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6, 나름의 타협점
* * *
“──자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입니다. 모두들 집에가서 오늘 중요하다고 했던 내용들 복습하시길 바래요. 그리고··· 이세원학생?”
“···네?”
“앞으로는 자주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하······ 네.”
교수님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강의실 밖으로 향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발걸음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행히 수업 중간쯤에 애들의 수군거림은 멈췄지만, 이미 내 정신력은 탈탈 털린 뒤였다.
건물 밖으로 나가 후우, 한숨을 한 번 내쉰다.
‘후··· 힘들었다.’
교실 안에 있으면서 얼마나 불편했는지···.
덕분에 교수님이 뭐라 떠들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시경제학이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나로서는 외계어나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좋았던 점은 교실 안에 여자가 많았던 점일까.
경제학과의 남녀성비 7:3이 그대로 역전되서 여자7 : 남자3의 성비를 이루고 있었다. 이건 좋은 소식이다.
대가리가 반전되긴 했어도 겉모습은 어여쁜 여성들이었으니. 덕분에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수업을 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학과긴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빡치네.’
‘이세원’ 이 새끼는 대체 왜 경제학과를 선택한 거지?
시각디자인학과 같은, 자기 전공이랑 비슷한 과도 있는데 왜 하필 경제학과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등급컷이 안 되었던 건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그래··· 뭐 어쩌겠냐.”
이미 2학년 1학기도 반쯤 지나서 전과도 불가능한 상황.
불평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뭐 어쩌겠어. 일단은 계속 다녀봐야지.
나는 어쩔 수 없는 것에 나름 수긍하고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수업이 한 개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수업이 3시간짜리였긴 하지만, 어쨌든 끝난 지금은 여유롭게 집을 갈 수 있었다.
‘일단은 좀 자자.’
어제 못 다한 잠이 몰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은 좀 자면서 정신력을 충전할 필요가 있었다.
터벅터벅 지하철로 향한다.
20분 정도 전철을 타니 집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매트리스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진다.
몸이 노곤해지니 눈은 쉽게 감겼다.
나는 그렇게 잠에 들었다.
“···zzz”
*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핸드폰으로 손이 향한다. 나는 전원을 키고 현재 시각을 확인해보았다.
[16 : 35]
오후 4시 32분.
밤에 잠들기도, 그렇다고 아예 밤낮을 바꾸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잠도 4시간 정도 자서 적당히 안 피곤하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
좋다. 오늘도 알차게 하루를 조지고 시작하는 군.
아무래도 오늘도 새벽 6시에 자게 될 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스노우볼이 굴러가 내일 하루도 높은 확률로 조지겠지.
허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거에 굴할 내가 아니다.한 달에도 몇 번씩 생활패턴을 바꿔 살아갔던 나였다.
내일 몰려올 피곤함은 내일의 나에게 미룰 줄 알았다.
응? 피곤하다고 미래의 나?
‘응 어쩌라고~ 지금 나는 존나 상쾌해~.’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꼬르르륵.
마침 배에서 배꼽시계가 울린다. 밥을 넣어달라는 신호였다. 나는 뭐 먹을 게 있나 잠시 집을 뒤졌다.
‘안X탕면 1봉지, 맥주 한 캔, 먹다남은 버터 오징어···.’
밥은 없고, 반찬도 별로 안 보였다. 한 마디로 먹을 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자취생··· 집안 살림은 제 알빠 아닌 존재였다. 그러니까 집에 먹을 게 없지.
‘어쩌지···.’
라면을 먹기는 싫고, 그렇다고 장을 봐서 요리를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배달음식을 시켜먹기로 했다.
요즘엔 배달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집에서 뭘 시켜도 금방금방 배송된다.
덕분에 굳이 귀찮게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짱깨가 마렵군.’
배달음식 하면 떠오르는 일 순위 음식 짜장면.
나는 오랜만에 짜장면을 시켜먹기로 했다. 대충 아무 음식점이나 골라 들어가서 짜장면 곱빼기 하나 군만두 하나를 주문한다. 여기에 배달비까지 포함시키니 만원은 금방 넘어갔다. 남녀역전 세상이라도 물가는 여전히 비싼 듯 했다.
그래도 일단은 시킨다. 배고프니까.
배달은 꽤나 신속했다.
“배달 왔습니다··· 어?”
“감사합니다.”
대충 머리를 정돈하곤 재빨리 음식을 찾아 현관문을 닫는다. 배달을 왔던 여성 배달원이 잠시 당황하는게 보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도 현관문을 열었더니 속옷 차림의 여자가 나온다면 충분히 당황할 테니까.
남역 세계에선 이것 또한 가벼운 해프닝일 뿐이다.
그것보단 짱깨가 중요하다.
나는 얼른 랩을 뜯고 짜장면을 맛보았다.
잘 익은 양파와 기름에 볶인 춘장이 조화를 이루며 훌륭한 단짠단짠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걸 감싸듯 돼지고기의 육향이 감칠맛을 더해주어 입안에 여운을 느끼게 한다. 거기에 더해 묵직한 느낌의 군만두까지 먹어주니··· 과연 천국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그릇은 빠른 속도로 비워져갔다. 그릇이 비워져갈수록 뱃속의 포만감도 같이 올랐다.
역시 짱깨는 옳았다.
“끄윽, 잘먹었습니다.”
이윽고 모든 그릇이 비워지고··· 나는 가볍게 트름을 날렸다. 자고 먹고 트름하고··· 짐승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허나 나는 그 짐승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가끔 off로 편하게 있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 다음에 찾아올 시련에 충분히 버틸 수 있었으니까.
“······.”
자, 그럼 이제 그 시련을 맞이해야 할 차례였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상단의 알림을 하나 쳐다보았다.
아까 짜장면을 계산할 때 은행에서 온 차가운 문자.
나는 매를맞는 심정으로 알림을 확인했다.
[이세원 고객님. 방금 ○○카드로 결제금액 12,000원이 빠져나갔음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남은 금액: 116,100₩]
11만 6천원. 그 지독한 현실이 내 가슴을 후벼판다.
고작 짜장면 하나 시켜 먹었을 뿐인데··· 어느새 통장 잔고가 줄어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슬픈 일이었다.
당장 이번달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 돈을 벌어야 해.”
상황이 꽤나 심각하다. 이 돈이면 짜장면 스무 번 정도 사먹으면 사라질 돈이었다. 짜장면 스무 번이면 고작 20끼 밖에 안 된다.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돈을 어떻게 버냐는 건데···.
그래도 비전이 있기는 했다. 나는 핸드폰 앱으로 팩시브를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 ‘이세원’이 계정까지는 만들어 놓았더라.
아무것도 올라온 게 없긴 했지만, 녀석도 그림쟁이 였으니 팩시브는 의무적으로 가입해 놓은 듯 했다.
덕분에 귀찮은 가입절차를 스킵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계정으로 그림 하나를 업로드 해놓은 상태다.
어제 자그마치 12시간 동안 그려댔던 나의 열정작이었다. 분홍색 젖꼭지가 화룡정점으로 그려진 나체 여자의 그림··· 본래 세계에서는 [ ㅜㅑ ㅜㅑ;]나 [선생님 존나 꼴립니다 헥헥]같은 댓글이 달릴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왜 여자임?]
[가슴 쥰내 큰 거 봐ㅋㅋ 작가새끼 레즈임?ㅋㅋ ]
[이건 뭐.. 서사도 없고.. 감동도 없고.. 꼴림도 없네요.. 1점 드립니다. 쩝.. 그래도 그림체는 예쁘니 1점은 추가했습니다.]
[딱 입시미술 수준 ㅋㅋㅋ 소비자 취향 존나 못 읽네 ㅋㅋㅋ]
개판이 나 있는 댓글창 상황. 태그들을 덕지덕지 달아서 그런지 온갖 딸쟁이들이 찾아와서 내 그림을 평가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댓글들 뿐이었다. 덕분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냐! 아니야악!!”
잘못된 건 내가 아니야!!
잘못된 건 세상이다! 나만 정상이고 너희 모두가 미친거다!!!
하지만 본래 소수의 의견은 묵살되기 마련···.
내 외침은 세상에 전해지지 못하고 다만 죽어갈 뿐이었다. 한 번 더 소리지르면 다시한번 미친놈으로 찍힐 것 같았기에 나는 분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후우···하아···.”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역시 남녀역전 세계라 그런지 여자그림은 수요가 없었다.
[댓글 왜이러징? ㅠㅠ 작가님 저는 마음에 들어요 ㅎㅎ 오랜만에 좋은 그림 하나 건지네요! ㅎㅎ 파이팅~]
···아니, 있긴 있었지만. 소수일 뿐이었다.
팩시브도 물론 남자유저 여자유저 섞여 있는 장소였지만, 기본적으로 ‘여자’ 유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사이트가 음지와 연결되어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성욕이 강한 성별이 커뮤니티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욕이 강한 성별은 이곳에서 여자였으니 댓글창이 개판이 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야짤 보면서 자위하는 여자라··· 상상하니 살짝 꼴리긴 했지만 지금은 별 도움 안 되는 정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때, 그냥 남자 쪽을 공략해버려?’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소수인 남자독자··· 그니까 ‘남자’독자에게 후원을 받는다. 이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아냐.”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긴 돈벌이가 적을 게 뻔했다.
‘남자’독자들의 자본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맘에 드는 작가가 있다면 통 크게 후원하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물량빨을 이기진 못했다.
여기서 남자가 2할이라면 여자는 8할을 차지한다.
당연히 8을 공략하는 게 수익률이 더 높을게 뻔했다.
당장 돈이 궁한 상황인데 ‘여자’독자들을 목표로 하는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내가 남자를 그려야 한다고?”
빵빵한 근육가슴이랑, 거근 쇼타같은 걸 그려야 한다고···?
세엑스를 그리는데 남자포커싱을 해야 한다고···?
스토리까지 넣어가면서······?
“아냐··· 안 돼 시발······.”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럴 순 없다. 내가 아무리 자본주의에 얽매여 있다고는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11만 원짜리 통장 잔고는 게이짤을 그리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려야 한다고.
그걸 그려야 먹고 산다고.
덕분에 내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냐, 배부른 돼지가 되느냐··· 지독한 양자택일이다.
덕분에 울음이 다 날 것만 같았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거진 몇 시간은 고민한 것 같았다.
“후··· 그래.”
그렇게 도달한 하나의 결론.
비약의 비약을 거쳐 도출해낸 내 나름의 탐협점.
“···다 잘라버리면 되잖아?”
좀 너무 비약이 된 거 같지만 어쨌든.
돈은 벌어야 한다. 하지만 남캐짤만 그리기에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다 잘라버리면 되는 일이다.
팔을, 다리를.
멀쩡한 남자의 나체보다는 사지가 잘린 남자의 나체를 그리자.
다행히도 나는 남자 야짤보다는 고어짤에 더욱 내성이 강한 편이었다. 아니, 고어짤만큼은 아주 잘 그릴 자신이 있었다!
그거면 된 것이다.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차선조차 안 된다면 차악을.
그렇다면 결국 차악이 최선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부터 고어야짤 작가다.
하드한 걸 주로 그리는 이상성욕의 왕이다.
이게 내가 내린 결론.
나의 히든 피스.
‘좋아.’
뭔가 정신적으로 성장한 거 같았다.
아니면 어딘가 하나 망가졌거나.
‘우선 닉네임부터 바꿔야겠지.’
지금 팩시브의 닉네임은 본래 세계의 내 닉네임이 아니었다. 이쪽 세계의 ‘이세원’은 나랑은 다른 이름을 쓰는 듯 했다.
무릇 커다란 일엔 첫 단추가 중요한 법.
닉네임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설정창에 들어가 ‘프로필 변경’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지체없이 닉네임을 지우고 새 닉네임을 적는다.
예전부터 내가 주로 쓰던 이름.
‘Hala’
한국어로는 ‘하라.’
그렇게 나는 닉네임을 정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