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8, 이은별
* * *
“···누구야?”
경제학과 강의실에서 나온 뒤, 이은별은 제 옆의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제 5:5내전에서 이겨서 얻어낸 음료수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사실 5:5 룰 내전은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열리는 정기적인 이벤트라 이은별은 음료수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서로 돌고도는 음료수였으니.
그것보다 궁금한 건 이거였다.
“···뭐가?”
제 옆의 친구, 유보람이 다시 되물었다. 질문이 너무 짧아서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
“니네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 남자 말이야.”
그래서 이은별은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물었다.
채육교육과 학생인 그녀는 경제학과에 꽤나 자주 놀러가는 편이었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유보람이 경제학과에 입학하기도 했었고, 마침 강의를 듣는 시간대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과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이제는 어느새 제 2의 과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녀 특유의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덕분에 과에 녹아들기도 쉬웠다. 하도 자주 놀러가다 보니 경제학과 학생들의 얼굴도 모두 알고 있었고 말이다.
“왠지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그래서 더욱 의문이 들었다. 저런 남성은 전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크써클이 진하게 내려온 시니컬한 눈매, 정돈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삐죽 튀어나온 머리.
그리고 그 전체를 잘 조합해주는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한 번 보면 잘 잊지 못할 거 같은 외모인데 이상하게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하···.”
그 때 유보람이 누굴 말하는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이세원 선배 말하는 거구나?”
“엉, 누구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사람 이름은 모르지만, 아마 말의 맥락상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 유보람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보람은 한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더니 이윽고 적절한 표현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음··· 전설의 포켓몬 같은 사람이야.”
그렇게 나온 표현은 조금 뜬금 없었다.
“엉?”
“말 그대로야. 보기가 존나게 어려워. 학교는 잘 안 나오고, 왔어도 강의 끝나면 바로 집가고. 거기다가 같이 이야기해본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마주치기가 힘들만 하지.”
대충 이해되었다. 그니까 애초에 상호작용할 상황이 없었으니 마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어쩌다가 마주친 거고.
“그래도 외모는 꽤 잘생긴 편이니까 전설의 포켓몬. 꽤 레어한게 잘 어울리지 않아?”
“그렇긴 하네.”
확실히 잘생기긴 했었다. 막 미친 듯이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잠시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관심 있냐?”
갑자기 옆의 이보람이 물었다.
“뭣?”
내가 왜? 처음 본 사람인데?
이은별은 황당한 마음에 입을 열려고 했다.
“근데 포기해라.”
하지만 이보람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저 선배한테 접근 했던 사람이 몇 명인데. 원래 학년 초에는 얼굴 보고 접근하는 선배들 많잖아. 어떻게든 한 번 먹어보려고 친절하게 과제 대신 해주겠다면서 접근하기도 하고, 밥 사줄테니까 같이 밥먹자는 선배도 있고.”
실제로 그랬다. 아직 사회에 찌들지 않은 신입생들은 좋은 먹잇감들이었으니.
음습한 욕망을 숨긴 채 다가가는 선배들이 많았다.
실제로 당하는 남자들도 꽤 있었고, 설령 잠자리까진 가지 못하더라도 잘생긴 후배들이랑 안면정도는 틀 수 있으니 선배들은 망설임없이 들이댔다.
이세원도 그 목표 중 하나였고 말이다.
“근데 그 선배는 다 거절하더라. 약속 있다면서, 저 바쁘다면서 인기 있던 선배들 다 쳐내버리는데 너라고 가능하겠냐?”
지금의 이세원이 들으면 왜 안 따먹혔냐고 대성통곡할 이야기지만, 당시의 ‘이세원’은 그랬다. 낯을 가리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욕망이 느껴졌으니 꺼려졌던 것이다.
이보람이 낄낄 웃으면서 하는 말에 그녀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야 씨! 내가 왜 못해!”
자기가 직접 말하기는 좀 웃기긴 하지만, 이은별 자신은 꽤나 인기 있는 편이었다.
밝고 활발한 성격과 상당히 예쁜 얼굴, 그리고 비율좋은 몸매까지. 마음만 먹으면 솔직히 웬만한 남자들은 다 꼬실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고백도 여러번 받아봤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보람은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푸하하! 야 그럼 내기 할래?”
마치 도발처럼 묻는 그녀의 말에 이은별은 슬슬 오기가 생겼다.
“콜! 야 내기 해 내기. 내가 그 오빠한테 고백받는 걸로.”
“해봐라 미친년아. 난 그럼 못 받는다에 5만 원 건다.”
“그럼 난 내가 해낸다에 10만원 건다!”
도발적으로 지른 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기다려라 이보람 개년아. 5만 원은 내가 무조건 뜯어준다.
“기한은?”
“이번 년도 안에.”
“좋아. 10만 원 준비해놔라.”
그렇게, 이세원은 모르는 내기가 성사되었다.
*
가끔 수업을 듣다보면, 정신이 다른 데로 날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게 지루한 수업일 때면 더더욱 말이다.
지금 내가 그랬다.
‘아, 섹스하고 싶다.’
섹스가 마렵다. 존나 농밀하고 끈적한 떡방아가 하고 싶었다. 아니 요즘 욕구해소를 못 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야한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름 남녀역전 세상인데 주변에 꼬이는 여자는 없고, 인터넷에는 남자새끼들만 넘쳐난다.
참 비탄스러운 세상인 것이다.
시발 ‘이세원’이 새끼는 왜 여자사람 친구가 없는 거지?
기억을 뒤져보니까 대쉬도 은근 많이 받았던데 지금은 친구 한 명 없다니.
하여간 도움이 되지 않는 새끼였다.
‘진짜 자급자딸 해야하나···.’
그렇게 잡생각을 굴리고 있자 수업이 끝났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이 쿨하게 강의실에서 나가고, 학생들이 대충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첫 수업이 끝났으니 이제 공강시간이었다.
그래 공강.
강의를 듣다보면 수업과 수업 사이에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예를 들어 하루에 강의가 두 개가 있다고 치자. 그럼 하나는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진행하고, 하나는 12시부터 14시가지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보다시피 중간에 1시간 정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바로 수업을 이어가면 피곤하기도 하니, 잠깐 쉴 타임을 줄 겸 아예 한 두 시간 정도 여유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다른 학생들은 밥을 먹으로 가거나 했다.
기력도 채울 겸 수다도 떨 겸 해서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처럼 ‘평범’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녀석에게 공강시간이란 그저 고역일 뿐이었다.
혼자 밥을 먹기에는 뻘쭘하고, 그렇다고 집을 가서 쉬기에도 애매한 시간.
할 것도 없는데 한 시간이라는 하루의 귀중한 분량이 붕 떠버리는 것이다.
단무지는 빼주세요···.
한 복학생의 처량한 일화가 생각나는 내 모습이었다.
“하, 걍 핸드폰이나 해야지.”
학생들이 다 나가고, 나는 자리에서 터덜터덜 일어났다. 어쨌든 시간을 떼우긴 해야하는 일이었다.
일단 밥은 패스하기로 했다. 딱히 배도 안 고프고 애초에 11시 식사라는 건 나에게 너무 빨랐다.
그럴바엔 그냥 2시까지 굶고 집가서 먹지.
씹창난 나의 하루 패턴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적당히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울 생각이다. 다행히 이 대학엔 텅빈 벤치가 많았다. 그곳엔 나처럼 친구없는 사람들이 자주 모였기에 편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목표를 세운 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내 근처로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잠깐 보았던 아디다스 레깅스를 입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잠깐 마주친 적 있죠? 저는 옆에 체육교육과 다니는 2학년 이은별이라고 해요 헤헤.”
내가 당황하고 있자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순간 우리가 이미 친구인 줄 알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일단 똑같이 인사하기는 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가오는데 가만히 있기는 뭐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리는 계속 의문을 자아내고 있었다.
‘뭐지?’
딱 봐도 인싸같아 보이는데. 존나 이게 인싸들의 사교성인가?
따로 안면을 튼 적도 없는데 갑자기 왜이리 활발하게 인사하지.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저··· 근데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나는 물었다.
나 이세원. 일단 남이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 인간이었다. 병신같은 성격인 것은 알지만, 태생이 그런 인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아침에 뻔히 쳐다보던 게 들켰나?
“에이, 안면 트는데 무슨 일이 필요한가요.”
허나 반응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았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잇는다.
“제가 경제학과를 자주 드나들어서 거기 애들은 잘 아는데, 그쪽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인사드렸어요. 제가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해서.”
순간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야구모자 안의 눈고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나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와.’
인싸다. 진정한 의미의 인싸가 여기 있었다.
낯선 사람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사람이 진짜 앞에 있었다.
“오빠 지금 할 일 없으시죠?”
그렇게 감탄하는 와중에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저랑 같이 밥이라도 드실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