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결과 은채를 성추행했던 범인은 고작 중학교 2학년인 앳된 남학생이었다. 은채의 친구들은 쪼끄만 놈이 벌써부터 그딴 짓이냐며, 당장 감방에 쳐넣어야 된다며 난리를 쳤지만 만 14세 미만이라 형사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은채 역시 자세하게 자신이 추행당한 사실을 진술하기 보다는 빨리 상황을 마무리 짓고 자리를 벗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간단한 조사를 마친 채 가해자인 남학생을 남겨두고 은채와 친구들은 먼저 자리를 뜨게 되었다.
그런 그녀들과 함께 진술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남자가 있었다. 바로 가해자를 제압했던 남자-수호였다. 함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호는 제대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23살의 대학생이었다.
어느 누구도 선뜻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오늘..정말 감사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은채가 수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오빠~」
「역시 이래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돼.」
「감사해요~」
은채의 인사를 시작으로 친구들 역시 한마디씩 거들며 수호에게 마찬가지로 감사를 표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아까의 그 용기 있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홍당무가 된 수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수호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은채의 친구들은 신이 나서 계속 말을 붙였다.
「오빠, 어디 놀러가시던 거 아니에요?」
「그러게. 제대한지 일주일밖에 안되셨다면서~」
「아.. 아니에요. 낮에 잠깐 학교 들렀다가 이제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어우~~ 그게 뭐야~~ 놀아야죠.」
「그러게. 아직 7시 반밖에 안됐는데 벌써 집에 가서 뭐하게요~」
「그..그냥 엄마랑 저녁 머ㄱ...」
「아! 맞다. 나 완전 배고파~ 우리 저녁 안 먹어~?」
「그러게. 힉~ 벌써 7시 반이야.」
「오빠도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네..네?!」
은채가 그런 친구들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친구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꺄르르 웃으며 수호를 곯려대고 있었다.
「은채는 진짜 오빠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드려야지~」
「그럼 그 못된 변태새끼한테서 구해주셨는데~」
「..어?」
평소에도 장난기 많던 보라가 분위기를 몰아갔고, 당황한 은채는 얼떨결에 수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그만 눈이 마주치고는 부끄러워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친구들이 그 장면을 놓칠 리 만무했고, 그 뒤로는 그녀들의 페이스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평소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지나치게 기피하던 은채가 내심 답답했던 그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위기를 몰아갔고, 결국 반강제적으로 연락처까지 교환하게끔 만들었다.
이후에도 틈틈이 은채의 휴대폰을 빼앗아 수호에게 먼저 만나자고 카톡을 날리는 등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대신 펼쳐준 덕분에 둘은 연인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건 은채 역시 그런 떠밀리는 분위기에서 억지로 교제를 하게 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은채에게 있어서 그때까지의 남자들이란 항상 자신의 몸을 음흉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함부로 손대기 일쑤인 두렵기만 한 존재였으나, 수호는 그런 그녀에게 '남자'라기보다는 난생 처음으로 그러한 위해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고마운 '사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호 역시 그 전까지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는 쑥맥이었고, 연인이 된 이후에도 은채와의 스킨십에 있어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수호의 배려가 녹아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유난히 스킨십에 거부감이 심하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첫 만남에서 힌트를 얻어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냐고 그녀를 채근했고, 처음엔 굳게 입을 다물었던 그녀도 수차례에 걸친 물음에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치한들에 대한 이야기를 -고교 시절의 일은 제외한- 털어놓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그런 그녀를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주었다.
은채의 친구들은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단순히 진도가 느린 것을 답답해하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전철에서는 그런 용기를 냈었는지 의문이라고들 하지만, 수호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은채로서는 그런 점까지도 너무나 다행스럽고 또 고마운 최고의 남자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
.
.
그리고
두 사람은 사귄지 꼭 1년째 되는 2012년 8월 20일, 그녀의 방에서 처음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난 지 꼭 1년째 되는 2012년 8월 20일, 그녀의 방에서 처음 사랑을 나누었다.
행위는 어떤 섬세하고 값 비싼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고 천천히 진행되었다.
은채는 '처음'에 동반되는 아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이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그가 서툰 움직임 끝에 사정을 하고, 그녀의 몸 위로 포개어졌을 때는 숨쉬기 힘든 그 무게감조차도 포근하게 느껴졌고, 그의 단단한 양 팔에 안겨있노라면 세상 모든 해로운 것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친구들에게 들었던 것처럼 머리가 하얘지거나 붕-뜨는 것 같은 기분은 아직까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수호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행복한 그녀였다.
정신적인 만족으로 충만한 은채와 달리, 수호는 24년 만에 처음 안아본 여자의 몸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 폭신한 감촉과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는 아마 평생을 만져도 질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상처와 그녀가 가진 콤플렉스를 이해하고 1년을 소중히 지켜줬던 그였지만 이미 한번 여자의 살 내음을 맡아버린 이상 그도 여느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데이트가 한참인 대낮에도 온통 끝나고 그녀의 자취방에 들어갈 궁리만 머릿속에 가득할 지경으로 그녀와의 관계에 심취해버린 그였다.
은채 역시 그런 수호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한 여자 친구는 아니었고, 그가 요구하면 언제든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호는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많은 남자였고,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서도 정작 말을 꺼내지 못해 30분 이상 안절부절 못 하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다.
은채는 여자 입장에서 그런 그를 방으로 먼저 들이지는 못하고 짐짓 모른 척 보내야 했지만, 어쩐지 그런 그의 모습조차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느껴져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한참동안 손을 흔들고는 했다.
.
.
.
[2012년 9월 7일 금요일 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