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0/10)

13

<201X년 8월 24일 10:03 am>

"헉, 헉.."

기찬은 약속장소를 향해 헐레벌떡 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런게 만나기로 약속 한 시간은 9시 30분이었고, 반면 지금은 10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으니 ...벌써 30분도 넘게 늦어버린 것이었다.

'아오!'

이게 다 석철이 새끼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칭얼대는게 부쩍 늘긴 했지만, 이 개같은 놈이 오늘은 아침부터 전화질로 쪼아대는 탓에 이렇게 늦게 나오고 만 것이었다.

기찬은 다시금 그 신경질 나는 통화내용을 곱씹어 봤다.

「너 요새 왜 내 연락 씹냐? 나 피하냐?」

「아, 그런게 아니라 바빴다니까 또 그러네, 거 참..」

기찬은 슬슬 석철이 부담스럽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적당히 낄낄대며 어울릴 때야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딱히 녀석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를 넘는 요구를 해올 때가 많아져서, 솔직히 요즘 들어선 '슬슬 꺼져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시발, 그래. 내가 그 바빴다는 좆같은 변명은 들었다치고 넘길텐데, 너 왜 약속 안지키냐?」

「뭔, 약속?」

「발뺌하냐 개새야? 차 빌려주면 유라씨랑 떡 치는거 블랙박스에 찍어놓겠다더니...고작 키스? 키스으?」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적당히 끊고 나갈 준비를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찬은 좀처럼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적당히 넘겨온 평소와는 다르게, 석철이 녀석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말 하긴 뭐하지만, 저 멧돼지같은 놈이 진짜 회까닥 돌아버리면 난감한게 한 둘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간 깽값을 받기 전에 반쯤 죽어나갈 걱정을 먼저 해야할 만큼 주먹을 거칠게 쓰는게 바로 석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녀석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어느 미친 놈이 그딴걸 찍어서 공유하겠는가? 행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쪽 부류가 아니었다.

「내가 섹스하는거 찍어놓는다고 했냐? 그냥 찐한거 남겨둔다고 했지, 새캬! 내가 장난친건 미안한데, 솔직히 친구랑 친구 여친의 은밀한 사생활을 보여달라는게 정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기찬은 우선 말로써 석철을 달래며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이제와서 발뺌하냐? 아무튼 나는 이딴 쪽사리 가지고는 절대로 만족 못하니까, 빨리 네 놈 휴대폰 목록 안에 있는 것 중에 하나 골라서 빨리 보내라고!」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석철의 반응에 기찬은 일단 정말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착잡해진 마음으로 녀석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석철이 계속 물고 늘어지는 그 목록...그건 자신이 정리해둔 유라와의 동영상 리스트 제목이었다.

아마 두달 전 쯤이었나? 석철에게 한창 항문섹스에 대한 조언을 구하던 기찬은, 그저 가볍게 녀석을 골려줄 생각으로 자신의 휴대폰 안에 있는 유라의 폴더 리스트를 캡쳐해서 카톡으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물론 역시 예상했던대로 석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우, 우와.. 너 이거 진짜냐? 여기 있는 리스트 정말 진짜냐고?'

하긴, 날짜와 체위가 상세하게 적힌 동영상이 리스트 안에 스무개도 넘게 있었으니 녀석으로선 눈이 돌아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새끼, 내가 그럼 이딴 걸로 뻥카를 치겠냐? 말했잖아. 걔는 내가 하자고 하면 다 해준다니까. 아무튼 알았으면 노하우나 좀 팍팍 알려줘봐. 그러면 혹시 아냐, 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기찬은 홧김에 저지른 자신의 바보같은 짓에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별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장난, 그냥 내가 이만큼 따먹어봤다는 아주 저급한 수컷의 자랑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 알았어. 맞겨만 달라고!'

게다가 굽실대던 석철의 태도는 쉽게 잊지 못할만큼 유쾌하고 짜릿한 거였는데...그게 이제 와서는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후우,"

기찬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차가운 손 덕분에 뜨거워진 얼굴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빨리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직도 더럽게 울려대는 저 휴대폰을 조만간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아, 여기에요!"

조그만 손을 흔들며 자신을 부르는 유라가 저기 멀리서 보였다.

기찬은 더욱 다급해진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그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춘다 .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급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숨을 고르곤 조급하지 않을 정도로만 발걸음을 옮긴 탓에, 기찬은 티나지 않은 모습으로 유라 앞에 설 수 있었다.

흠흠-

칼칼한 목을 가다듬은 기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진공관 앰프의 느릿한 울림처럼 목소리가 천천히 퍼져 나온다. 오히려 그 꼴이 더욱 변명을 부추기는 것 같아, 기찬은 머리를 벅벅 긁어버린다.

"아니 내가 늦게 일어난건 아닌데, 갑자기 급한 전화가 와서 그러다보니 이게..."

바보같은 새끼,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정말 하고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 많이 기다렸어?"

창피함으로 이미 충분히 풀린 목으로부터 "진짜"로 하고싶었던 말이 나온다. 그리곤 그와 동시에 기찬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버렸다.

"..."

유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기찬의 모습은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낯선 것만큼 놀라운게 있을까, 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곧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경솔했는지를 깨닫고는 금새 시선을 내리 깔았다.

기찬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존심도 강하고 잔인한 면모도 있었다. 결코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적어도 자신이 아는 기찬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본 것이다. 그것도 마치 신기한걸 본다는 듯이 말이다.

유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소리를 버럭 지를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은 걸 겪어왔고 또 어느 정도는 익숙되었다곤 하지만...그건 아직도 무서웠다.

"뭘 그러고 있어?"

하지만 유라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찬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곤 유라의 손을 잡아채고는 천천히 그녀를 이끌었다.

기찬은 꼼지락대는 유라를 움켜쥔 손 너머로 느끼고 있었다. 불안함과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여러가지가 섞인 떨림.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다른 경우였다.

사실 며칠 전에 부산으로 동철의 면회를 갔다온 뒤로 자신과 유라 사이에 흐르던 기류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기찬은 느끼고 있었다.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섹스도 곧잘 하고 있었고 유라의 고분고분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찬은 무언가 어긋남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모든 발단은 사실 자신의 모호한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펑펑 울던 유라를 달래준 그 날, 바로 그 날이 문제였다.

떨리는 손으로 유라를 안고, 부끄러운 숨결로 그녀를 간지럽혔다.

'그렇게나 평범한 섹스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던 그 날 이후로, 기찬은 유라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하는지 헷갈리고 있었다.

"늦겠다, 빨리가자."

기찬은 꽉 움켜쥔 유라의 손을 느끼며 조금은 들뜬 마음을 적당히 눌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막 서두를만큼 그렇게 급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유라의 손을 잡을 방법은 이것 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

기찬은 심장이 쿵쾅 거리는 것을 조심스럽지만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런걸 자신이 조금은 염치 없고 뻔뻔하다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지만 딱히 유라도 손을 빼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은 기찬의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들어갔다.

가능하면 이 손을 좀 더 오래 잡고 있고 싶다고 생각하며, 기찬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기찬을 따라 무작정 이끌려올 때만해도 그녀의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젠 대놓고 자신을 집으로 끌어드리는 기찬이 밖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런 경우는 대개 하나 밖에 없었다.

모텔에 가서 섹스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

물론 모텔에서의 섹스가 무서운 건 아니었다. 몇달 전과는 다르게, 자신은 기찬과 숱하게 몸을 섞었고 그 중의 절반 가까이는 모텔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고 요즘같은 날에는 기찬이 귀찮다면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적당히 해결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런 생활이 익숙되어가던 와중에, 그의 손에 이끌려 모텔에 간 적이 있었다.

"쭈그리고 여기다 오줌이나 좀 싸봐라."

그날 기찬은 자신에게 세숫대야를 디밀며 그렇게 말했다.

유라는 질겁하고 발버둥치며 저항했지만 자신은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가 보는 앞에서 엉엉 울며 치부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기찬은 가끔씩 자신을 모텔로 데려가 변태적인 행위들을 이것 저것 요구하곤 했었다. ...심지어 그의 오줌을 입으로 받아낸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자취방에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비명과 저항을 대신 감당해줄만한 장소가 필요한, 뒤집어 말한다면 그만한 잡음을 동반할 일을 저지르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랬기에, 유라는 모든 예상을 벗어난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었다.

와- 와-

삼삼오오 모인 가족들부터 꼬맹이들의 신난 웃음소리까지, 휴가의 계절인 8월의 끝자락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행복함으로 잔뜩 붐비고 있는 이곳은...

그랬다. 기찬이 자신을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놀이동산이었다.

"와, 사람 엄청 많네."

기찬은 주변을 빙글 둘러보며 가볍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그와는 다르게, 유라는 좀처럼 당황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놀이동산? 하지만 갑자기 왜..'

그의 꿍꿍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당황하는 유라의 모습을 눈치챈건걸까, 기찬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 일하는 곳 사장님이 공짜표가 생겼다고 해서 말야."

"..."

"아니 뭐, 그래도 아깝기도 하고 음, 아무튼 오늘은 놀자고 온거니까...너무 걱정말구, 일단 들어가자."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기찬의 말은 사실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손에 이끌려간 유라는 기찬과 함께 아주 '평범하게' 놀이동산을 즐겼고, 그녀의 의심은 유치한 회전목마를 탈 시점에서야 거의 완전히 사라질 수 있었다. 덕분에 유라는 많이 즐거워 보였다. 놀이기구를 타거나 구경을 다닐때면 이따금 수줍게 웃는 모습도 보이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기찬은 오히려 그런 유라를 보며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주 좋았다. 그녀가 웃는게 좋았고, 그걸 바라보며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자신이 좋았다.

그래서 기찬은 더욱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이미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기찬은 점퍼 호주머니 안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스무살도 되기 이전부터 하루에 한갑씩 피어온 자신에게는 담배 다음으로 없어선 안되는게 라이터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녀석이 바로 이 듀퐁라이터였다.

고등학생때 잘나가는 선배가 가지고 다니는게 너무 멋있어보여서 꼬박 3주를 졸라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돈은 냈다, 그것도 30만원이나. 이 가격이면 거저라고 입을 털던 선배 덕분에 1년 넘게 모아온 저금통의 배를 깔끔하게 갈랐었다.

'졸업하면 친한 친구녀석들과 여행가자고 모은 돈이었는데...'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때는 당장의 만족이 더 컸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참 오래되긴 했네.'

물건을 잘 다루는 편은 아니라 여기저기 흠집도 많았고, 금새 찾긴 했지만 몇번은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애당초 살 때부터 깨끗한 상태도 아니었다.

'야! 이거 진짜 싸게 주고 사는거다? 너니까 내가 특.별.히 넘겨주는거라고~'

있는 척 없는 척 온갖 가오를 잡던, 이제는 얼굴도 생각나지 않던 그 선배의 생색들을 걷어내고 나면...라이터는 어쩌면 가짜일지도 몰랐다.

딸깍-

기찬은 라이터를 꺼내들고는 가볍게 불을 땡겼다. 늘 듣던 익숙한 소리가 손아귀에서 퍼져나온다.

하지만 뭐 어때?

최근 몇년동안 가장 아꼈던거고 여전히 불도 잘 켜진다. 진짜가 아니라고 한들, 자신이 들고다닌 시간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 써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런게" 또 하나 생겨버린 것이었다.

기찬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까, 굴곡은 있겠지만 큰 문제없이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있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 노력은 하고 있었다. 담배냄새가 싫을까봐 요즘은 피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크게 짜증을 내거나 하지도 않았고 손찌검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노력이 얼마나 덧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지를, 기찬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어느새 자신은 이런 관계를 바라게 된 것이었다.

"하, 개같네."

담배가 미치도록 피고 싶었다.

하지만 담배 대신, 기찬은 눈으로 열심히 유라를 쫓을 뿐이었다.

*

그렇게 한참을 보낸 기찬과 유라는 잠시 숨도 돌리고 출출한 허기도 달랠 겸, 근처의 푸드코트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야, 요즘은 이런데도 되게 잘 해놨구나.."

기찬은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푸드코트에 새삼 놀랐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놀이동산에서의 매점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허름한 플라스틱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비치 파라솔, 게다가 앉을 의자나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는데...이정도면 왠만한 식당가 못지 않았다.

기찬은 유라의 의중을 넌지시 떠본다.

"어휴, 사람도 되게 많고...그래도 나오니까 나는 좋은거 같긴한데, 넌 어떤지 모르겠다."

"아, 네. 뭐.."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다. 말을 그닥 섞고싶지 않은, 마치 왜 그런걸 물어보냐는 식의 물음은 오히려 기찬을 답답하게만 만들고 있었다.

주문이 끝나고 기다리는 동안의 짧은 텀, 하지만 이런 짧은 시간마저도 어색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기찬은 그 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오늘 괜찮았냐고. 나쁘지 않았냐 뭐 이런걸 좀 얘기해보라니까."

"네, 네...저도 좋았는데요."

약간은 날선 기찬의 되물음에 유라가 황급히 대답을 했다. 눈치가 있는 그녀였기에 지금은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기찬이 너무 다그쳤던 탓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연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아,'

기찬은 한숨이 나왔다.

이런 순순함도 나쁘진 않지만 이래선 평소와 다를게 조금도 없다고 봐야했다. 적어도 오늘은 이런 걸 바란게 아니었다. 이런 반응은 오히려 자신의 기분을 복잡하게만 만들 뿐이었다.

기찬이 알고싶은 건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 솔직한 그녀의 소감을 그냥 알고 싶었다. 어떤건 괜찮았고 어떤건 좀 힘들었다던지 같은, 뭐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 말이다. 원하는 대답을 듣는 것 따위는 어차피 그냥 한번 꾹 쥐어짜기만 한다면야 몇번이고 토해내게 할 수 있는 것들인데...

기찬은 속이 쓰렸다. 유라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오늘 정말 많은 각오를 거쳐서 그녀 앞에 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몰라주는게 너무 힘들었다.

'...잠깐, 힘들다고? 내가..?'

기찬은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걸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고있는지를 깨닫고 만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자신은 눈앞의 유라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구차하게끔 빌붙고 있는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되는 거였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관계가 되어선 안되는 사이였다.

덜컥-

"..나 물 좀 떠올게."

"? 네, 그러세요."

기찬은 수저를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사실 갈증이 난건 아니었다. 목이 막힌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너진 표정이 다시 자리잡을 아주 약간의 시간 말이다.

유라가 잠깐 의아한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다행히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식수대에 도착한 기찬은 일단 물 한잔을 급하게 들이켰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시린 냉수가 목구멍을 쨍하게 깨며 내려가지만, 그럴수록 그의 호흡은 가빠졌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유라의 눈이 도무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항상 유라는 그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몸을 내어주던 그 날에도, 숱하게 당했던 날에도...그리고 쉬어버린 동철의 도시락을 들고와서 엉엉 울던 그때도.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치 여린 동물의 그것과도 같은 유라의 눈망울은 어느새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씨발, 이게 무슨 병신같은...'

기찬은 억지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라의 눈은 더욱 생생히 떠올라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의 불안함이 자신에게도 옮아버린 것일까, 기찬은 이제 어떻게하면 유라를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을지를 식수대 옆에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기찬은 순간적으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

[1시간 전]

와아아-!

바이킹이 움직일때마다 사람들의 짜릿한 비명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온다.

그건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는 듯, 유라의 입에서는 즐거움의 비명이 연신 터져나오고 있었다.

사실 유라에게 놀이동산은 좀처럼 접해볼 수 없는 곳이었다. 어렸을때부터 쭈욱 공주에서 살아왔던 터라, 아빠를 몇날 며칠 졸라야 겨우 가볼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몇시간씩 차를 타고 가야 하다보니, 그 횟수는 한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어릴 때는 차라리 나았다. 어쨌든 조르면 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교복을 입을 무렵부턴, 아빠한테 매달리기도 쉽지 않았다. 창피했던 탓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때부턴 그냥 자연스레 공부에 치여 살았다. 그렇게 힘든 고3 생활을 지나 대학에 오기까지 즐기지 못하고 오로지 참기만 했었다. 이 힘든 터널을 지나면 분명한 보상이 있을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닿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 없이 많은 과제들과 살벌한 청년 실업률로 인한 냉랭한 학과 분위기가 일찌감치 유라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게다가 팍팍한 서울의 물가는 그녀로 하여금 기꺼이 알바의 전선으로 뛰어들게끔 만들었기에, 유라는 좀처럼 청춘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스무살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자잘한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유라에게 이곳은 동심과 현실의 경계선에 선 곳이나 다름이 없었다.

비록 성인이 되서 놀이동산에 처음으로 데려와준 사람이 기찬이라는게 약간 의외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게 그렇게 막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와는 다른 일상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유라는 행복했다.

"꺄아~~!"

스릴이야말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했던가, 꽉 막힌듯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기찬의 꿍꿍이를 의심하던 처음과는 다르게, 유라는 지금 이 시간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

"다음엔 저거 타요!"

바이킹에서 내리자마자 유라는 기찬을 이끌고는 다음 놀이 기구를 향했다.

이런 날은 빨리 움직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꾸물거렸다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대기줄에 버려야할 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생각들이 유라를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빨리요, 빨리~~"

"어휴, 갈테니까 좀 살살!"

애가 타는 듯 재촉하는 유라와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기찬의 모습은, 놀이동산에 있는 여느 커플의 투닥거림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기찬은 살포시 유라의 손을 감싸쥐어 본다. 손 너머로 살짝 놀란 떨림이 전해졌지만 그가 모른 척 계속 움켜쥐고 있자, 유라도 금새 포기하곤 순순히 자신의 손을 내어준다. 그제서야 기찬은 찬찬히 그녀의 손을 느껴볼 수 있었다.

작다, 마주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초라할 만큼 작고 예쁜 손이었다. 기찬은 자신이 한번도 유라의 손을 제대로 잡아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게다가 이렇게나 보드랍고 말랑한 감촉이라니, 유라의 가슴을 주물럭거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믿을 수 없게도 기찬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두근대고 있었다.

떨림은 완전히 그 만의 것은 아니었다. 유라 역시도 기찬과의 교감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형태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기찬과는 다르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두려움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관계가 어그러진 그 이후로 유라는 항상 기찬에 대한 껄끄러움을 가지고 있었니까 말이다. 어떤 날은 그게 강해지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살짝 잠잠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 감정은 일정 수준 이상의 수위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두려움이되 두려움이 아닌, 엄밀히 따지면 오늘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은 기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이 시간이 잠시나마 즐겁다고 생각한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유라는 발목을 잡아채는 동철의 존재를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놀이동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동철에 대한 죄책감도 덩달아 커져가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동철오빠는 힘든 군생활을 보내고 있다, 바로 이런 생각이 그녀를 힘들게 만든다.

'하아,'

유라는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동철과는 놀이동산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같이 영화를 보러간 것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동철의 탓도 있었다. 유독 게임을 좋아하는 동철이었기에 그들의 대부분의 데이트는 PC방에서 이뤄지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게 나쁜건 아니었다, 동철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불만이 아주 없다고 할수는 없었다.

'솔직히 서운한 것도 조금은...'

...가령 며칠 전의 면회같은..

그 생각이 든 순간, 유라는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믿을 수 없게도 지금 자신은 동철을 탓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굴이 굳는다. 식은땀이 났다.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서운하다 하더라도 동철은 자신의 남자친구였다. 게다가 잘못은 오히려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데...동철을 미워할 자격도 없는 자신이 그를 탓하고 만 것이었다.

'정신차려, 한유라..!'

유라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나서 뛰어가는 어린애, 아마 부모님과 나들이를 왔겠지.

대단위로 움직이는 가족도 보인다.

그리고 즐거워 보이는 두 남녀, 아마 연인이겠지.

손을 꼬옥 마주잡은게 아주 익숙한,

...그래, 마치 지금의 나처럼.

유라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두툼한 손이 자신을 감싸쥐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손은 동철의 손이 아니었다. 유라는 자신을 감싼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시각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오감 모두가 히미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유독 코 끝을 맴도는 향기가 있었다.

바로 기찬이었다. 며칠 전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그때 맡았던 셔츠 향기가 자신의 코끝에 맴돌았다.

"왜그래?"

"아, 아니에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기찬이 말을 걸어왔고, 유라는 황급히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무어버린다.

"빨리 가자. 느긋하게 굴다간 줄을 엄청 오래 기다려야할걸?"

기찬이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그가 자신에게 와서 박힌다. 여전히 그가 싫었지만, 이젠 좀처럼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슬프게도 어느새 기찬은 자신의 마음 속 한켠에 자리잡아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밀쳐내야 하는데, 진작에 그랬어야하는데..'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로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아마도 그 날이었겠지...

자신이 맘껏 울수 있게 스스로의 품을 내어줬던 바로 그 면회날, 그 날 기찬은 자신의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말았을 것이다.

영원히 미워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비록 육체적인 쾌락에는 어쩔 수 없이 헐떡이더라도 마음만은 여전히 그를 저주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유라는 기찬의 손을 살짝 움켜줘본다. 조금은 거칠지만, 이내 따뜻함이 느껴진다. 마치 그것은 기찬이 자신과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단단한 벽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는데, 몇겹의 벽을 그를 향해 세워갔는데 어느새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래, 어느새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네, 우리 서둘러요."

유라는 그래서 그냥 쓰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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