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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14화 (14/125)

〈 14화 〉 14, 기만

* * *

“글쎄요~?”

이은별이 실실 웃으면서 그리 대답한다.

술집안에 은은한 조명이 비치며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야구모자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입맛을 다셨다.

‘에잉.’

감질맛 나는 대답이었다.

진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일 거라 생각했다.

오늘 하루 지켜본 바, 그녀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목적으로 물어봤는지 모를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 한다는 건··· 대답하기 싫다는 걸까.

무슨 꿍꿍이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이은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내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오빠 죄송해요. 잠깐 화장실좀 갔다올게요··· 헤헤.”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며 일어나는 그녀.

무슨 제스처인지는 바로 알았다.

“어어, 그래.”

깊이 물어볼 수는 없는 그런 주제였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배 아픈 건 어쩔 수 없지.

저런 건 얼른 보내주는 게 맞았다.

그녀는 약간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한병 정도 마시니 취기가 돌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딸랑.

투명한 출입문이 여닫히며 그 위에달린 종이 청명한 소리를 내었다. 이은별은 그대로 계단의 아레쪽으로 사라졌다. 직후 테이블에 침묵이 감돈다.

“······.”

홀짝.

나는 술을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후우.”

이은별, 그녀는 가게에서 나오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야외로 나가자 선선한 밤공기가 그녀를 맏이한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벗고 앞머리를 넘겼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취기가 오르는 정신을 식혔다.

현재 시간은 9시 12분. 이제 막 술집으로 들어가는 이와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이가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야! 오늘 지은이가 쏜덴다! 존나 시켜!”

“내가 언제 시발.”

“웨에에엑!”

“아 그니까 좀 적당히 마시라니까.”

술 취한 거리가 보였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떠들며 지나가고, 몇몇 인간들은 전봇대에 김치전을 부치기도 한다.

이은별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들었다. 익숙한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곧바로 통화하기 버튼을 누른다.

통화하는 이는 유보람.

뚜루루··· 딸깍.

전화기 신호음이 얼마 가지도 않아 유보람이 전화를 받았다.

마치 연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느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기 너머의 유보람이 물었다.

­야 어때, 잘 꼬셔지는 중이냐?

그녀는 이미 이은별이 이세원과 술을 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말에 이은별은 답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별 거 아닌듯한 말투로.

“어, 존나 쉽던데?”

그녀의 머리는 이미 5만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늦게 오는구먼.’

홀짝.

나는 술잔안의 소주를 홀짝거리며 생각했다.

이은별이 화장실로 사라진지 벌써 5분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아직 그림자도 안 비추고 있었다.

‘큰 거 보는 건가.’

큰 거면 확실히 그만큼 오래 걸릴만 한데··· 역시 불편하긴 했다.

물론 5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혼자 기다리기에는 충분히 뻘줌한 시간이었다.

술집에서 혼자라··· 무슨 재즈바도 아니고.

덕분에 근처 자리에서 여자들이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야 저기 봐 저기···.”

“오··· 쩐다.”

물론 ‘어 저 새끼 찐따인가? 왜 혼자지?’ 같은 동정섞인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감섞인 시선이었다.

이자카야의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사람을 꾸며주기 마련이다. 그게 어떤식으로 적용됐는지는 몰라도 나름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모양이었다.

“음···.”

하지만 호감섞인 시선도 다수가 되지 그저 뻘쭘할 뿐이었다. 몸 하나하나를 뜯어보는듯한 그 시선에 내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쓰였다.

오늘은 노출도 별로 없이 위에 가디건까지 걸쳤는데 흘끔거리는 시선이 떠나갈 줄 몰랐다.

‘존나 어색하군.’

결국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머리도 식힐 겸, 방광에 쌓인 노란 액체도 비워낼 겸 화장실에 갔다 올 생각이었다.

딸랑.

카운터 문이 청명하게 울리며 나를 밖으로 안내한다.

고작 문 하나 넘어갔을 뿐인대도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찬 공기가 나를 반긴다. 나는 피부 위로 전해져오는 찬 공기를 잠시 맞다가 생각했다.

‘아까 이은별이 아래쪽으로 갔으니···.’

화장실도 아래 계단에 있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헌데,

“···응?”

그곳에 화장실 따위는 없었다. 그냥 건물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만 있을 뿐이다.

즉 화장실은 위층 계단에 있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나는 의문이 들었다.

‘뭐지?’

분명 걔가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걸 봤는데.

설마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지금 딱히 술에 취한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래쪽으로 사라져가는 파란 야구모자를 봤었었다.

“······?”

살짝 위화감을 느낀 나는 잠시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방광은 아직 참을만 했고, 슬슬 밤바람을 쐐며 머리도 좀 식히고 싶었으니까.

그러면서 겸사겸사 이은별을 찾아보는 것이다.

뭐 못 찾으면 말고, 좀 돌다가 돌아가보면 이은별도 돌아와 있을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무작정 걷고 있을 때였다.

이은별의 흔적은 생각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야, 그래서 어떻게 꼬신건데? 썰 좀 풀어봐.”

“별 거 안했어.”

길 모퉁이 뒤에서, 익숙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린다.

두 명분의 목소리.

“그냥 실실 웃어주고, 리액션 해주니까 반응이 오던데?”

“진짜 그게 다라고? 구라까지마 진짜.”

웃음기 섞인 두 목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더 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이세원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모퉁이 뒤를 쳐다보았다.

모퉁이 뒤엔 이은별이 어떤 여자애랑 대화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유보람이었다. 반 애들은 아직 잘 모르지만 쟤는 알고 있었다.

반에서 맨날 5:5 내전을 외쳐대던 녀석이기 때문이다.

‘화장실 간다며?’

이상함을 느낀 나는 그대로 모퉁이 뒤에 붙었다.

왜 화장실 간다는 애가 지금 여기 있는건지, 옆에 친구는 갑자기 어디서 나온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 둘은 내 존재는 꿈도 못 꾼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진짜라니까? 마지막즘에 오빠가 술집엔 왜 데려왔냐고 뭔가 호감섞인 뉘앙스로 나한테 묻는데··· 캬, 느낌이 딱 오더라.”

“아니 뭔··· 사람이 이틀만에 가드가 풀려.”

“히히, 오만 원이나 준비해놔라.”

이은별이 실실웃으며 말하고, 유보람이 투덜대듯 얘기한다.

‘5만 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말들은 무엇이고 갑자기 5만원은 무슨 이야기인가.

반대편으로 귀를 좀 더 기울였다.

“세원 선배 알고 보니 쉬운 남자였네. 나는 같이 술 먹는데까지만 해도 4개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헹, 내 매력이 그만큼 엄청난거지.”

“지랄.”

그 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중간부터 들어서 전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맥락은 이해되었다.

둘이 나를 상대로 뭔가 내기를 한 모양이었다.

이은별이 나를 꼬시냐 마냐로 돈까지 걸려있었다.

나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저것들이···.’

나를 무슨 챌린지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그래도 아직 고백받은 건 아니잖아. 심사임당은 아직 못 줘.”

“어차피 내 거 같은데?”

"게임은 끝까지 봐야지 시발아. 아직 올해 안 지났어.”

유보람이 욕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쌩돈 오만원이 날아간다 생각하니 슬픈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다른 걸 물었다.

“···그래서, 고백받으면 어떻게 할 거냐?”

“응?”

“고백받으면 사귈 거냐고. 솔직히 세원 선배 잘생겼잖아. 충분히 사귈만 한데.”

그 주제에 나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게?’

솔직히 내기의 대상이 된 건 기분이 꽤나 나빴다.

기만을 당한 거 같아서 인상이 찌푸려질 뿐이다.

하지만 사귈 수 있게 된다면?

다시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솔직히 이은별 정도의 여자라면, 과거엔 말도 붙이기 힘든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고백하는 걸로 사귈 수 있다니.

비록 사귀는 거에 내기라는 구린 구석이 있더라도 나에겐 이득이 아닐까.

무엇보다 여기는 남녀의 성욕이 반전된 세상이다.

먼저 잠자리까지 가자고 유혹하는 것도 이은별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섹스까지도 금방 진도를 뺄 수 있지 않을까?

‘···! 섹스!’

단순히 고백하는 것 만으로 섹스까지 하이패스라니!

이름하여 따먹힘 당하는 것이다! 섹스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숟가락을 떠먹여 주는 것을 넘어 밥상까지 차려주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사귈 의향이 있다면 고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음··· 아니 고백은 거절할 거 같은데.”

“어? 왜?”

‘왜 시발!’

나는 순간 소리내어 외칠 뻔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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