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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X년 8월 21일 10:13 am>
늦여름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내려쬐는 햇빛은 모두를 짜증내게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물며 그게 휴가의 끝과 맞물린 담에야 웬만한 마음가짐으론 극복하기 힘든 무언가를 품고 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교묘히 빗겨간 사람은 드물지만 있었고, 운좋게도 기찬은 그 부류에 한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 음울한 어른들의 사정 따윈 그에겐 전혀 다른 별 세상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자신은 휴가에 쩔쩔매는 어른은 아니었거니와, 수험에 머리를 싸매는 고3과도 달았다. 휴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에겐 나름의 직장이 있었고, 매달 들어오는 분명한 수입도 있었다.
게다가 여자도 있었다.
그 모든게 그를 무더운 날씨속에서도 온전히 지켜내고 있었다.
차량 안을 울리는 라디오, 연배가 있어보이는 남성의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방정맞음과 그윽함이 섞여있다.
흐응-
기찬은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사실 그는 라디오를 잘 듣지 않았다.
셀수 없을 만큼 많은 TV채널에 질린 사람들이 오히려 라디오 쪽으로 관심사를 돌리고 있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남들이 쉬며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일하는 자신이 들을 수 있는 라디오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못듣는 거에 가깝나?'
어쨌든 그런 자신이었기에 낯익은 진행자의 목소리는 오히려 그를 더욱 낯설게만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다스런 라디오 DJ의 잡담이 지나가자 곧 스피커에서는 쿨의 해변의 여인이 흘러나왔다.
기찬이 좋아하는 노래였다.
"뭐, 좋네."
흥겨운 리듬과 익숙한 멜로디는 그의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게 만들었다. 지겨운 라디오를 끄지 않고 켜둔 보람이 이제서야 나타난 것이다.
우발적으로 나온 면회 계획이었지만, 막상 시작하고보니 기찬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엔 막막했다. 자신과 유라는 서울에, 동철은 부산에 있었으니 오가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처음엔 그까짓 약속, 그냥 지키지 말아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이제와서 말을 바꾼다고 한들, 유라가 자신에게 대들 수도 없을테니 모든게 다시 편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이 뇌리에 맴돌았다.
면회 가자는 말에 깜짝 놀라던 표정과 이윽고 환하게 피어나던 행복의 모습 하나하나까지도 말이다.
결국 반나절 가까이 고민한 끝에, 기찬은 그녀를 데려다 주기로 마음 먹었다.
가장 먼저 지금 일하는 주점의 사장님께 전화를 드려서 사정을 설명드렸다. 다행히 사장님 내외분도 며칠간 늦은 휴가를 떠날 참이었다며, 그동안 가게를 쉬는걸로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시간의 여유가 생긴 기찬은 일정을 넉넉하게 잡기로 했다. 4~5시간을 달려서 얼굴보고 올 바에야 그냥 1박 2일로 넉넉하게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당장 유라에게 전화한 그는 계획을 설명했고, 차근차근 이해한 그녀가 거기에 동의하므로써 비로소 둘의 짧막한 여행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구해야할 건 이동 수단이었는데, 이건 의외로 쉽게 해결됐었다.
석철이 녀석이 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기찬과 석철은 약간의 불화가 있긴 했었다. 유라와의 항문섹스를 성공한 기찬이 그만, 석철에게 자랑하듯 떠벌린게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그 이후로 석철이는 마치 자신의 조언이 아니었으면 실패했을 거라는 둥의 당당히 자신의 지분을 주장해왔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대놓고 유라의 몰카를 찍어줄 것을 요구해왔던 것이었다.
녀석의 지저분한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찬이었지만 차는 꼭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라와의 은밀한 사생활을 보여주고픈 마음도 없었던 기찬은, 한가지 꾀를 냈다.
「 야, 내가 진짜 블랙박스에다가 찐-한거 하나 남겨둘테니까, 그거먹고 떨어지는거다. 오케이?」
「 콜! 콜, 콜! 흐흐흐!」
물론 녀석이 생각하는 수위에는 한참 모자라겠지만 당장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석철은 헤프게 웃으며 기찬의 딜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중에 가볍게 키스하는 정도로만 블랙박스에 남겨줄 생각이었다.
'아마 나중에 확인하면 길길이 날뛰겠지?'
기찬은 실실 웃으며 악셀을 강하게 밟았다.
쇠를 깎는 듯한 RPM 소리가 들썩이며 차를 밀어부친다. 그러자 석철의 빨간색 아반떼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군 시절을 운전병으로 보낸 기찬이었다. 당연히 차량에는 빠삭했지만, 오랜만에 잡아보는 운전대는 그런 그도 어쩔 수 없이 흥분하게끔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렇게 국도를 따라 내려온 길 저편에는 이름모를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찬은 운전석 쪽의 창문을 내렸다. 짠내를 담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차량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온다. 마치 바다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에 그는 속력을 천천히 줄였다.
사실 바다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고향이 부산이었던 기찬에겐 바다는 오히려 질릴 대상이었지만,
"와아!"
유라에겐 그렇지 않았다. 바닷가의 물비늘이 잘게 부서지며 그녀의 눈을 훔쳤던 모양이다.
보기 드물게 놀라며 창밖을 훔쳐보는 그녀의 행동에 기찬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독한 척 굴지만 유라는 매우 덤벙거리고 잘 웃는 성격의 평범한 여자애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이 한발짝 떨어져야만 가능했다.
내가 장난을 걸면 웃지 않았다. 내가 간지럽혀도 참아냈고, 내가 툭-하고 건드려도 무시하고 제 갈길만 가는게 유라였다.
하지만 내가 한걸음만 물러나면 그녀는 다시금 생생하게 웃는 꽃이 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까전부터 연신 유라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건만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아니, 이건 무시라고 봐야했다.
허벅지를 연신 왕복하는 손 끝에 스커트 자락이 걸린다. 이어서 기찬의 손이 그녀의 치마 틈으로 파고 들었다.
어차피 노는 손이었다. 수동으로 운전을 배운 자신에게 오토는 그저 편하고 지루한 핸들놀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은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고, 마침 자신에겐 충분한 놀림감도 있었다.
팬티도 없었기에 유라의 까슬한 음모가 바로 손에 닿았고, 조금만 헤치고 지나가자 촉촉한 질 입구에 도달했다.
기찬은 기다리지 않고 단숨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
움찍거리는 유라를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껄떡거렸다.
내 몸보다 더 잘아는 곳이었기에, 뻑뻑했던 그곳은 곧 자연스레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유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기찬을 제지할 순 없었다.
행여나 자신이 그를 거슬렀다간 어렵게 받아낸 면회의 기회마저 당장이고 엎어질지도 몰랐다.
실제로, 어젯밤 기찬은 모텔에서 자신에게 몇번이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다.
"으응..."
유라는 다리를 슬쩍 오므리며 난감함을 표했다.
하지만 그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행여나 기분이 상해서 관두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교태를 부린다.
어차피 이정도는 기찬이 한 것들 중에서 경미한 것에 속했다. 최대한 그가 원하는대로 하게 놔두는게 자신에게는 훨씬 유리했다.
유라는 헐떡이는 와중에서도 아래를 내려다 봤다.
자신의 몸에 착 달라붙어있는 빨간색 원피스, 그 옷은 여전히 자신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기찬이 이 옷을 들고왔을때만해도 얼마나 싫다고 했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동철오빠를 만나러 가는 날인데, 정말 예쁘고 수수한 옷들도 많은데 하필 이런 옷이라니..
유라는 다른 옷을 입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만, 결국 기찬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내가 힘들게 구해온 옷인데 감사하다고는 못할 망정, 감히 반항을 해? 내가 봤을땐 유라씨는 아직 글러먹었네요, 글러먹었어!'
오히려 화가 난 그는, 면회 당일날 팬티도 입지 말것을 자신에게 명령했다.
그런 와중에 기찬의 손은 더욱 거칠게 치마 속을 파고들었고, 유라의 허벅지를 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작은 천조각은 너무도 허무하게 말려 올라가고 만다.
기찬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기로 마음 먹고는 장소를 물색했다. 비록 환한 아침이긴 했지만 인적이 드문 국도였기에 만만한 곳은 어디든지 있었고, 그는 금새 차를 멈출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단 말야. 흐흐~"
기찬은 더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대로 유라를 덮쳐갔다.
"자, 잠시! ..아악..!"
그렇게 그 좁은 공간은 끔찍한 비명과 헐떡거림으로 채워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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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철이 보인다. 분명 자신의 앞에 서있는 그는 동철이 확실했다.
그가 오기만을, 그를 만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유라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핑- 하고 돌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올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동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동철 오빠!"
그를 앞에 두고 더이상 기다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라는 그렇게 동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유, 유라야!"
"오빠, 오빠아...으아앙!"
굳이 이런 기쁜 날까지 망치고 싶진않아 나쁜 감정들은 꾹 눌러참고 있었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동철의 품에 안길 때부터 그 모든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나는 케케묵은 군복의 냄새가 어색했다.
마른듯 하면서도 탄탄한 그의 품도 낯설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세도, 자신을 감싸는 팔의 두께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자신을 힘줘서 껴안아주는 동철 덕분에, 유라는 그를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회포를 요란하게 풀어낸 두사람은 약간의 머쓱함을 애써 지우며 면회실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동철은 유라를 살갑게 다루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유라야, 왜 그렇게 많이 울었어? 최근에 힘든 일 있었어? 뭐 아님 알바가 힘들다거나.."
특히 그는 유라가 운 것이 신경에 많이 쓰인듯, 평소의 생활에 대해 주로 물어왔었다.
"아, 아냐, 오빠. 그냥 너무 좋아서 울었어..~"
그런 동철의 물음을 유라는 대충 얼무어버린다.
"정말이야, 정말 너무 좋아서..헤헤~"
정말이었다. 동철을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렇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았기에, 정말 저절로 눈물이 나왔을 뿐이다.
기찬의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아니, 지금만큼은 그를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길어봤자 오늘 뿐인 면회다. 그와 마주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최대로 잡는다고해도 4~5시간이 고작일 것이다.
유라는 그 사실에 가슴이 울컥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부산을, 그것도 겨우겨우 1박 2일에 걸쳐 힘들게 왔다.
1분 1초의 짧은 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유라는 자신의 두눈에 동철을 오롯이 담아내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다음에 만날 그날까지 어떻게는 버티고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들어가자, 유라야."
어느새 둘은 면회실에 당도했고, 동철은 먼저 유라를 안으로 에스코트 했다. 그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유라는 여유로운 동철이 새삼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비록 몇달 전이었지만, 지난번 휴가를 나온 그에게선 조금의 여유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무언가의 눈치를 보거나 초조한 듯 굴며 이따금 신경질을 내곤 했었는데...
군 생활이 많이 익숙해진 덕분인 걸까, 유라는 그런 동철의 변화가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푼 마음을 간직한 채 면회실로 들어선 유라는 눈 앞의 광경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 좁은 공간을 바글바글 채우고 있는 사람들, 면회실 안은 이미 수많은 면회객들로 꽉차서 얼핏 보더라도 쉽게 앉을 자리를 찾기는 힘들어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유라와 기찬이 부대에 일찍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의 드라이브에 오히려 신난 기찬이 자신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어제 하루를 써버렸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침대에서 집요하게 괴롭혀댄 탓에 유라는 아침에도 겨우겨우 힘들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러다보니 시간은 점점 미뤄졌고 정오께가 되서야 부랴부랴 부대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조급해진 유라는 행여나 빈 자리가 있는지 면회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도무지 앉을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해, 직접 싼 도시락도 챙겨 왔는데..'
유라는 발을 동동 굴렸다. 얼씨구나하며 먹어치우려고 구는 기찬을 힘겹게 막아내고 지켜낸 도시락인데, 이러다간 동철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될게 뻔했다.
"흐음, 자리가 없네~"
그때, 동철이 나섰다. 그는 면회실을 한번 훑어보더니, 한쪽 구석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느리지만 그러면서도 여유가 충분히 배어나오는 그 발걸음이 어느 조그만 테이블 앞에서 멈췄다.
"추, 충성!!"
갑자기 터져나오는 경례소리에 유라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동철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낮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이쿠, 귀 떨어지겠다. 6 생활관에서 그래도 교육은 잘 시켰네, 하하~"
"네, 그렇습니다!!"
동철의 앞에는 잔뜩 긴장한 군인 한명이 서 있었다. 우당탕거리며 일어난 걸 봤을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건 그가 틀림 없었다.
'이등병..'
그의 가슴에는 작대기 하나만이 외롭게 달려 있었다. 유라는 본능적으로 그가 동철의 후임인 것을 알아차렸다.
"나 알지? 나 3 생활관."
"네, 넵! 이..동철 상병님!"
잔뜩 군기가 들어간 이등병의 대답에 동철은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완전 A급이네 A급!"
"가, 감사합니다!"
둘이 그렇게 떠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라는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어떤 벽과도 같은 것이 자신과 동철의 사이로 뛰어든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괜한 소외감만 느낄 것 같아 유라는 이리저리를 쳐다보던 중,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마도 저 이등병의 여자친구가 아닐까?
그녀는 자기만큼이나 이 상황이 어색한듯 보였고, 그 이등병 만큼이나 떨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암튼 그러니까, 내가 오랜만에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아~ 이게 자리가 없는거야. 보니까 면회도 거의 끝나가는거 같은데 자리 좀 비켜줄래?"
"..네, 넵 알겠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동철은 지금 자신의 후임의 자리를 뺏고 있었다.
분명 동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요령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함부로 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런 순수한 모습 때문이었는데...
유라는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도무지 그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동철의 뒤에 숨어있는 동안, 대충 테이블을 정리하는 소리와 함께 그 이등병과 여자친구가 자리를 떠났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주 가늘게 들린다.
유라는 머리가 핑-하고 도는 것만 같았다.
"유라야, 앉아 앉아."
어느새 의자에 걸터앉은 동철오빠는 자리에 앉으라며 자신에게 권하고 있었다.
"아, 으응.."
어질어질한 마음을 잠시 억누르곤 유라는 의자에 앉았다.
'왜, 왜 그런거야 오빠..?'
동철에게 하고싶은 말은 많았지만, 유라는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가시를 겨우 삼켜낸다. 어떻게 온 면회인데, 내가 어떤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온 건데, 여기서 망칠 순 없었다.
"오빠 이거, 내가 도시락 싸왔어."
그리곤 준비해온 도시락을 힘겹게 테이블로 올려놓았다.
"에이, 뭘 이런걸 잔뜩 싸오고 그래~"
미안함과 쑥쓰러움이 잔뜩 배긴 목소리가 동철에게서 흘러나온다. 그런 그의 머쓱함에 유라는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동철오빠, 역시 우리 동철오빠는 착해!'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행동은 분명 자신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냥 군대에서 오래 있다보니까, 군대는 계급사회니까 오빠도 약간 변했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오빠가 틀림 없...
"에이, 이런거 말고.. 유라야, 뭐 피자나 치킨 이런건 없어?"
하지만 그런 유라의 얄팍한 기대를 뭉개버리듯, 동철은 그녀의 도시락을 테이블 한켠으로 밀어넣는다.
"여기 배달키시면 치킨 정도는 갖다주니까. 흐흐, 오랜만에 사제 기름 맛좀 봐야겠는데~ 유라야 휴대폰 좀 줘봐!"
"어? 으,응 오빠. 여기..."
유라의 스마트폰을 잽싸게 뺏어든 동철은 면회실 테이블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치킨집 번호를 눌러 치킨 두마리를 시켰다.
"이 집이 졸라 맛 없고 비싸긴 한데, 그래도 사제 음식이니까 뭐..~ 아, 유라야 치킨값 정도는 있지?"
"으응, 5만원 가지고 왔어 오빠."
"휴 잘됐다! 어휴, 오늘도 맛 대가리 없는 짬이나 처먹어야하는 줄 알았는데, 유라 네가 면회 와서 정말 살았지 뭐야. 고맙다, 정말 고마워!"
치킨이 먹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유라는 그렇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두마리는..
그걸 먹고나면 내 도시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미 치킨으로 배가 부른 그가 도시락도 먹을 수 있긴 한걸까.
동철은 멸치볶음은 유난히도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가 좋아하는 멸치볶음으로 주먹밥이랑 유부초밥을 만들어서 잔뜩 싸온건데,
관심도 없는 그의 행동에, 유라는 마음이 착잡해져만 갔다.
"오늘 그.. 흠흠, 오늘 차림에 신경 좀 썼는데?"
면회실 자리도 구하고 치킨도 시키고나니 여유가 생긴 동철은 유라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빨간 원피스와 옅은 화장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은, 동철의 시선을 부여잡기엔 충분했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한 걸까, 동철은 사뭇 도발적인 유라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으응. 근데, 나한테 이런 옷은 좀...안 어울리지?"
그의 시선에 부끄러워진 유라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움츠린다.
사실 동철은 옛날부터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했었다.
긴 하얀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호기롭게 공언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유라는 중학생일때부터 동철을 자신의 마음에 담고 조금씩 키워왔었던 것이었다.
'이번 면회때는 꼭 그가 좋아하는 옷으로 오고 싶었는데...'
하지만 자신은 기찬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가 입으라고 던져준 옷, 마치 너는 그런 야한 옷의 수준 정도 밖에 안된다는 듯이 굴던 기찬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동철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죽을만큼 창피한 유라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딴 옷,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었다.
"아냐, 아냐! 완전 잘 어울리는데? 진짜 끝내준다!"
하지만 유라의 예상과는 다르게, 동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평소 여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인 군인에게는 이성의 체취 하나하나도 자극적인 것이 되곤 했었다.
오죽하면 '군대 내무반에는 찢겨진 MAXIM 잡지가 그렇게나 많다'는 소문이 파다했겠는가.
하지만 웃프게도 그것은 사실이었고, 매일 밤마다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군 장병들이 섹시한 모델이 나온 잡지를 통해 스스로 욕구를 해소하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걸 어디서 구해서 입은거야?"
"아, 그 친구가 남자들은 이런거 좋아한다고 해서..."
"이야, 완전 새끈한게..,흐흐! 그 친구 분한테 센스 넘친다고 꼭 전해주라."
동철은 이런 옷을 입고온 유라가 정말 고마웠다.
'진짜 개 쩐다, 저런 애가 내 여자친구라니..'
사실 동철도 몇번인가 MAXIM 잡지를 말아쥐곤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라는 역시 그 잡지 모델들 못지 않게,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훨씬 더 섹시하게 느껴질만큼, 지금의 그녀에겐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동철은 의자를 옮겨 유라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좁은 테이블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곤 유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면회실을 둘러봤다.
그럴때마다 동철은 다양한 장병들과 눈이 마주쳤다.
더러는 후임이었고 몇몇은 자신의 선임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잘 모르는 타 대대의 아저씨들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유라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눈 안에는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가 마구 섞여있었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런 여자가 내 여자라고!
비록 입밖으로 내뱉는 말은 없었지만, 그 순간 동철은 분명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반면 유라는 혼란스러웠다. 처음엔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낯선 장소가 점차 부담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물며 익숙했던 이의 낯선 모습마저도...유라는 한 발자국씩 점점 밀쳐지고 있었다.
동철은 마치 자랑하듯 자신을 다룬다.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가 하고 있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너무나 싫은, 정말 죽을만큼 싫지었만 끔찍할 만큼 익숙해져버린.
동철은 지금, 너무나도 기찬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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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를 나선 유라는 미리 약속했던 장소로 발을 옮겨 어렵지 않게 기찬을 만날 수 있었다.
"면회는 잘 하고 왔어?"
담배꽁초가 차량 재떨이를 수북히 채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을텐데, 의외로 기찬은 면회를 잘 하고 왔는지를 먼저 물어왔다.
"네, 덕분에요. 오래 기다리셨을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유라는 진심으로 기찬에게 고맙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러가지 일이 있긴했지만, 그는 약속대로 자신이 면회를 할 수 있도록 데려다주고 또 데려가기 위해 긴 시간을 홀로 기다려 줬으니 말이다.
"기다리는게 뭐라고... 아, 됐으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기찬은 머쓱했는지 괜시리 툴툴대고 말았지만, 이상하게도 유라에게는 오히려 그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맛있는거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죽겠어."
"앗,"
유라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왔었고, 지금이 오후 5시가 약간 지나고 있었으니 기찬이 저렇게 구는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싶었다.
"죄, 죄송해요. 금방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유라는 그렇게 말하곤 차의 뒷좌석에 들고 있던 짐을 구겨넣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짐을 싣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굳어버린다.
도시락이다.
유라는 최대한 티 안나게 도시락을 집어들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손잡이 위로 묵직한 감촉이 손 안에 그대로 느껴진다.
결국 기찬은 자신의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아니, 한번 열어보지도 않았다.
치킨 두 마리에 정신이 팔린 그에겐 차갑게 식은 이 도시락이 얼마나 촌스럽고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겉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다시금 그녀를 덮친다.
"..뭐야?"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거 안 먹었어?"
자신이 잠깐 미적거리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기찬이 도시락통을 뺏어 든 것이었다.
"아..."
어젯밤 기찬이 손도 못대게 꽁꽁 싸맨 도시락인데, 아무도 먹지 않은 그 도시락이 유라는 그렇게나 부끄러웠다.
"다, 다른 맛있는거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배가 불러서 이건 그냥..."
초조함에 자꾸만 고개가 땅으로 처박힌다.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딸깍-
기찬은 그 자리에서 바로 도시락 통을 열었다. 역시 예상대로 동철은 도시락을 한번 열어보지도 않았는지, 도시락 안은 주먹밥과 유부초밥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났다.
기찬은 본능적으로 그 냄새가 주먹밥에서 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모텔 냉장고에 넣어두고 별짓을 다했다 한들, 이미 이틀이나 지나버린 도시락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 여름, 면회 가자마자 바로 먹었으면 또 모를까 지금이면 슬슬 맛이 가야하는게 당연했다.
"역시..."
울적한 목소리가 들린다. 유라였다. 아마도 냄새가 거기까지 퍼졌는지, 그녀도 도시락의 상태를 눈치챈 것 같았다.
"어휴,"
기찬은 한숨을 푹 내쉰다.
동철이 이제 상병이던가? 뻔했다, 십중팔구 피자나 치킨같은 사제음식이나 잔뜩 시켜서 배를 채웠겠지.
자신도 군생활을 했었고 그렇게 '사제음식'이라는 것에 환장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넘어가기엔...유라가 너무 불쌍했다.
그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덥썩-
그래서 기찬은 주먹밥 하나를 꺼내서 입으로 쑤셔 넣고는 마구 씹어댄 것이었다.
시큼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게다가, 멸치인건가? 젠장, 멸치 제일 싫어하는데...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유라가 깜짝 놀라든 말든, 기찬은 우걱대며 나머지들도 깨끗이 먹어치웠다.
"..."
벙찐 유라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기찬은 딱히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내가 먹게 놔두지.."
내가 왜 이걸 먹었는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툴툴대는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찬은 얼른 재촉해서 유라를 차에 태우곤 악셀을 거세게 밟았다. 영내 속도는 30Km/h라는 표지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는 재빨리 부대를 빠져나왔다.
슬픔은 쉽게 전염된다고 하던가,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바꿔버리고 싶었다.
"우리 그래도 부산까지 왔는데, 맛있는거 먹고 가야지."
이게 아닌데,
말이 자꾸만 빙빙 돈다.
"그, 회 먹을 줄 알지?"
"네, 저 괜찮아요."
기찬은 대화가 툭툭 끊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답답할 때는 있었지만 적어도 그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상관 없었지만, 오늘처럼 '타인'에 의해 이루어진건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기찬은 갓길 아무데나에 대충 차를 멈췄다.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입 밖으로 꺼내놓을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도 말이다. 자칫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관계가, 아슬하게 맞춰둔 균형이 모조리 무너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고개나 끄덕이는 유라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지켜보는 이쪽의 속에서는 천불이 난 것 같았으니까.
그래, 아마 그래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거겠지.
"이럴려고 데려온 건 아니었는데...미안하다."
결국 막아왔던 것이, 가슴 꽁꽁 싸매고 눌러둔 '무언가'가 입으로 삐져 나와버렸다.
"..."
예상하지 못한 기찬의 사과에 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로, 아마 절대로 들을 수 없을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언젠가 기찬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닿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을까하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그걸 연명줄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던 철 없는 자신은 진작에 없어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그럴거라도 생각했는데...
"그, 이럴땐...그냥 울어도 돼."
기찬의 쏘아올린 말 한마디는 쏜살같이 날아와 여린 자신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는다.
"..흑, 으흑..."
유라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슬픈 감정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눈물만큼이나 마구 솟아 올랐다.
미웠다. 기찬이 너무 너무 미웠다.
왜 나한테 그렇게 나쁜 짓을 한건지, 그 대상이 왜 하필 자신이었는지...
유라는 아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기찬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찬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는 다독였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그것은 금새 사그라 들었고, 그의 품에는 약하고 힘겨운 작은 소녀만이 남았다.
"흑흑...으아앙!"
굵은 눈물이 방울되어 유라의 볼을 타고 내린다. 녹아버린 감정으로 가득찬 서글픔이 눈물을 빌어 쏟아졌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의 의미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고,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그 사실을 깨닿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랬어.. 왜, 왜..!'
동철의 서운했던 행동들이 마구 떠오른다. 자신의 도시락을 테이블 한켠으로 밀쳐두고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그의 무심한 모습이, 쉬어버린 자신의 도시락을 묵묵히 비워내던 기찬이 오버랩되며 자신의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믿을 수 없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찬보다도...그가 더욱 미웠다.
유라는 더욱 깊숙하게 기찬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매일 괴롭혀온 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찬의 품이 자신에겐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찬은 아무말 없이 꼬옥 껴안아주었다.
그날 밤, 그 둘은 그 동안의 그 어떤 날보다도 가장 평범하고 조심스런 섹스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