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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9화 (9/125)

〈 9화 〉 9, 돈이 큰일이다

* * *

살다보면, 가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내가 알던 상식이 뒤바뀐 다거나, 갑자기 인터넷이 게이짤로 뒤덮이거나, 아니면 갑자기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처음 보는 여자애가 사근사근 대한다거나.

그런 게 그런 예상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다.

사람의 이성적인 머리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상황들.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

“저희 뭐 먹을까요?”

이은별, 제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던 그녀가 앞서가며 말했다.

통통. 발걸음이 경쾌하게 울릴때마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그녀는 체육교육과를 다니는 2학년 학생이라고 한다.

이 학교에 몇 안 되는 높은 등급의 과였다.

내신과 실기가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체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보단 아이들을 가르키는 게 좋아서 그냥 체육교육과로 들어왔다고 한다.

역시 운동과 관련된 과라 그런지 몸이 상당히 좋았다.

단순히 비율만 좋은 게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몸 곳곳에서 잘 단련된 근육이 엿보였다.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도 않은 근육들.

그 근육들이 딱 붙는 레깅스덕분에 더욱 강조되어 걸을때마다 엉덩이가 탱탱하게 움직였다.

‘후··· 씨발.’

안 그러고 싶은데 자꾸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한다.

존나 블랙홀 같은 매력이었다.

덕분에 죄악감과 황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계속 봐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니지 시발.’

생각해보니 그냥 봐도 상관없지 않을까?

여기 남녀역전 세상이잖아. 나도 여자가 내 몸 보고 꼴려하면 은근히 기분 좋을 거 같은데.

이쪽 세상 여자도 비슷한 마음 아닐까?

‘크르르···.’

순간 내 마음속의 짐승새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마음 놓고 편하게 보라고 악마의 속삭임을 내뱉고 있었다.

허나 나는 가까스로 욕망을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사이였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예의는 가질 수 있었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선배? 아, 어차피 같은 학년인데 그냥 오빠라고 부를까요?”

잠시 멍하니 있자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은근 슬쩍 호칭도 오빠로 변해 있었다. 정말 무서운 친화력이었다.

저번의 만난 편의점 알바가 그냥저냥한 인싸라면, 눈 앞의 여자는 인싸중의 인싸.

씹인싸가 틀림없었다.

‘진짜 그냥 친해지려고 온 건가···.’

여전히 머릿속에선 그녀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대충 넘기기로 했다.

그래. 인간관계가 꼭 의도가 있어야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지금은 우선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예쁜 여자랑 밥 먹는 이 상황.

“음··· 그러게. 근처에 맛있는데 있을까?”

나는 이 근처에 있는 식당을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학교를 잘 안나오다 보니 근처 건물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난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라 어디를 가도 상관 없었다. 소 간, 곱, 막창, 아니면 대차게 매운 음식까지.

내 위장은 뭐든 감당 가능하다.

그래서 이은별에게 선택권을 맡겼다.

뭐 알아서 잘 골라주겠지··· 하면서 말이다.

“아 그러면 제가 안내할게요. 마침 남자애들이 좋아할만한 음식점을 알아요.”

그리고 그 결정을 얼마 안 가서 후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서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점이 뭔지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르보나라 전문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음식점 안.

나는 메뉴판을 들고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허여멀건하고 귀염뽀짝한게 씹게이 새끼들이나 먹을 것 같은 음식들이다.

아니, 생각해보니 여긴 씹게이 새끼들이 대부분이지.

‘데뎃···?’

“어때요? 여기가 파스타로 유명한 곳이거든요. TV에도 나온 적 있고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자리까지 잡은 후였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이은별이 만족하냐는 듯이 묻고 있었다.

이미 외통수인 상황.

덕분에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하··· 응 괜찮네.”

그래도 일단 왔으니 주문을 해야했다. 나는 메뉴판을 열어 뭐가 있는지 보았다.

대충 쳐다보다가 토마토 스파게티라도 시키면 되겠지.

헌데···.

‘응?’

없었다!

놀랍게도 파스타의 가장 근본인 토마토 스파게티가 없었다. 놀랄 노자였다.

어떻게 이렇게 근본이 없을 수가.

까르보나라 전문집은 자기 정체성에 맞게 크림 관련 파스타밖에 없었다.

양송이 수프 파스타, 까르보나라, 해물크림 파스타···.

아니, 어떤 의미에선 이것도 근본인가.

선택과 집중이 잘못되었을 뿐이지.

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가장 기본인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시키기로 했다. 이게 가장 저렴했으니까.

“음식 나왔습니다.”

파스타는 꽤나 빨리 나왔다. 주문하고 몇 분 정도 기다리니 따끈따끈한 파스타가 눈 앞에 대령되어 있었다.

전문 음식점 같은 경우엔 파스타를 미리 삶아서 보관한다던데 여기도 그런 방식인 듯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면을 조금집어서 먹어보았다.

호로록. 파슬리가 묻은 하얀색의 면이 입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나는 천천히 맛을 음미해보았다.

‘···음.’

맹맹하군. 과장 조금 더 보태서 아무 맛이 없는 수준이다.

과연 이게 전문집인가··· 이게 그 고급스러운 파스타인가.

나로서는 이해못할 맛이었다.

“흐음~.”

하지만 내 앞의 이은별은 맛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자기가 먹고 싶어서 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맛있네요. 히히 사실 제가 파스타를 좋아하는데 자주 오진 못했거든요. 아무래도 여자애들이랑 자주 놀다 보니까 오기 좀 그렇잖아요.”

진짜였네 시발. 뒤통수가 얼얼하다.

“그니까 가끔 같이 여기 오는 거 어때요? 서로 이야기하고 좋잖아요.”

하지만 그런 뒤통수는 바로 다음 말에서 치유되었다.

물 흐르듯 들어오는 에프터 신청.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는 생글생글한 눈. 조용하게 올라간 입꼬리까지.

반대 세상이었으면 남자 여럿 울렸을 여우가 여기 있었다.

너무 강한 인싸력에 나는 어버버하며 대답했다.

“어어··· 그래.”

“헤헤 넵.”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파스타를 먹었다.

쪼로롭. 파스타면이 입술을 타고 입 안으로 들어간다.

외모가 예뻐서 그런지 그것마저 화보처럼 보였다.

나는 살짝 어색해하면서 밥을 먹었다. 아무리 남녀 역전 세상이라도 여자랑 오래 있다보면 저절로 굳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나였다.

잠깐잠깐 대화하는 것은 괜찮은데 이렇게 오랜 시간 있다보면 어색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가끔씩 대화가 끊기는데 그럴 때마다 은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그러고보니 오빠는 왜 재수하셨어요?”

“아, 원래 미대를 준비했었는데 떨어졌거든.”

“아하···.”

가끔 어두운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오! 그러면 그림 잘 그리시겠네요. 저도 그림 보는 거 좋아하는데.”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리액션을 해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 편했다.

반응해주는 모습이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나. 은별은 사람을 편안하게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면 좀 홀짝이다가 대화 몇 번 하니 어느새 수업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잠시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다가 이내 대학 안에서 헤어졌다.

“나중에 또 봬요. 오빠.”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연락처까지 교환해 있었다.

1시간.

겨우 1시간 만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터놓고 밥을 먹었으며 연락처까지 교환한 것이다.

“존나 뭐지.”

아직까지 의문은 들었으나 기분은 좋았다.

‘혹시 쟤가 나 좋아하나?’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뭐 생판 처음 본 사람한테 그 정도 감정까진 안 들겠지만.

어쨌든 호감정도의 감정은 있단 것은 알 수 있었다.

혹시 외모때문인가? 역시 잘생겨져서 그런가.

고맙다 ‘이세원’ 너가 해놓은 수많은 뻘짓 중에 이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너가 남긴 로션과 스킨과 수분크림의 의지는 내가 이어받아서 사용해줄 테니 걱정말아라.

“흐흠~”

오랜만에 기분좋은 발걸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 이 상태라면 뒤에 찾아올 강의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제통계학 오거라!

너의 그 개좆같은 수치통계도 충분히 버텨주마.

······허나.

생각해 보니 내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띠링!

붕 뜬 기분 속에서 무섭게 알리는 알림음.

순간 파스타집에서 사용한 7,900원이 생각났다.

그리고 5일 동안 사용했던 자잘한 돈들 또한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은행 계좌를 확인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잔혹한 절망을 마주하기엔 내가 너무 나약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결국 확인해야만 하는 일··· 그렇다면 차라리 기분이 high 해진 지금 확인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어느정도의 정신적 데미지는 상쇄해 줄 것이다.

나는 마치 심연을 마주 본다는 기분으로 은행 앱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세원 고객님. 방금 ○○카드로 결제금액 5,500원이 빠져나갔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세원 고객님. 방금 ○○카드로 결제금액 1,200원이 빠져나갔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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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원 고객님. 방금 ○○카드로 결제금액 7,900원이 빠져나갔음을 알려드립니다.]

5일 동안 쌓아놓았던 알림과 그 위에 떠 있는 잔액이 보인다.

[62,400₩]

절망스러운 숫자.

‘크흡···!’

이제는 만 원대까지 내려간 처참한 내 통장 잔고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여기가 집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다시 한 번 소리 지를 뻔 했다.

저 돈으로 얼마를 살아갈 수 있을까··· 식사비, 교통비, 월세비 등 수많은 걱정거리가 내 마음을 짓눌렀다.

저기서 당장 급하지 않은 월세비를 제외해도 식사비와 교통비가 남았다.

아마 일주일 뒤에는 다 떨어지지 않을까.

일주일··· 그 뒤에는 굶어뒤질 내가 그려졌다.

“돈··· 돈이 존나 필요해······.”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했다.

다행히 돈 벌 방법은 있었다.

시기가 좀 이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슬슬 야짤 의뢰를 받아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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