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마친 은채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더니 외출할 채비를 서둘렀다. 시계는 벌써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못한 채 급한 대로 옷부터 주워 입고는 화장대에 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나 때문에 알바에 늦어서 꾸중을 듣게 될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바 가는데 무슨 화장이냐? 그냥 가. 화장 안 해도 예쁘면서..」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던 은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씨x. 급격히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따위를 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지도, 눈을 흘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입술정도만 칠하더니 화장을 끝낸 듯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내가 조금 의아해하는 사이 그녀는 결국 젖은 머리카락 그대로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렇게 쌩하니 나가버릴 때면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나와 그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저런 태도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만 씻고 집에 가기위해 터벅터벅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안은 그녀가 샤워를 마친 뒤라 후끈한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온수를 틀고 손끝으로 적당한 수온을 찾고 있던 그 때였다. 누군가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나가더니 뭔가 두고 간 모양이구만.’
어쩐지 조금 반가운 기분도 들었기에 수건만 두른 채 맨발로 뛰쳐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친 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수호의 모습이었다.
「어..아니.. 네가 여긴 어떻게..」
사람이 너무 놀라면 으레 그런 상투적인 대사가 먼저 튀어나오는가 보다. 수호 역시 갑자기 열린 문에 당황한 듯 아무 말도 못한 채 입만 뻥긋 거리고 있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내게 달려듦으로써 그 정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퍼억-’
턱뼈부근에서 발생한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을 때 나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녀석의 주먹이 매서웠기 때문은 아니고, 내가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하려다가 하필 현관에 놓여있던 은채의 힐을 밟은 탓이었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녀석은 그렇게 자빠진 나의 위에서 연신 뭐라 소리를 지르며 연달아 주먹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귀가 울려 녀석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녀석의 눈가에 맺힌 눈물만으로도 그가 모든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 끝났구나.’
쉼 없이 쏟아지는 주먹세례에도 나는 아픔보다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녀석은 한참동안이나 그 매가리 없는 주먹을 퍼부었고, 나는 그가 제풀에 지쳐 그만둘 때까지 그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줘야만 했다. 실컷 때리다 지쳤는지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어떻게 된 건지 말을 해봐!」
「..다 알고 왔으면서 뭘 물어.」 나는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씨x 모른다고!! 대체 왜 네가 여기.. 네가 왜 내 여자친구 방에 있는 건데?!」
「..미안하다..」 입 안에 고인 피 때문에 대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 미안? 미안하다고? 하하..」
그는 그렇게 헛웃음을 지으며 내게서 떨어졌고 곧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일단 바지와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 입안을 헹군 뒤 그의 앞에 앉았다. 긴 침묵을 깨고 수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라니..? 그러니까 왜.. 우리 셋이 데킬라 마셨던 그 날..」
뭐지? 이 녀석 다 알고 온 거 아니었나? 설마 계집애들처럼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뭐 이런 건가? 마지못해 대답을 하긴 했지만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너 여친이랑 헤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데이트 도중에 합류했던 그날 말하는 거야?」
수호는 골똘히 기억을 더듬더니 그렇게 되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역시 무언가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하.. 그렇게 오래됐을 줄은 몰랐는데..」
「... ...」
「계속 얘기해봐.」
하지만 뭘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네 여자친구를 소개받았던 날부터 따먹고 싶어서 재형이랑 짜고 모든 걸 계획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니 무엇보다 재형의 얘기를 꺼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처음 그가 방에 들이닥쳤을 때까지만 해도 이미 재형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라고 생각해 모든 걸 체념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계속해서 나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는 그의 태도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재형에 대한 부분은 일단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날 너 술 많이 취해서 집에도 못 가고 모텔로 갔던 거는 기억해?」
「..솔직히 과정 같은 건 기억 안나. 근데 그날 네가 우리 모텔에 데려다주고 갔다면서. 아니야?」
확실하다. 수호는 그날 재형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면 재형이 이 일을 털어놓으면서 자기가 연루된 부분만 의도적으로 누락을 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완벽하게 이 일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심증은 굳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 맞아. 근데 그럼 내가 술집에서 은채씨 업고 나갔던 것도 기억 안 나겠네?」
「! 은채가 그날 네 등에 업혀서 나갔었다고?!」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은채씨도 그날 많이 취했었어. 둘 다 인사불성으로 취해버려서 나 혼자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너야 뭐 남자니까 잠깐 혼자 둬도 괜찮겠지 싶어서 술집에 잠깐 두고 은채씨를 먼저 업고 모텔로 데리고 갔던 거야. 너는 그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데려간 거고..」
입에서는 술술 잘도 거짓말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심장은 긴장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녀석이 진즉에 나의 거짓말을 눈치 채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날 시험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부지런히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그 뒷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열심히 생각을 짜내고 있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나. 내가 자리에 없을 때..」
「... ...」 어떡하지? 그냥 술김에 실수로 그녀를 범했다고 내 입으로 얘기를 하고 싹싹 빌어야 하나? 그런 말을 하기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망설이고 있는 그때였다.
「그래서 그날부터 쭉 둘이 연락하고 있었던 거야?」
..연락?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뭐 굳이 얘기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날 술에 취한 은채를 따먹고 나서 그 일을 빌미로 서로 연락하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단순히 그런 의미로 그런 질문을 던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여자친구인데.. 나한테 안 미안하디?」
「미안.. 할 말이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사과를 던졌다. 어쩐지 대화의 흐름상 그래야할 타이밍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런 나에게 믿었던 친구가 그럴 줄 몰랐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한참을 늘어놓았다. 이 녀석 지금 내가 자기 여자친구를 강간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있는 건가? 근데 고작 이런 식으로 훈계나 하고 있다고? 날 때려 죽여도 모자랄 판에?
하지만 한참을 그렇게 혼자 떠들고 난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그래서 둘이 지금 사귀어?」
나는 그제야 비로소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아마도 자기의 여자친구가 나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렇게 아둔한 녀석에게 어쩌다가 꼬리를 밟혀서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단 녀석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니. 사귀는 건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설마 전에 네가 말한 그 세..섹파 사이냐?」 수호는 차마 그 단어를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듯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아니야..」
「씨x!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대체 뭔데, 둘이?!」 갑자기 녀석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 ...」
「너 전에 휴대폰에 사진 있다고 했지? ..휴대폰 줘봐.」
「!!」
아뿔싸! 결국 입이 방정이었다. 그제야 재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렸던 본인의 경솔함이 원망스러워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수호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내놓으라니까!」
[2013년 4월 6일 토요일 09:51 - 수호의 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