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웠다. 언제까지 형의 집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5,000만원 모은
돈으로는 집을 살 수도 없었고, 가게를 열 수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사랑하는 내 아내의
행복은 아예 물 건너 갈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번호키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짧은 반바지, 민소매티,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손에는 하얀 화장지를 든 아내와 눈
이 마주쳤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과 모르긴 해도 심한 운동을 했는지 상기된 얼굴빛을 한
그녀를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분명히 놀랐다.
“이... 일찍 왔네?”
말까지 더듬는다. 나는 재빨리 발 밑을 쳐다봤다. 그러나 아내가 집에서 신는 샌들외에는
아무런 신발도 놓여있지 않았다.
“왜.... 거기서 내려와?”
그런 아내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아내며 조근하게 물었다.
“아주버님 방 청소했지...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내는 곧 놀란 기색도, 말을 더듬지도 않고 평소와 같이 나긋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여전
히 이마와 귓밑으로 빛나고 있는 땀방울은 나의 신경을 계속해서 거슬리게 했다.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뭐 했어?”
“청소했다니까~ 빨리 들어 와~”
아마 아내도 내가 무슨 의심을 하고 있는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이상한 눈초리로 추궁을
하니 곧 짜증이 섞인 반응을 보인 후에 주방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였다.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에 복층으로 발길을 재촉했고 올라서자마자 나를 가로막
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왠지 형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알몸을 해서 말이다.
“.................”
저녁 노을이 물들어가는 석양에 분위기가 멋진 공간이 펼쳐졌다. 생각대로 있어야 할 형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고 아내가 쓸고 닦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었다. 욕실의 커텐도
한켠으로 젖혀져 말끔한 상태였고 바닥에도 물기하나 없이 깨끗했다. 책상도 깔끔했고 컴퓨
터와 텔레비전의 화면도 먼지하나 없이 깔끔했다.
“오빠!”
망연자실 서 있는 내 모습이 아내에겐 어떻게 보여졌을까? 연희를 안고 나를 째려보는 아내
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내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미.. 민영아... 형꺼 그거... 그거 어딧지?”
나는 나오는 대로 둘러댈 수 밖에 없었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저렇게 착하고 조신한
여자를 의심했다는 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오빠... 요즘 왜 그래? 왜 오빠답지 않게 그러냐고!”
아내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럴수록 나는 작아져만 갔다.
“뭐가... 왜 형 쓰던 카메라 있었잖아.... 그거 찾으러 온 거야...”
형은 디지털 문명과는 별개인 사람이었다. 쓰는 거라곤 어쩔 수 없이 휴대폰과 컴퓨터가 전
부인 사람이었다. 사실 텔레비전도 잘 보지 않았고 음악도 잘 듣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디
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아내는 덜렁 그 한 마디만을 남겨둔 채 형의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
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잠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내 자신이 이리도 못나보
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정말 바보 같았다.
나는 잠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고 곧 소파로 나와 앉았다. 그러자 아
내는 따뜻한 허브차를 두 잔 내왔고 연희는 가장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틀어주고 홀로 내곁
으로 다가왔다.
“오빠 요즘 왜 그래?”
“내가 뭘...”
“나 의심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의심은... 그런 거 아냐...”
차마 아내에게 널 의심한다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럼 그녀가 내 곁에서 사라져버릴 것
만 같았다.
“오빠 요즘 굉장히 이상해 진 거 알아?”
“알아...”
“왜 그래? 뭐가 그렇게 오빠를 힘들게 하냐구~”
“나도 잘 모르겠어... 잠자리도 그렇고...”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조루와 발기부전에 대해서 아내에게
이해를 구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잠자리가 왜? 오빠 요즘 피곤해서 그런거잖아... 예전에 안 그런 거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아는데... 왜 그렇게 날 힘들게 해?”
“미안하니까! 누구보다도 너한테 잘해주고 싶고 항상 만족시켜주고 싶고, 돈도 많이 벌어서
너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잘 안되잖아...”
아내가 운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커다란 이슬이 똑 하고 허벅지로 떨어진다.
사랑하는 아내를 울린 난 바보다. 정말 바보다.
“누가 돈 많이 벌어다 달래? 누가 밤마다 뿅 가게 해 달래? 난 그냥 오빠만 있으면 돼... 그
냥 오빠랑 연희랑 같이 있는 게 가장 큰 행복이야”
“민영아~”
바보처럼, 이런 여자를 아프게 했다.
이토록 순진하고 착한 여자를... 작은 것에 행복해하고 만족해하는 여자를...
이 여자, 민영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아내는 오랜만에 뜨거운 포옹을 했다.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포옹을... 나
보다 키가 큰 여자였지만 어쩜 이리 가냘프고 약할까? 뜨겁게 역류되는 아내의 입김에 가슴
이 쓰려온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을 했다. 이 여자만을 사랑하고 믿겠노라
고...
짧은 대화였지만 우리 둘의 앙금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내 마음도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점차 치유를 하고 있었다. 의심 따위는 지워야 했다. 의심을 할수록 힘이 드는 건 내 자신
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난 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금요일이었다.
형은 아내가 소개 시켜 준 소현을 초대했다. 아내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제 형의 애인이
된 그녀는 다시 봐도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무엇보다도 감출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가
슴을 지닌 그녀의 8등신 몸매는 하이힐이 없어도 빛을 발했다.
“으유~ 기지배... 그렇게 좋아?”
입이 길게 찢어져 연신 웃고 있는 소현에게 아내는 짓궂게 놀려대고 있었다. 형이 잠시 자
리를 비운 사이였다.
“그래, 좋다! 태훈씨 정말 좋은 남자인 거 같애...”
“내가 말했잖아... 우리 아주버님 같은 사람 본 적이 없다고...”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날 칭찬하는 것도 아니지만 의심했던 형과 아내사이
가 이젠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연희가 졸린 지 계속해서 칭얼댔다. 아내는 소현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형 역시 자신
의 새로운 여자친구, 이제 곧 형수가 될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왔기 때문에 오롯이 연희는
내 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연희를 안고 얼러주며 거실을 배회하고 방을 왔다갔다 하
기 시작했다. 내 딸이지만 정말이지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니였다.
눈꺼풀이 무거운지 자꾸만 눈을 비비고 울먹이며 칭얼 거리는 모습도 아내의 어린시절 같아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래, 결혼은 생각하고 있는거야?”
아내가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여자들의 수다는 언제 보고, 언제 들어도 놀라울만큼 끝이
없이 이어졌다.
“몰라... 이 년아~”
소현이 부끄러운지 결혼이란 단어에 얼굴을 붉혔다.
“그만 재... 너도 알다시피 남자 다 거기서 거긴 거 알잖아...”
“어머? 재긴 누가 들으면 오해 하겠다. 태식씨 저 그런 여자 아니예요~”
소현이 가슴을 출렁이며 펄쩍 뛰더니 곧 내게 눈길을 돌려 부인하듯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난 그저 웃음을 보여주는 것 외엔 별 다른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