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훌림목 분류: 네토라레
01 <201X년 4월 10일 03:40 pm>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하시겠어요?"
"누구..?"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여린 목소리에는 낯설음으로 잔뜩 움츠려 있었다. 하지만 기찬은 미리 예상한 듯 피식 웃고는 자연스레 말을 이어간다.
"그, 2주 전쯤에 남자친구분 메세지를 제가 대신 보내줬던 예비군인데.. 이동철 일병이 저희 생활관 조교였거든요."
"아, 아! 기억나요! 그때 연락주셨던 예비군 선배님이시네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더이상의 낯설음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어쩔줄 모르는 고마움으로 잔뜩 덧칠되어 간다.
"네, 네 하하."
"그런데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아~ 안그래도 다름이 아니라..."
기찬은 싱그러운 서하의 목소리에 잔뜩 올라가버린 입꼬리를 좀처럼 내릴 수가 없었다.
얼마만인지도 모를 여성과의 통화, 특히 이런 사적인 대화 자체가 그로서는 까마득한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때 자신이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생활관에 뻗어있었다면 이런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기찬은 군대를 전역하고 다음 해에 복학을 했다.
고생한 자신을 모두들 반겨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같은 학번의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반이었고, 그나마 친했던 몇몇은 해외연수다 뭐다하며 학교를 떠난 뒤였다.
때문에 그는 평소에는 잘 참석도 하지 않는 학과 행사에 얼굴을 내비쳤지만, 이미 쉰내 풀풀 나는 복학생에게 말을 걸어주는 신입생이 있을리 없었다.
맞지 않은 옷을 멀리하다보니 결국 기찬은 어영부영 학과 커뮤니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처음엔 자신 있었다.
비록 아싸가 되었지만 오히려 전공 공부에 집중하기에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년을 손놓았던 공부였지만 끈기는 자신 있었다.
행보관과 소대장의 갈굼을 버텨내고 전역한 자신이 아닌가?
하루에 4시간씩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있다보면 학점은 잘 챙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다니는 학교의 무서움을, 그는 몰랐다.
항상 점심은 혼자서 때워야했고 조별과제가 나오는 수업은 끔찍하기만 했다. 어쩌다 늦잠이라도 자는 날은 자신이 늦은 사이에 과제라도 나왔을지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곤 했다.
심한 날은 하루에 한번도 말을 하지 않아 목이 잠기는 경우도 있었느니 두말할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기찬은 그렇게 꾸역꾸역 한 학기를 버티고는 다음 학기에 휴학을 해버렸다.
사회로 나간다면 뭐든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멋지게 나라를 지킨 2년을 충분히 따라잡고 보상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반만 맞았다.
공부는 어떻게 할 수 있었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창피했는지 기철은 꼬박 이틀을 침대에서 누워서만 지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기찬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비록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쉬게 됐지만 기찬은 이것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고, 군대까지 갔다온 마당에 적어도 용돈까지 집에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그럴 바에는 몇달 빡세게 일해서 목돈을 만든다면 다음 학기 학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도 있어보였다.
뭐, 약간의 짜투리 시간은 영어공부에 투자를 해줘서 토익 점수도 끌어올려준다면 휴학 자체는 꽤 그럴싸하고 계획적인 모양새로 바뀔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내가 그렇게 바꿔야만 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여러군데를 돌며 발품을 판 덕분에 기찬은 한 요리주점의 주방파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술집이 다 그렇듯 바쁘기 그지 없었지만 기찬은 열심히 일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좋게 봐준 사장은 그런 그를 좋게 봤는지 기본적인 룰 이외의 간섭은 하지 않았다.
바쁘고 힘들기만 하던 주방 일이 어느새 손에 익어갈때쯤 기찬은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병무청에서 보내온 동원훈련 소집 안내서였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아직 대학생이라니까요! 대학생인데 왜 동원훈련을 가야하는건데요 네?"
아직 대학생이니까 당연히 학생예비군에 편입되리라 생각한 기찬은 강하게 따졌지만, 병무청에서는 휴학생은 학생예비군으로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 근데 왜 훈련은 부산이에요? 전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있는데 서울쪽으로 가면 안돼요?"
"보니까 본가가 부산이신거 같은데, 등기 이전 안하셨죠? 등기 이전 안하면 이럴 수도 있거든요."
"그, 그건 제가 잘 몰라서 못했는데.. 그냥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음, 지금은 너무 늦어서 힘들거 같고, 아무래도 부산에 내려가셔서 입소하셔야겠네요."
"하.."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찬은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꼼짝없이 부산까지 내려가게 된 것이다.
'하, 전역한지 아직 1년도 안지났는데 벌써 예비군을 가야한다니..'
무사히 군생활을 마쳤지만 그렇다고 군대가 좋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전역하고나서는 부대방향으로 베갯머리를 향한 적도 없었겠는가.
하지만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기찬은 그렇게 끌려가듯 입소 전날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엄마, 저 예비군 갔다올게요."
"응, 그래. 몸 조심하고 잘 다녀오거라~"
입소시간인 오전 9시를 넘기면 가차없이 퇴소조치한다는 말에 일찌감치 집을 나선 기찬은 부대에서 제공한 수송버스를 타고 훈련장에 입소를 했다.
'뭐야, 생각했던 것 보다는 그렇게 빡세진 않네.'
다행히도 동원예비군 훈련은 힘들진 않았다.
건물이 낡고 밥은 맛이 없었지만, 적어도 막 굴리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기찬은 어느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으아, 근데 진짜 더럽게 심심하네. 휴대폰 쓰는 것도 통제하고 말야.'
하지만 몸이 편하니 이제는 심심함이 그의 목을 졸라오고 있었다.
근무한 부대와 지역이 달라서 그런지 아는 얼굴도 없는 듯 했고, 거기다 입소할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휴대폰을 수거하던 대위와 상사 때문에 휴대폰도 없었다.
그나마 일과가 끝나고 저녁의 자유시간에 한시적으로나마 사용하게 해준다는 약속이, 기찬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이구~ 우리 조교 밥 먹었어?"
"일-병, 이 동 철! 아직 못먹었습니다!"
"뭐? 와, 너무하네. 아까 보니까 네 선임은 식당 가는거 같던데, 이거 부조리 아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딱 보니 견적 나오는데말야."
"아, 아.."
그러다보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만만한 조교를 데리고 노는게 전부였다.
"으이구, 장난이야 장난. 심심할텐데 이거나 먹어."
일병 견장을 달았지만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아하니 진급한지 얼마 되어보이지도 않았고, 기찬은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P.X에서 산 초코바를 건냈다.
"가, 감사합니다!"
"선임 주지말고 몰래 먹어. 그리고 남자가 너무 굳어있지 말고 힘 좀 내고."
"넵!"
"야 야, 살살 얘기해도 돼. 나 너희 선임 아냐, 아저씨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럼 난 밥먹으러 간다, 고생해라~"
"넵, 다녀 오십시오."
초코바 하나에 싱글벙글함을 숨기지 못하는 조교를 보고 있자니, 기찬은 짠했던 자신의 군생활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뒤로도 그 조교가 보이면 몇번씩 먹을 것을 챙겨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씩 건네며 기찬은 심심함을 조금씩 해소해갔다.
저녁이 되면 상병 조교가 생활관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그때는 예비군들이 가장 활발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선배님들, 이제 자유시간이라 휴대폰 분출해드리겠습니다."
와아-!!
좀비처럼 뻗어있던 예비군들이 환호하며 앞다투어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기찬 역시도 휴대폰은 소중했기에 잽싸게 챙겨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나중에 20시 55분에 다시 회수하러 오겠습니다, 선배님들."
상병이 나가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각자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통화를 하고 메세지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으휴, 웹툰 몇편 보고나니까 할게 없네..'
기분 좋게 받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막상 휴대폰이 있어도 기찬은 할게 없었다. 메세지를 주고받을 사람도 없었고 따로 하는 게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하염없이 바탕화면만 휙휙 돌리던 기찬의 눈에 누군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생활관 출입구의 한 구석, 평상의 가장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일병. 그래도 며칠간 얘기를 나누며 친해진 조교가 거기에 있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기찬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일병에게로 향했다.
"여어~"
"앗,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좀 쉬었어?"
"아닙니다, 헤헤."
"으흠, 그래?"
기찬은 복도를 한번 살피곤 살며시 생활관 문을 닫았다.
"여자친구 있다고 했지?"
"네, 선배님."
"전화는 했어?"
"..아직 못했습니다."
"얼마동안이나 못한거야?"
"한, 2주.. 그 정도 된것 같습니다."
조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기찬은 자신의 군생활을 떠올린다.
지독하게도 갈구던 선임들과 빡빡했던 일상들, 그런 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족과 친구들에게 거는 전화 한통이었다.
어찌보면 전화는 그 당시의 유일한 낙이자 군대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출이었던 셈이다.
자기 앞에서 허리도 숙이지 못하고 뻣뻣하게 앉아있는 조교에게 연민의 감정이 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으리라.
"..조교야, 전화 해봐."
기찬은 휴대폰을 슬쩍 내민다.
"에, 엣?"
"내가 방금 봤는데, 네 선임 없더라. 짧게 전화 한통 해."
"하, 하지만..."
"한참 못했다면서? 너 부대 다음주는 되야 돌아간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게?"
"..."
조교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본 기찬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들이민다.
이것은 순수한 감정이었다. 연민, 불쌍함에서 비롯된 동정. 그렇다고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기찬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몇번의 실랑이가 오가도록 조교는 좀처럼 휴대폰을 받아들지 못한다.
"어휴, 답답아. 이런 기회가 또 없다니까. 이렇게 시간 허비하는 동안에 전화 했으면 벌써 끝냈겠다!"
"아, 아무래도 전화는 좀..."
꽉 막힌 조교의 답답함은 좀처럼 뚫릴 기미가 없어보였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기찬은 다른 방법으로 우회하는 걸 선택했다.
"그럼 문자라도 하나 보내주라. 여자친구가 불쌍하지도 않냐?"
"아,"
"휴대폰 만지는거 걸릴까봐 걱정되면 그냥 바로 불러줘, 내가 적어줄게. 아니면 쪽지에 내용을 써주던가."
"아, 그거라면..!"
활짝 웃는 조교의 웃음에 기찬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녀석이 그렇게 크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입소하고나서 처음이었다.
행여 들릴까봐 나지막한 목소리로 끊어질듯 읊어대는 조교의 말들을, 기찬은 용케 받아적었다.
[유라야 나 동철인데 지금 동원예비군 훈련중인데 예비군 선배님이 문자 하나 보내도 된대서 문자 보내ㅋㅋ 나는 잘 있고, 연락 못해서 미안해...이해해줘ㅠㅠ 아픈덴 없고 잘 지내지? 아마 다음주 쯤 연락할 수 있을거 같아! 그때까지 잘 지내고 항상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 답장은 안해도 돼ㅎㅎ]
10~12줄 남짓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문자, 그 안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생생해보였다.
'이게 다 답장 받자고 하는건데 답장은 안해도 쨈募?쯧쯧...'
기찬은 순박할 정도로 멍청한 메세지의 끝에 몇가지 사족을 덧붙인다.
[안녕하세요 예비군인데 그래도 시간 된다면 답장 해주세요~ 지금 옆에 있으니까 빨리 보여줄게요.]
"자, 이렇게 보낸다?"
"아, 넵. 감사합니다..!"
기찬은 조교가 불러준 전화번호로 메세지를 전송했다. 그리곤 자신이 저지른 일에 가볍게 실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열심히였던 적이 있던가. 이런다고 빨리 퇴소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게도 아무런 보상도 없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기분은 후련하고 좋았다. 적어도 나로 하여금 누군가가, 내 근처의 누군가가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이라 생각했다.
기찬은 스스로도 이렇게 적극적일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그것은 흡사 까진 상처가 아물 때의 간질대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막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진 않았다.
상대방으로부터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에 기찬은 조교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여자친구는 예뻐?"
"아, 아닙니다."
조교는 의식적으로 사양하듯 말을 아끼지만 기찬의 감을 피해갈 순 없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너는 예쁘다고 해줘야지!"
"그, 그렇습니다."
"궁금하네 이거, 사진 가지고 있는거 없어?"
"아, 그게 생활관에 두고 와서..."
"그 뭐 페이스북 이런거 할거 아냐?"
"네, 넵. 페이스북 합니다."
"여자친구 이름이 뭐야? 한번 찾아보게."
쑥스러워하는 조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라, 한..유라 입니다."
"오 이름 예쁘네, 걸스데이?"
"아, 아닙니다."
"참 나, 걔는 아닌거 나도 알거든? 잠시만 기다려봐!"
"넵, 선배님."
"어? 얘야??"
한참동안 페이스북 앱을 만지던 기찬은 일병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민다.
"아.. 맞습니다. 제 여자친구 입니다."
"......"
조교의 확답을 들었지만 그래도 기찬은 믿을 수가 없었다.
'뭐야, 완전 귀여운데? 아 시발..'
휴대폰 속의 여자는, 이런 어리버리한 일병의 애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괜찮았다.
어깨에 살짝 닿을듯한 단발을 백금발로 염색한 그녀는 장난끼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그란 눈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고 활짝 올라간 입꼬리는 그녀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찬은 감정이 복잡해졌다.
분명 이 조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불쌍하고, 부족하다고, 챙겨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런 이유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녀석의 여자친구는 그 모든 열등한 것들은 단번에 뒤집어 엎어버릴 힘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이만큼 귀엽고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본적이 없으니 사귄 적도 없었다.
자신는 어땠던가,
자대에 오자마자 동정이라는 이유로 선임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결국 그는 휴가때 빡촌을 향했고, 거기서 이모뻘의 창녀에게 버리듯 동정을 뗐었다
"..예쁘네. 몇살이라고 했더라?"
"아, 스무살입니다."
"이야..~ 능력 있네!"
기찬은 불쑥 치솟는 질투를 감추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높였다.
띠링-
"아..!"
그러는 사이에 답장이 왔고, 조교는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엇, 여자친군가봐. 자 봐봐!"
"네, 넵 감사히!"
[ㅠㅠㅠㅠㅠ오빠야 잘 지내고 있지요ㅠㅠㅠ 에구구ㅠㅠㅠㅠ보고 싶어요 좋은 예비군 선배님이시네요ㅠㅠㅠㅠ 빨리 만나고 싶어요ㅠㅠㅠ조금만 더 참고 열심히 해요 파이팅!!♡]
"뭐해, 빨리 답장해야지!"
"하, 하지만.."
기찬은 더듬대는 조교를 여러번 다그친다.
"아니 그러니까 짧게 짧게, 빨리!!"
"네, 넵!"
[다음주에 연락할게 사랑해!!]
[넵! 오빠도 예비군 선배님도 힘내서 파이팅해욥!♡♡♡♡]
부러운건 여전히 부러웠지만, 영락없는 커플의 애틋한 모습은 그런 기찬의 마음마저도 흐뭇하게 만들었다.
"...에이 이걸로는 너무 아쉽다.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잠시만 서봐봐."
"엇, 선배님 그건.."
"빨리 빨리! 이제 다시 휴대폰 반납해야되서 시간이 없어!"
"네, 넵!"
형편없고 후줄근한 군바리의 모습이다. 게다가 눌러 쓴 하이바가 얼굴의 절반을 감추고 있어서 불편하기 그지 없는 사진들은, 빈말로도 잘 나왔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찬은 그 사진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소중한 보물이 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급하게 찍어서 남자친구분 사진이 몇장 안되네요. 그래도 이거라도 보내요.]
그렇게 찍어댄 조교 사진 몇장을 여자친구 편으로 잽싸게 전송하곤 휴대폰을 껐다.
"전송 완료되는 것까진 확인했으니까 아마 받았을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고맙긴, 그럼 난 휴대폰 좀 제출하고 올게."
"넵, 다녀 오십쇼!"
그리곤 기찬은 남은 기간동안 예비군 훈련을 무사히 치르고 퇴소할 수 있었고,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알바에 쫓겨 부랴부랴 서울로 상경했다.
딸칵-
"하아..."
막막함이 전구 스위치와 함께 밀려온다.
알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건만, 기찬은 조금도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새벽 2시에 처음으로 불이 들어오는 방, 인기척은 자신의 발걸음이 오늘의 처음일 것이다.
"으차..~"
손가락 하나도 까닥거리기 싫었던 기찬은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다.
"으어어..."
구겨진 허리와 목을 억지 기지개로 펴내고는 TV 리모컨을 찾아 TV를 튼다.
이 시간에 재밌는게 할 리가 없었지만, TV 소리 마저 없다면 이 방이 얼마나 삭막해질지 알았기에 기찬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피곤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듯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오늘은 또 어떤 예쁜이들을 구경해보실까~"
하루종일 주방에 갇혀있는 기찬에게 직원을 제외한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그것은 남들 밥먹고 놀때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그런 한정적인 생활 속에서 기찬의 유일한 낙은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았고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었다. 뭐, 기찬의 경우에는 그 대부분의 기회를 몸매좋고 얼굴 예쁜 여자들 구경에만 사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 얘는 누구였더라?"
로그인한 페이스북 한 구석에 낯선 프로필 사진이 떴고 그는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아..! 걔구나, 일병 여친!"
그러고보니 동원훈련때 얼굴 구경한다고 계정을 찾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금 계정을 타고 들어간다. 그땐 너무 급하게 봤었다. 솔직히 뽀샵일 수도 있고, 아니 요즘에 뽀샵 안하고 사진 올리는 사람도 있던가? 암튼 생각보다는 그렇게 안 예쁠 수도 있다, 분위기 탓일 수도 있었다.
"...예쁘네."
기찬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예뻤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짜증나는 건, 이 여자애가 그 찌질했던 일병의 여자친구라는 점이었다.
휴대폰을 벽으로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할부가 아직도 남았기에 기찬은 가까스로 참는다.
어차피 딱히 휴대폰이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그녀가 보낸 답장도 있었다. 동원 예비군이 끝나고 휴대폰을 온전히 돌려받았을때 이미 확인했었다.
[감사해요ㅠㅠㅠ 정말 좋으신 선배님이시네요ㅠㅠㅠ!!]
간절해보이는 문자에, 기찬은 있어보이는 척 몇마디를 보내줬었다.
[남자친구분 참 착하니까 잘 기다려주시고 힘이 되어주세요.]
그 것 역시도 메세지함에 그대로 있었다.
정말 사진만큼 예쁠까?
그냥 조금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페이스북에서 봐왔던 여자들은 하나 같이 보통이 아니었다. 터질듯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흔들어대며 자신의 매력을 연신 어필했었다.
어차피 그들은 어디가 가장 매력적인지를 알고 있었고, 또 그걸 이용할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이름이 유라라고 했던가."
발랑 까져서 젖을 반쯤 드러낸 그런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풋풋함이 그녀에겐 있었다.
'일병이 충남 공주에 산다고 했었는데..'
그때 들은 바로는 둘다 같은 고향친구라고 했었다.
남자는 공무원시험 준비하다 입대했었고 여자는 상경해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었다.
'어디 학교일려나, 혹시 여기서 가까운건 아냐?'
기찬은 이상하게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날 수 있을까?'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정말 그만큼 예쁜지, 그리고 착한지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하아..나는 여자친구도 없..는데...'
기찬은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 정오에 가까워서야 기찬은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까치집만큼이나 무성한 피로감에 온몸을 여기저기 비틀어댔다.
"하-암..~ 요샌 어떻게하다가 자는지도 모르겠다니깐. 무슨 눕자마자 쓰러지냐."
기찬은 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집어들다 뜨거움에 깜짝 놀란다.
"아오, 또 휴대폰 켜두고 잤네, 아놔..."
다행히 충전선은 꽂혀있어서 잔여 배터리는 빵빵했지만 계속해서 켜져 있었기에 휴대폰은 적잖히 열이 올라있었다.
"유라.."
기찬은 몇시간 전 새벽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분명 페이스북 구경 좀 하다가 잔건 맞다, 하지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낼려고 했던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전송버튼을 누르진 않았는지 알아볼 수 없는 형태의 글자가 메세지창을 채우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여자가 고파도 그렇지, 남친도 있는 애한테 왜..."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때문인지 그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말았다.
'아니, 잠깐만.'
남친이 있긴하다. 하지만 그 남친은 지금 "군대"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꼬시기 쉬운 여자가 군인 남친있는 여자라는 말도 있었다.
예비군때 둘이서 주고받던 문자를 보면 연란 한번하기가 더럽게도 어려워 보였다.
그때는 둘의 애틋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게 한풀 벗겨지자 눈에 쏙쏙 들어온다.
- 군인 여친은 건들지 말자. 상도덕이 있지, 남자끼리 할 짓이 아니다. -
기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전해져 내려온 불문율의 선을 넘어보고 싶기도 했다.
'나쁜 짓도 아니고 그냥 예쁜 동생 만나서 밥도 좀 사주고 그러는건데 뭐..'
기찬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다. 그리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