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통화 내용을 대충 듣고 있던 은채가 물었다.
「왜? 오빠 친구가 여자 친구랑 헤어졌대?」
「응. 그런가 봐.」
「그래서? 오빠더러 오래?」
「그러려고 전화한 건데 내가 오늘이 우리 400일이라고 얘기했어.」
「그래도.. 헤어졌다는데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은채의 이런 성격까지 고려된 것은 아니지만 그 밖의 거의 모든 상황은 애초에 재형이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날이 둘의 400일인 것도 진작부터 몰랐던 바가 아니었다.
하지면 재형이 생각하기에 ①연락을 받을 당시 둘이 만나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예측하기에도, ②술자리까지 둘을 함께 부르기 자연스러운 상황을 이끌어 내기에도 그런 기념일만한 날이 없었다.
주영이에게 전화를 했었다는 것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혹시라도 수호가 주영이에게 직접 연락을 해보거나, 아니면 나중에라도 전화가 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거짓말이 들통 날 위험은 단순히 전화를 안 받아서 연락이 안 되었던 것으로 해둠으로서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 이후의 진행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다시 수호에게 전화를 건 그는 자신이 급한 볼일이 생겨서 곧 가봐야 할 것 같다며, 현택이를 혼자 놔둘 수는 없으니 은채씨와 같이 와서 있어주면 안되겠냐고 이야기했다.
이미 그 전의 통화로 인해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던 수호와 은채는 그런 재형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고, 제 발로 그들이 파놓은 함정 근처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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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와 은채가 도착했을 때 둘은 이미 한 허름한 민속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야. 우리 왔다.」
「어~ 왔냐?」
「새끼. 넌 또 왜 헤어졌냐?」
「그러게 말이다. 근데 또는 뭐냐 또는.」
자연스럽게 친구들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사실 현택의 시선은 이미 두 사람이 주점에 들어올 때부터 은채에게 쏠려있었다.
2주 사이에 부쩍 선선해진 날씨에 롱자켓을 걸친 그녀의 옷차림은 지난 번 원피스와 같이 가슴이 부각되는 옷은 아니었으나, 하늘하늘한 크림색 쉬폰 미니 스커트 아래로 곧게 뻗어있는 그녀의 다리는 검은색 반투명 스타킹과 어우러져 묘한 색스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수줍은 듯 수호의 뒤에 살짝 숨은 채인 은채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애인과 헤어져서 술을 마신다기에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하는 현택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런 위화감은 곧 격한 환영과 더불어 술잔에 채워지는 술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괜히 저 때문에 데이트도 못 하고..미안해요.」
「아니에요~ 저흰 정말 괜찮아요.」 현택이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하자 은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래도 두 사람 400일인데..」
「기념일이야 매번 돌아오는 건데요 뭐. 안 그래도 얼마 전 1주년 때도 오빠가 이벤트라고 무리를 많이 해서 이번에는 간단히 저녁만 먹기로 했었어요.」
「이야~ 수호자식이 1주년이라고 이벤트도 해줬어요? 새끼야 우리한테도 은채씨한테 하는 거 반만큼만 해봐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그래도 제가 좀 미안한데... 음..」
그렇게 말끝을 흐리던 현택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그럼 우리 이런데 말고 자리를 옮기죠. 제가 근처에 분위기 괜찮은 바를 하나 알거든요.」
「네?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되요.」
「아니긴요. 두 사람 기념일인데 저 위로한다고 여기까지 와주시고.. 오늘 제가 축하하는 의미에서 쏘겠습니다.」
거듭 웃으며 사양하는 은채였지만, 수호의 입장에서도 이는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기에 자리 이동은 대체로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도착한 곳은 현택이 얘기한대로 상당히 세련된 분위기의 바였다.
10시도 안된 이른 시간 이지만 바 안은 꽤 많은 손님이 있었고, 유독 젊은 남녀 커플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많이 어두웠지만 현택은 평소에도 자주 들르던 곳인 듯 익숙한 발걸음으로 비어있는 구석 자리를 향했다. 주영은 자리를 이동하면서 애초에 말했던 용무를 이유로 먼저 돌아갔다.
「왔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메뉴판을 들고 나타나 현택과 인사를 나누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관계인 듯 보였다.
「사장님, 여기는 제 친구랑 그 여자 친구 분이신데요, 오늘 400일이라고해서 제가 모시고 온 거니까 특별히 잘해주셔야 되요?」
사장이라는 남자가 고개를 돌려 은채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치자 얼른 인사를 건넨 은채였지만 사장은 2초 정도 그녀를 주시하고 돌아가 버렸다. 왠지 머쓱해진 은채에게 현택이 메뉴판을 들이밀며 술과 안주를 고를 것을 권했다.
「아니에요. 저는 술을 잘 못해서.. 두 분이서 고르세요.」
「에이~ 누가 많이 드시래요? 조금만 드세요. 그리고 좀 취하면 어때요? 옆에 수호도 있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은채가 도움을 요청하는 바람에 메뉴판을 건네받은 수호였지만, 그 역시 뭘 시켜야 될지 선뜻 고르지 못 하는 건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으이구~ 이리 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