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조용해진 아이들은 은채의 신체 일부분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무언가를 기대하듯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다행히 때맞춰 울린 수업종소리에도 아이들은 못내 아쉬운 듯 머뭇거렸지만 이내 복도에 출현한 선생님의 호통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대개 이런 류의 소문이 그러하듯 은채가 처한 상황은 휴대전화를 통해 학생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일부 학생들은 수업중임에도 불구하고 교실 창밖으로 하나 둘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고, 특히 자습 중이던 3학년 교실의 경우는 큰 소란이 일었다. 덕분에 소문은 결국 교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지만, 거의 범죄수준의 이 일이 학교 밖으로 새어나가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짐짓 모른 척 하는 분위기로 굳어졌다.
결국 그렇게 은채는 그 날 하교할 때까지 무방비로 교내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다. 담임과 체육 선생님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렇듯 집단성에 숨어 무뎌진 죄의식은 어느새 고교생들의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심각한 범죄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있었지만, 같은 여학생들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녀를 뒤에서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뿐이었다.
은채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남학생들의 추행도 추행이지만 친구 하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너무나도 버티기 힘들었다. 잠자리에 누워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울면서 차라리 다 때려 치고 불량서클에라도 들어가 버리자고 마음먹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녀를 자신들의 그룹에 넣기 위해 찾아오던 일진 여자선배들도 학교 남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된 그녀에게 관심을 끊은 지 오래였다.
괴로운 일상에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가슴은 성장을 멈추지 않고 부풀어 올랐다. 어쩌면 너무 어린 나이부터 겪은 반복적인 추행과 이로 인해 자신의 신체나 성(性)적인 것에 과도하게 의식하는 스트레스 상태가 이어진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끝을 모르고 부풀어 오르던 그녀의 가슴은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장을 멈추었지만, 성장을 멈추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이미 C컵에 달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학년이 올라간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고, 마른 몸에 의해 더욱 도드라지는 그녀의 큼지막한 젖가슴은 끊임없이 남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결국 3학년이 되고 졸업을 할 때까지도 은채는 온갖 남학생들의 손장난을 당하는 처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부 교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 교내에 떠돈 적도 있지만 이내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홀로 발정난 짐승 한가운데에 던져져 유린당해야 했던 은채의 가엾은 고교 시절은 결국 그녀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고향을 떠남으로 인해 비로소 끝을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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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어느새 물줄기가 끊긴 샤워기 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욕실을 채우고 있었다,
은채는 지난날의 괴로웠던 기억까지 털어버리려는 듯 마른 수건으로 샤워 중 조금 젖어버린 머리카락들을 세차게 털어내기 시작했다. 속옷을 챙겨 입고 잘 때 입는 파자마를 챙겨 입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욕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어느새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돌아갈 준비를 마친 남자친구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다 씻었어?」
「응..」
어쩐지 어색하고 부끄러워진 공기에 그녀가 쭈뼛거리며 서있자 남자친구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 포근한 온기에 은채의 얼굴에는 살며시 미소가 번진다.
'따뜻하다-.'
은채는 이 순간 느끼는 이 따스함과 행복이 부디 영원히 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고교 3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깊게 패인 상처는 쉽게 아무는 것이 아니었다. 개강 초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은채는 쉽게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학의 선배와 동기들은 그런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고 비어있는 잔을 채워주었다. 은채 역시 천성이 어두운 아이는 아니었기에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지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렇게 은채는 조금씩이나마 여느 여대생과 같은 미소를 되찾아 나갈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드리워져있던 그녀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복숭아 빛의 싱그러운 생기를 되찾았다. 최근 친구들의 강요에 의해 조금씩 시도하고 있는 화장 역시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형편없이 야위었던 고등학생때 이미 C컵이었던 그녀의 가슴은 살이 더 붙으면서 이제는 D컵에 육박할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하는 남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지만, 실제로는 그녀와 연애는커녕 친하게 지내는 남학생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 때문에 주변 남자들의 호의조차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가 말만 걸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가끔씩 들어오는 미팅과 소개팅조차 한사코 거절할 뿐이었다.
그런 은채가 지금 남자친구인 수호를 만날 수 있었던 데는 조금 특별한 계기가 있었으니, 해가 바뀌어 은채가 대학교 2학년일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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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0일 월요일 17:20]
그 날은 학기말 마지막 시험이 끝나는 날로써 이미 며칠 전부터 방과 후 친한 사람들 - 민지, 현정, 보라와 홍대로 놀러가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터였다.
시험도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는 기분에 한껏 치장을 하고 온 친구들과 달리 은채는 여전히 스키니 진에 그녀의 체구에 비해 다소 커 보이는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평소 낯선 사람의 시선과 접촉에 민감한 은채는 대부분의 경우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애용해왔지만 그날은 친구들과 함께여서 어쩔 수 없이 지하철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인데 별 일이야 있겠냐고 방심하고 있던 은채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 건 2호선으로 환승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직 본격적인 퇴근이 시작되기도 전이었지만 2호선은 이미 많은 승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은채의 친구들은 저들끼리 조잘조잘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은채만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혀 귀담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 필요이상으로 밀착해 있는 사내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채가 접촉을 피하기 위해 좁은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뒤의 사내는 분명하게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은채는 청바지를 입었음에도 전해지는 싫은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워낙에 더 심한 일도 많이 당해온 터라 다만 묵묵히 참아낼 뿐이었다.
한편 사내는 이 예쁜 여대생이 자신의 터치에도 별 반응이 없자 점점 더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슬며시 그녀의 골반에 가져다 댄 손조차 저항을 받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서서히 그녀의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었다. 안에 받쳐 입었던 검은색 나시는 남자가 손가락으로 몇 차례 끌어당기는 정도의 수고만으로 너무도 쉽게 그녀의 속살을 허용하고 말았다. 은채가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선택했던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는 이 순간 오히려 치한이 자유롭게 그녀를 터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림막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일을 당하는 와중에도 바로 근처에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친구들에게 이 사실이 들키지 않은 채, 조금이라도 빨리 치한의 자신의 몸에 싫증을 느끼고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과거 남학생들로부터 추행을 당하고 놀림을 당하는 것보다 더 은채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여학생들 사이에 퍼지는 근거 없는 소문들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유명한 걸레라고 시작된 소문은 은채의 가슴이 커지면서 그와 함께 점점 더 부풀려지더니 나중에는 없는 임신과 낙태 경험까지 만들어냈다.
눈물을 보이면 지는 거라고, 이를 악물며 버티던 은채조차도 여자로서 그런 소문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그녀들을 향해 사실이 아니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해명의 기회는 지난 3년간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끔찍한 기억은 은채를 철저하게 옭아매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티끌만한 저항도 할 수 없도록 그녀를 몰아가고 있었다.
반면 그런 그녀의 아픈 상처 따위는 조금도 알 리 없는 사내의 손길은 여전히 멈출 줄 모르고 이제는 단단한 브래지어로 가려진 은채의 젖가슴을 향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얘들아~ 두정거장 남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은채는 자신도 모르게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근데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어떻게 내려.」
여기저기서 혼잡한 열차 상황에 지친 은채 친구들의 푸념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다들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중단되었던 대화가 다시금 재개된 것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은채 잘 챙겨.」
「알았어요. 은채야 손 이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