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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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방치된 두 대의 차량, 하지만 그 중 한 대에만 유리창을 조금 파손시켜 놓는 실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만으로 해당 파손이 없는 상태와 비교해서 약탈이 생기거나, 파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짐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문제 하나가 또 다른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이론이 바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이 이론을 사람의 인생에 빗대는 것은 조금 억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늘해진 가을바람이 불어오던 2012년 9월 7일, 어느 호프집의 흔한 광경 속에 그녀의 행복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깨진 유리창'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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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7일 금요일 20:40]

당시 테이블에 있던 사람은 수호와 그의 친구들 - 주영, 재형, 현택이었다.

그들은 중학교 때까지 한 동네에 살았던 친구들로 여전히 가끔씩 만나 안부를 확인하는 사이였고, 그 날은 최근 주영이의 전역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였다. 

대화의 주제 역시 각자의 군 시절 무용담부터 시작한 것이 취기가 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결국 음담패설이 뒤섞인 여자 얘기로 이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 또래 남자들이 가진 특유의 허세와 허풍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술자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대체로 그런 류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현택이가 그 날도 자신이 최근에 만나고 있는 여자애에 대한 썰을 신나게 늘어놓고 있었다. 녀석이 풀어놓는 갖가지 경험담은 술자리에서 빠지면 섭섭한 재밌는 안주거리이긴 했지만, 사실 모든 이야기가 그의 주장대로 ‘경험담’은 아님을 친구들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 근데 얘보다는 얘 동생이 지금 고3인데 작살나. 볼 때마다 꼴려서.. 크크-」

「미친 놈. 전자발찌 차고 싶냐?」

「너도 아직 고딩은 못 먹어봤냐?」

「먹어봤지 새끼야!! 야 근데 니들은 걔 교복 입은걸 못 봐서 그래. 교복을 딱 줄였는데 가슴이..어우~ 씨x~」

「ㅋㅋㅋㅋㅋㅋㅋ 까고 있네.」 

「진짜라니까 임마. 그 정도면 최소 B컵은 될 텐데.. 아..」

「..저기 여자 가슴이 B컵만 되도 크긴 큰 거지?」

한참을 듣고만 있던 수호가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평소라면 좀처럼 이런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수호였기에 친구들은 모두 살짝 놀란 눈치였다.

「당연하지 임마. 한국 여자들은 90%가 A컵이야, 그것도 남는.」

「맞아. 내가 만나본 애들도 죄다 A. 가끔 B라는 년들은 하나같이 다 그냥 돼지더라.」 

「그건 네가 그냥 병신인거고. 크크. 난 전에 C컵까지 만나봤는데 확실히 그런 애들은 옷태부터 다르긴 하더라.」

「..내 여자친구가 C컵이던데..」 

사실 수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그의 여자친구-은채의 가슴은 실상 C컵이 아닌 D컵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눈썰미는 커녕 여자경험도 거의 없는 수호는 지난 번에 그녀의 방에서 몰래 봤던 속옷의 사이즈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은채가 자신의 콤플렉스로 인해 일부러 한사이즈 작은 속옷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이 작은 한마디에 이어진 친구들의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뭐? 진짜?」 

「네 여친 가슴이 C컵이라고?」

「야. 사진은? 사진 없냐?」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수호의 휴대폰을 낚아채간 그들은 저들끼리 모여 저장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얼굴 위주로 찍은 셀카였고, 가끔 있는 전신사진조차 노출이 거의 없는 의상 탓에 식별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뭐야 하나도 안 보이는데?」 재형의 목소리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가슴이 없진 않아 보이는데.. 이 정도면 그냥 B컵?」 현택은 짐짓 아는 척 말했다.

「야 직접 봤냐? 네 여친이 뽕 넣고 구라친 거 아냐?」

「맞아. 이런 애들 대부분 뽕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취기가 올랐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중한 여자 친구가 거짓말쟁이 취급당하는 걸 못 참았던 걸까? 수호는 그런 친구들의 반응에 발끈하여 소리쳤다.

「아니야 새끼들아!! 뽕은 진짜 아니야!!」

친구들의 조롱을 참지 못한 수호는 결국 그 자리에서 한 달 전 두 사람의 소중한 비밀을 친구들 앞에서 털어놓고 말았다. 이야기를 듣고 흥분한 친구들은 그녀를 술자리로 부르라고 수호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멋쩍게 웃으며 거절했을 수호도 이미 자존심이 조금 상해있던 탓인지 보란 듯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곤란해 하는 그녀를 졸라 기어코 자리에 불러들이고 말았다.

[2012년 9월 8일 01:20]

쏴아아아아-

「하아..」

샤워기의 물줄기 사이로 희미한 한숨 소리가 새어나온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 이상 처음과 같은 아픔은 느끼지 않게 되었을 뿐, 은채는 좀 전의 관계에서도 아무런 쾌감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런 것 뿐 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여성잡지나 인터넷 기사에서 봤던 - 성생활 장애는 대부분 심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심리적인 요인이라.. 

문득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아무리 떨쳐내고 싶어도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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