보였다.
세원은 그걸 보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 이유 없는데.’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기분이 좀 좆같은 것 뿐일까.
이곳에 들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엿을 먹일지. 어떻게 하면 그 내기내용을 이용할 수 있을지.
그렇게 고민하여 나온 결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생각해보면, 내기 내용은 자신에게 꽤나 유리하게 설정이 되어있었다. 굳이 계획을 만들어가며 골탕을 먹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둘이 이야기 한 말의 맥락을 살펴보면, 내기의 내용은 대충 이러할 것이다.
올해 안에본인을 꼬셔서 고백을 하게 만들어라.
그렇게 하면 이은별의 승리, 안 하면 유보람의 승리.
실로 간단한 내기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면, 녀석들의 내기에는 반년이 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얘는 끊임없이 들이댈 테고.’
온갖 유혹을 하면서 자신에게 ‘고백’이라는 결과물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할리가 없었다.
왜냐? 이미 이세원은 승리의 조건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은별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들이댈 게 뻔했다.
이쯤에서 세원은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해 보니 개꿀 아닌가?’
이미 녀석이 자신을 기만하는 관계는 내기를 알아챈 시점에서 끝났다.
그렇다면 그냥 이 상황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똥줄 타는 거는 이은별 뿐이었으니.
일단 올해동안 이은별의 온갖 쇼를 보며 즐기면 될 뿐이다.
이름하야 기만의 기만이다.
세원은 당황하는 이은별을 보며 말했다.
“그냥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어.”
“지, 진짜 그게 다예요?”
이은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왜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지, 설마 진짜 몇 분 늦은 거 때문일까?
진짜 고작 그거로?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는 사과하기로 했다.
이럴 땐 빠른 사과가 답이었다.
“늦은 거 때문이라면 사과할게요··· 저도 이렇게 늦을 줄 몰랐어요.”
“에이, 그런 거 때문 아니니까 걱정마. 슬슬 집에 가야 돼서 그래.”
세원은 대충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일이 있기는 했다. 집에가서 야짤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이걸 그녀가 곧이곧대로 알아들을리가 없었다.
본래 ‘남자’의 언어는 수십수백 가지이니.
분명 무언가의 이유로 기분이 나빠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해석 할 게 뻔했다.
은별이 얼굴의 웃음기도 지우고 말했다.
“뭔지 몰라도 죄송해요.”
이세원은 속으로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게 갑질인가?’
당분간 이런 식으로 골려 먹는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이세원은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이만 오천원입니다.”
종업원이 주문기록을 보며 말한다.
25,000원이면 더치페이로 계산해서 12,500원 정도다.
그는 대충 지갑을 꺼내려 했다.
그러다가 현재 자신의 지갑 사정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
“음, 그러면 은별아.”
“예?”
세원은 은별에게 말했다.
눈웃음을 지으며 마치 즐겁다는 듯.
“그럼 술값 좀 계산 해줄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