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2, 저녁
* * *
디지털로 그림을 그릴 땐, 꽤나 여러가지 기능이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펜의 타입 변경부터 시작해서 지우개, 펜의 선명도와 굵기 조절, 색상 조절, 색 채우기 그리고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되돌리기 기능까지.
정말 여러가지 기능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 레이어 기능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
레이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먼 그려진 그림에 새로운 투명 캔버스를 덮는 거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게 하여 기존의 그려진 그림과 새로 그릴 그림을 분리 해놓는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로 합쳐서 보는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들으면 잘 이해도 안 되고 이게 뭐가 중요한가 생각이 들 수도 있을텐데, 그림쟁이에겐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기능이었다.
그림의 부분부분을 나누어서 구분하면 나중에 수정하고 지울 때 상당히 편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레이어 하나로 그림작업을 하다가 수정할 부분이 하나 생겼다.
푸른하늘을 그리는데 이상하게 구름 모양이 맘에 안 든다거나, 선을 잘못그렸는데 되돌리기가 안 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지우개로 손이 향하게 될 것이다.
구름의 일정 부분만을 지워서 수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우개를 휘둘렀을 땐 그 뒤에 배경까지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
지우개가 구름과 함께 뒷 배경의 하늘까지 한 그림으로 인식해버린 탓이었다.
레이어를 나누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결과, 나는 구름하나를 수정하기 위해 뒷 배경의 일부분을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방지해주는 것이 바로 레이어 나누기였다.
레이어 1에는 파릇파릇한 하늘을, 레이어 2에는 그 하늘을 꾸며줄 구름을 그려넣는다.
그렇게 하면 만약 마음에 안 드는 구름이 생겼어도 구름만 지워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우개가 두 개의 레이어를 각각 구분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런식으로 레이어를 세분화해서 나누면 수정을 하기가 몇십배는 쉬워졌다.
그 뿐이랴, 레이어 표시/비표시 기능을 사용해 불필요한 그림을 숨길수도 있었다. 대충 그려낸 러프라던가, 구도를 잡기 위해 표시해둔 선이라던가.
전부 레이어로 구분해두면 수정하기 쉬워진다.
레이어 나누기가 최고다.
‘과거에는 무조건 캔버스가 하나였을텐데.’
애초에 디지털 시대가 아니니까, 지금같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리가 없었다.
레이어 나누기도, 되돌리기 기능도, 색 채워 넣기도 전부 수동으로 해야했을 것이다.
“오우, 시이발.”
생각하자 자연스레 욕이 튀어나왔다.
과거에 안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에게 존경을.
······자, 이제 헛소리는 이쯤하고.
아무튼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는 그림의 주제는 역강간물─원래 내 기준으로 치면 그냥 레이프물이 맞는데 그냥 로마법에 맞게 부르겠다─.
몇 시간전에 신청자가 신청했던 그림이었다.
구도는 으슥한 골목길에 남자가 여자의 강제로 옷을 벗기는 느낌으로··· 저쪽 세상에서도 조금은 그려본 구도였다.
이곳에 오고나서 그리던게 개똥같은거 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그래도 내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의 투샷이군.”
이유는 그림에 여자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여태껏 얼마나 거지같은 그림만 그려왔던가.
잔인한 그림에 남자 원샷만 그려대지 않았던가.
여기 떨어진지 6, 7일 정도 밖에 안 지났지만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그림이었다.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마치 사막속에서 자그마한 오아시스를 발견해낸 기분이랄까.
덕분에 작업속도가 꽤나 빨랐다.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지 6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이미 대부분의 작업이 끝나있었다.
러프에서 선따기로, 선따기에서 채색으로.
이제는 명암만 어느정도 넣어주고 디테일만 조금 살려주면 완성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 여자그림의 포커스가 좀 강하긴 하지만···.
‘뭐 이해해주겠지.’
어쨌든 나는 신청자가 바라는데로 그려주었다. 신청자가 알아서 만족해 주길 바랐다.
‘오늘은 이쯤하자.’
그리 생각하며 타블릿 펜을 놓았다.
오늘은 이쯤하면 됐다.
이미 집중력을 6시간이나 쏟았고, 이미 새벽이 넘어 있었으니. 심지어 내일은 또 다시 대학을 가야했다.
“끄으으···.”
기지개를 크게 한 번 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은 내일 쯤에 완성될 것 처럼 보였다. 이제 몇 작업 안 남았으니 좀만 시간을 투자하면 완성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럼 내일 마저 완성하는 걸로 하고··· 나는 내일 수업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이세원’의 기억.
(이세원): 오후 1시에 전공수업 하나 있음.
“···오.”
개꿀이었다.
웬일로 9시 수업이 아니라니.
지금까지 아침 8시쯤에 쳐 일어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행히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되는 것이다.
심지어 더 놀라운 점은.
내일이 바로 금요일이었다!
내일만 학교를 갔다오면 집에서 개백수처럼 뒹굴거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뻤던 나는 잠시 눈물마저 흘릴 뻔 했다.
“크흡.”
이 얼마나 힘든 일주일이었나.
갑자기 인터넷은 게이짤로 넘쳐나고 나도 덩달아 남캐 알몸이나 그리고 있고, 예정에 있지도 않은 학교까지 가서 정신적 학대까지 당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내일만 버티면 적어도 이틀정도는 개백수처럼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섹스지. 섹스가 뭐 별개 있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힘든 일상에 이 정도 소소한 즐거움만 있어도 섹스였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었다.
“zzz···.”
*
아침이 밝았다.
12시쯤에 맞춰놓은 알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린다.
나는 번쩍 눈을 뜨며 일어났다.
“얼리버드 기상!”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본래 세상은 자기를 기준으로 돌아가니 내겐 아침이 맞았다.
오랜만에 푹 자서 그런지 정신머리가 꽤나 맑았다.
좋다. 이 상태라면 학교에서 골골대다가 집 와서 퍼질러 자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대충 밥을 먹고 가볍게 씻은 다음에 밖으로 나간다.
길거리는 적당히 한산했다. 모두들 등교하거나 출근을 한 탓이었다.
덕분에 지하철도 꽤나 넉넉했다.
원래는 사람으로 가득차서 좌석 얻어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지금은 그냥 아무데나 가서 앉아도 될 정도로 좌석이 많았다.
출근 시간을 피한 보상이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았다.
“후···.”
그래 이 느낌이지.
양옆이 비어서 편히 앉을 수 있는 이 기분.
출근시간 때는 존나 앞 양옆으로 사람이 부대껴서 앉아있는 기분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다리를 약간 벌렸다. 소위 불리는 쩍벌남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수준.
자리가 넉넉하기에 할 수 있는 민폐였다.
그러다 순간, 어디서 시선이 느껴진다.
“······?”
시선이 느껴지는 건 앞쪽이었다.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가 내게로 뻔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주로 내 하반신 쪽으로.
‘음.’
반바지 입었는데. 딱 허벅지 절반정도 보일 적당한 길이의 반바지.
근데 이것도 어딘가 꼴림포인트가 있나보다. 둘의 눈빛이 꽤나 강렬했다.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챌 정도로 말이다.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솔직히 쳐다보는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살짝 놀래키기라도 해볼겸 나는 발을 살짝 놀려보았다.
쾅!
“······!”
“···콜록! 콜록!”
힘껏 땅을 밟자 흠칫하며 시선을 돌리는 여자애들.
그 모습이 왠지모르게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내 현재 외모가 괜찮긴 한 모양이었다. 사실 출근길에 이런식으로 쳐다봤던 여자가 쟤네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출근길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은 거의 매번 있었다.
확실히 내 외모가 괜찮긴 하나보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는거겠지.
‘근데 왜 친구는 없지···?’
그런 의문을 떠올리자 불쑥 튀어나오는 ‘이세원’의 기억.
(이세원): 내가 다 쳐냄
자랑이다 시발.
덕분에 내가 혼자 존나 뻘쭘하게 있는다. 고맙다 새끼야.
심지어 이미 무리가 다 형성되서 끼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에 ‘이세원’과 비슷하게 나도 다수에게 쪼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먼저 다가가기는 꺼려졌다.
결국 계속 쓸쓸하게 대학생활을 보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머릿속에서 누구 한 명이 스쳐지나갔다.
이은별.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였으나 특유의 친화력으로 벌써 말도 놓고 연락처까지 교환했던 여자.
내가 대학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여자애였다.
‘걔는 무슨 생각일까.’
아직도 의문이 드는 나였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패턴이었으니.
혹시 그냥 외모때문에 다가온건가도 싶지만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나보다 잘생긴 사람들도 꽤나 많았으니 말이다.
애초에 걔 정도 얼굴이면 웬만한 남자들을 후려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생각을 하고 있자,
[이번역은 ooo역──]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어차피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어쨌든 대학에 아는 사람 한 명이 생겼다.
나는 일단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근데 오늘도 있으려나.’
아무래도 다른 과다 보니까 만나는게 쉽진 않을 거 같았다.
심지어 오늘 나는 오후 수업이라 늦게 등교했고. 아무래도 오늘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어? 오빠!”
대학에 들어가자 누가 나를 부른다.
이은별. 아까까지 생각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녀가 남색빛의 머리를 흔들거리며 뛰어왔다.
“지금 오신거에요?”
“아, 어···.”
“오후 수업인가 보네요. 저는 이제 막 수업 하나 끝내고 집 가는 중이에요.”
발견하자마자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 생글생글 웃는 그 모습이 못내 아름다웠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전수업이었던 모양. 마침 딱 집에 가는 길에 나를 발견해서 말을 건 모양이었다.
이렇게 잠깐 만난다는 게 약간 아쉬웠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오늘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고.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잘 가라고 인사하고 헤어지려던 찰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빠 수업 하나만 들으면 끝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어, 그렇지?”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집에 가서 그림 마무리해야 했지만 그건 딱히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질문의 의도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럼···.”
이은별,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러면 저녁에 저랑 같이 술이라도 드실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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