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0)

02 <201X년 4월 14일 11:00 am>

"선배님 맞으시죠? 정말 빨간 티에 청바지 입고 오셨네요, 헤헤!"

"아, 유라씨?"

"네, 저 맞아요!"

'뭐, 뭐가 이렇게 예뻐??'

반달처럼 휘어지는 그녀의 웃음에 기찬은 깜짝하고 놀란다.

솔직한 마음으론 페이스북의 사진들은 약간의 보정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아래로 잡았는데, 유라의 실물은 계정사진 딱 그대로였다.

"와, 예쁘시네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기찬은 아차 한다. 방금 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안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분명 헤실대는 표정으로 눈 앞의 그녀를 몇번씩 훑었을 것이다.

기분 상했다며 돌아간다고 하면 어쩌지?

기찬은 초조해졌다.

"앗, 감사합니다~ 헤헤."

유라는 그걸 당황하지 않고 조신하게 받아준다.

'솔직히 너무 아깝잖아 이건.'

예비군에서 만든 얇은 인연일 뿐이다. 반쯤의 호기심으로 성사된 만남이었기에, 그저 인생의 선배인 척 허허- 웃으며 그냥 적당히 밥이나 한끼 사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빠르게 바뀌어갔고, 기찬은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회를 두텁게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사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지는게 참 어려울텐데 흔쾌히 도움 주신다고 하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메세지랑 사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했는걸요. 오히려 제가 도울 수 있는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헤헤~"

헤프지만 싸구려는 아닌 유라의 웃음에 기찬은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최대한 내색 않고 말을 이었다.

"큰 도움이죠. 에고, 암튼 지난번에 제가 보낸 문자 받으셨죠?"

"아, 네!"

"그, 아무래도 제가 부산에서 바로 상경했다보니 아는게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뭐.. 아무 동네에서 비비고 사는거야 문제 없는데, 솔직히 방값은 좀 부담이 되서... 그나마 대학교 근처가 방값이 싸다고 하던데 서울에 대학이 한두개가 아니더라구요. 근데 아는 사람이 있어야 뭘 물어보죠, 하하."

"아.."

끝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뭉텅거리며 으스러졌다, 기찬은 점점 말을 먹어 들어간다.

분명 어젯밤에 확인했을땐 그럴싸 했던거 같은데...

학생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방을 구해달라고, 그것도 문자 몇번한게 전부인 사람한테 이러고 있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궁핍하기 그지 없었다.

'아, 몰라. 대충 넘어가면 되는거 아냐..!'

어차피 "뭘" 하겠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하겠냐가 그의 주요 관심사였기에, 기찬은 그냥 밀어부쳐갔다.

"솔직히 제가 갑자기 연락해서 당황하셨죠?"

"네?"

"예비군 갔을때 동철이가 자기 여자친구가 서울에서 학교 다닌다고해서 연락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좀 부담되시는거 같아서..."

"아뇨 아뇨!"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가 내심 반가웠지만, 기찬은 계속해서 마음에도 없는 엄살을 부렸다.

"에이, 저라도 귀찮았을걸요. "

"저 진짜 괜찮아요, 연락 잘 하셨어요!"

"하하, 말이라도 감사하네요."

보면 볼수록 괜찮다. 얼굴도 예쁜데 성격은 그 값을 훨씬 상회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찬은 속이 쓰렸다. 자신이 동철보다 못한게 없는거 같은데... 설마 같은 고향이라는 이유로?

생글생글 살갑게 웃는 유라의 모습에 기찬은 흔들린다.

"아, 안그래도 제가 몇군데 알아봤는데요."

"그래도 마냥 서서 얘기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자리를 옮겨요."

밀이 길어질 것 같자, 기찬은 적당히 유라를 달래서 자리를 옮겼다.

간단히 끝내고 이른 저녁이나 먹자고 생각했던 기찬은, 그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그 덕분일까, 넉넉잡고 한 두시간이면 끝났을 일들이 계속 길어지고, 결국 해가 뉘역뉘역 질때가 되서야 둘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유라씨 미안해요.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배 안고파요?"

"음~ 조금 고픈거 같긴 한데.."

"대신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제가 맛있는 거 대접할게요, 이리와요."

"우와, 감사합니다~~"

기찬은 그런 그녀를 이끌고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오늘 진짜 도움 많이 됐어요."

"어휴, 별 것도 아닌걸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하하, 술 한잔 받으세요."

"앗, 네네."

"역시 삼겹살에는 소주라니까요."

기찬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술이라도 좀 들어가야 분위기가 유연해지고 거기서 좀 더 많이 마시게 한다면 뭔가 건덕지가 나올텐데,

행여 그녀가 술을 못마신다고 뺀다면 그로써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사라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다행히 유라는 곧잘 술잔을 받았고 둘은 그렇게 술잔을 기울여갔다.

"후아, 정말 잘 먹었습니다~~"

"뭘요, 저야말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죠."

시종일관 밝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기찬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매년 수도 셀 수 없는 커플들이 군대로 인해서 떨어진다.

잘 버티는 경우도 있지만 괜히 일말상초라는 말이 있을까, 적당한 타이밍에 자연스레 헤어지는게 보통이었다.

동철이 갓 일병을 달았으니,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이 둘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봐야 타당했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어도 자신이 잘 참고 유라와의 연락의 끈을 유지해간다면 분명 기회는 있었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괜찮았다. 이런 여자라면 옆구리에 끼고 번화가를 활보해도 전혀 꿀릴게 없을 것만 같았다.

불가능은 아니다. 사실 스스로가 하기에 따라 다음 자리를 차지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절대 아니었다.

'새끼, 휴가 나올때마다 존나게 따먹겠지..'

동철이 녀석이 휴가라도 나온다면 안봐도 뻔하다.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유라를 물고 빨지 눈에 훤했다.

뻔하다.

남자 놈들, 더군다나 군바리 새끼들 생각이야 하나같이 여자 밖에 없었다.

그나마 고참들이야 맥심 하나 말아쥐고 화장실로 가면 그만이었지만, 짬 없는 일이병으로서는 휴가만 간절히 기다릴 수 밖에 없으니까.

'하악..하악.. 동철아 더..더더..!'

기찬은 녀석을 향해 가랑이를 활짝 벌리는 유라를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왜 하필 유라일까, 왜 내겐 이런 인연이 금방 오지 않았을까.

기찬은 스스로가 아주 쿨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요즘 세상에 과거 있는 여자야 흠도 아니었고 즐겁게 사랑하다가 새로운 사랑을 찾는게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그녀만큼은 이상하게도 예외였다.

유라가 자기에게 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정액을 받아내야하나 따져보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그까짓 군바리, 그런 보잘 것 없는 군바리를 기다려주는 유라가 대단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것까지 자기가 배려해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더러워져서 온다면 그까짓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오늘 그냥 밀어부쳐야겠다.'

애당초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겠다는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조금 무리하더라도 오늘 뽕을 뽑기로 기찬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기 먹어서 입이 텁텁한데 우리 입가심이나 하러 가요."

기찬은 유라를 이끌고 아까 봐뒀던 칵테일Bar로 들어갔다.

유라는 자신의 손을 이끄는 기찬의 행동에 주춤했지만, 그가 향하는 곳이 칵테일Bar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고기를 워낙 좋아했던 동철이었기에, 그들의 데이트는 주로 양 많고 싼 고기뷔페 등이 순위에 꼽히곤 했다.

물론 그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행복했고 재밌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장소가 무드까지 제공해 주진 않았다.

'이런데는 한번도 온 적이 없는데..'

모든게 신기했던 그녀가 가게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사이, 기찬이 능숙하게 칵테일 한잔을 주문했다.

투명한 녹색의 칵테일이 그녀 앞에서 일렁인다.

"와, 예쁘다.."

유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칵테일에 그만 탄성을 지른다. 이게 마실 수 있는 술인가? 아니, 그냥 마시기엔 너무 아까운거 같은데...

"예쁘죠? 이건 마시기도 편할거에요."

유라는 기찬의 말을 따라 칵테일 잔을 입에 가져가댔다.

"마, 맛있어요!"

맛있다, 정말로 맛있었다. 이런 술이 있나 싶을 말큼 달콤하고 시큼한 과일의 향이 입 안에서 터져나갔다.

"하하, 그렇죠? 저도 사실 술은 잘 못하는 편인데, 칵테일은 마시기 편해서 종종 들려요."

"아.."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불 붙었어요!"

"하하, 불 붙어서 나오는 칵테일이에요. 이건 불 때문에 그냥 마시면 안되니까 음..."

기찬은 바텐더에게 뭐라뭐라 말을 건낸다. 바텐더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군말 없이 빨대를 건내줬다.

"빨대로 드시면 괜찮아요."

기찬은 유라에게 빨대를 건냈다. 하지만 푸르게 치솟는 불이 무서운지 그녀는 칵테일을 앞에 두고 주저하고 있었다.

"이거 불 꺼지면 안돼요, 빨리 마셔야하는데!"

"아, 앗 네!"

유라는 황급히 빨대를 칵테일잔에 담궜다.

"잘 드시네요, 하하하."

그것을 지켜보는 기찬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저열함이 활짝 피어올랐다.

그 후로도 기찬은 유라에게 게속해서 다양한 칵테일을 권했고, 그들이 칵테일Bar에서 나온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온전히 서 있는 사람은 기찬 한사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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