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6)

안쪽에 앉아있던 은채가 화장실을 가려는 듯 보여 나는 얼른 일어나 길을 터주었다.

잠시 후 친구들과 얘기 중이던 나는 뒤쪽이 뭔가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앞에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취객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은채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가 잘 해준다니까. 잠깐 이쪽으로 와봐.」

「왜 이러세요. 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순간 눈에서 불똥이 확 튄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 남자의 손을 그녀에게서 떼어냈다. 

「넌 뭐야?」

「전 이 애 남자친구인데요. 그쪽이야말로 무슨 일이시죠?」

「남자친구? 뭐야 진짜야? 나가요 아니었어? 이런 씨x. 사람 헷갈리게 왜 옷을 그 따위로 입고 다니는 거야? 아무튼 요즘 젊은 년 놈들은.. 쯧쯧~」

적반하장도 모자라 꼴에 훈계까지 하려드는 취객의 태도에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곧바로 뜯어 말리는 바람에 결국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중년의 남자는 짐짓 놀랐는지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갔고, 난 그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서있는 은채를 돌볼 수 있었다.

응? 근데 은채의 모습이 화장실에 가기 전과 어딘가 조금 달랐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지금 스타킹을 신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방금 전 취객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스타킹을 신고 있을 때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새하얀 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 서있는 그녀의 주름치마는 이제 보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짧아서 엉덩이를 겨우 가릴 수 있는 길이에 불과했다. 

‘도대체 왜..?’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일단 서둘러 그녀의 손을 이끌고 자리로 돌아왔다. 화장실 앞에서 자리까지 돌아오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여기저기서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고 수군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가요 아니었어?” 아까 취객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스타킹은 왜 벗은 거야?)」

나는 입고 있던 후드 짚업을 벗어 그녀의 다리를 덮어주며 조용히 물었다.

「(화장실에서 보니까 올이 심하게 나갔더라고..)」

「(그래도 그렇지.. 치마가 그렇게 짧은데 어쩌려고..?)」

「(나도 이럴 줄 알았나.. 조심하면서 다니면 괜찮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흔한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그녀는 내 바람과 상관없이 유독 빈번하게 화장실을 찾았다. 또 아까와 같은 일이 있을까 아예 화장실 앞까지 같이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친구들 앞이라 체면상 그러지는 못하고 다만 은채가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친구들과 자리만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사실 나는 그날 일을 전부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들의 테이블 옆을 지나 화장실에 갈 때마다 저들끼리 뭐라 떠들며 시시덕대던 20대 무리 중 한 명이 이번에도 그녀가 옆을 지나치자 순간적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친구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사내의 장난에 일행으로 보이는 놈들은 자지러졌고, 다른 테이블의 남자들 역시 단순히 그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나는 여자친구가 명백히 희롱당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나는 그 때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에 어딘가 거칠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단순히 쫄아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런 굴욕적인 진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며, 진짜로 만진 것도 아닌데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그 녀석은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신이 났는지 이번에는 아예 일어나서 테이블로 돌아오는 그녀의 뒤에 가까이 접근했다. 킥킥대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또 무언가 그녀를 희롱하는 행동을 한 게 분명했지만, 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그 행동이 어떤 것 인지까지는 미처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나는 또 침묵했다.

아까 전 사내의 장난이 ‘모두’에게 묵인이 되면서, 술집의 남자들은 어느새 그녀를 희롱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진 듯 보였다. 개중에 몇 명은 테이블 아래로 무언가를 떨어뜨린 척 고개를 숙여 그녀의 치마 속을 엿보기 위한 아주 노골적인 시도를 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스스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희롱의 기준을 높여가며 여전히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이제는 점점 그 사람들보다 그런 옷을 입고 나온 여자친구에게 더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여자친구는 그 날 2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무려 7번이나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러는 사이 이미 누군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동료들에게 자신이 본 ‘그것’을 열심히 설명하기도 했다.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의 뒷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더러 눈에 띄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냐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해버렸다.

밖으로 나온 나는 두꺼운 레깅스를 사기위해 강남역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연말이지만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문을 연 점포가 거의 없었다. 평소에는 길거리 자판대에서 파는 것도 더럽게 많이 눈에 띄더니 오늘따라 막상 찾으니 도무지 한군데도 파는 곳이 없다. 결국 나는 밖에서 헤맨 지 40분이 지나서야 편의점에서도 레깅스를 판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비로소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레깅스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술집에 돌아왔을 때,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주영이와 재형이 둘 뿐이었다.

「어라..은채랑 현택이는? 어디 갔어?」

「뭐야? 둘이 너 찾는다고 나갔는데?」 

「너야말로 어디 갔다 왔냐?」

「아..그냥..바람 좀 쐬려고..」

나는 주머니에 있는 레깅스를 더욱 깊이 밀어 넣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엇갈렸나보네. 너 나가고 5분도 안 되서 바로 따라 나갔는데.」 주영이가 말했다.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건의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럼 지금 그 꼴로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현택이랑 둘이? 아니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나은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자꾸 나쁜 상상만 드는 찰나 재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 왔다고 연락했어. 곧 들어올 거야.」

10분 뒤 연락을 받은 두 사람이 돌아왔다. 추운 날씨에 그 얇은 옷차림으로 얼마나 밖을 헤맸는지 은채의 두 손과 양 볼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테이블 아래로 그녀의 꽁꽁 언 손을 쥐고 주물러 주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말도 없이 어딜 나갔었냐며 따져 물었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그녀에게 조용히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건넸다. 

「뭐야.. 설마 이거 사려고..?」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말도 안 하고 그냥 휙~ 나가버리면 어떡해? 화난 사람처럼.」

「..화가 나서 그런 거 맞아. 사람들이 자꾸 네 다리 쳐다보니까.. 화가 나서 그만..」

「... ...」

그녀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그녀가 화가 났나 싶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고마워, 오빠.」 그녀는 오히려 조금 감동한 듯 보였다. 

나는 괜스레 쑥스러워졌기에 얼른 가서 입고 오기나 하라고 그녀를 떠밀었다. 

「..지금?」

그녀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이내 알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지없이 여기저기에서 포크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또다시 몇몇이 목적을 달성한 듯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그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때문인지 아까보다 훨씬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레깅스를 입고 나오자 여기저기서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탄식이 터져 나왔고, 아예 노골적으로 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내 여자를 지켰다는 생각에 더 의기양양했다.

'기껏해야 팬티 훔쳐보는 정도로 실컷 만족했냐? 나는 오늘 밤 이 여자 방에 갈거라구 자식들아!'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00:14 - 은채의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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