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드러나는 비밀
진우는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
왜 자꾸만 이럴까?
왜 이렇게 불안해하며 그녀를 상처 입히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띠리리리...
그때 갑자기 울린 전화벨이 무겁게 가라 앉아있던 집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진우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지현이네 집이지요..?"
웬 여학생의 목소리였다.
"그런데요..."
"여기.. 학교인데요... 지현이 있나요..?"
"지현이는.. 아까 나갔는데..."
"그래요..? 아직 도착을 안 했는데..."
"무슨 일인데요..?"
"지현이가 과제를 가지고 독서부로 오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도착을 안 해서요... 선생님
도 기다리시는데... 저.. 언제 나갔나요..?"
"......!"
그 소리에 진우가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지현이가 나간 지 꽤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날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간 지 오래 되었는데.. 한 40~50분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창 밖을 바라보니 비가 더욱 세차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우산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갔었는데...'
진우는 어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 그 그럼.. 내가 나가서 찾아볼 테니... 혹시라도 지현이가 도착하면 연락 줄래
요..? 나는 지현이 아빠인데.. 내 핸드폰 번호는... "
그렇게 연락처를 알려주고 급히 전화를 끊으려던 진우는 문득 알 수 없는 예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물어보았다.
"저.. 혹시..?"
"예...?"
"학생이 지금 독서부라고 했지요..? 혹시.. 어제 무슨 모임 같은 거 했나요..?"
"모임이요..? 어제는.. 부장언니네 집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거든요..."
"그럼.. 지현이도 갔었어요..?"
"예.. 왔었어요.. 원래 선약이 있다고 했는데... 취소하고 왔었어요... 왜요..?"
"......!"
진우는 순간 정신이 멍해져서 전화를 끊었다.
지현이는 그 남자친구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속인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런 소리를 한 것이지...?'
진우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혼란스런 표정으로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가 그런 태도를 보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솔한 태도를 다시 후회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람을 믿지도 못하고.. 그런 오해나 하고.. 그 그리
고..."
진우는 지현이를 찾기 위해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진우는 이 빗속에서 당장 지현이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버스 정류장부터 가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했으면 벌써 도착을 했을 텐데...'
그나마 우산이 없이 나갔으니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 하는 희망으로, 진우는 근처를 모두 뒤
지고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을 헤매던 그가 지현이를 발견한 곳은, 그녀가 다니던 중학교 근처
상가의 1층 레코드 가게 밖에서였다.
그곳은 지현이가 예전에 음반을 사러 자주 들리던 곳이었다.
아마도 언젠가 그가 지현이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음반도 이곳에서 샀던 것일 것이다.
지현이는 학교에 가지도 않고, 그 가게 바깥벽에 몸을 기대고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현이는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추운 듯 양어깨를 붙잡고 작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진우는 조용히 지현이에게 다가가 앞에 마주 섰다.
그녀와 그 옆의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들리는 노래 소리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진우는 그런 지현이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거야...?"
"............"
진우가 조용히 말을 걸었지만, 지현이는 그저 땅바닥만 쳐다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었어.. 걱정을 많이 하더라..."
"............."
"그리고.. 이야기.. 다 들었어... 미안해..."
"......!"
"그만..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아직 날도 춥잖아..."
"싫어요.. 저리 가세요..."
지현이가 어깨로 다가오던 진우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갑자기 지현이의 가냘픈 몸이 순간 휘청하더니 그의 품안으로 쓰러졌다.
"앗..! 왜 그래..?"
혹시나 해서 이마에 손을 대보니 이마가 열로 펄펄 끓었다.
"........!"
"수진아..!"
진우는 의식을 잃고 품안으로 쓰러진 지현이를 부둥켜안았다.
진우는 지현이를 안고 빗속에서 근처 병원을 향해 뛰었다.
지현이는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아 다행히 위험한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밤새 누워 그의 간병을 받아야 했다.
밤이 되자 다소 나아졌던 지현이의 열이 다시 높아졌다.
"아... 하아.. 어 엄마... 하 아..."
잠이 든 채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려대는 지현이는 비에 맞아 오돌오돌 떨고있는 작은 새처
럼 가련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침대 옆에 앉아 지현이를 간호하던 진우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수 수진아... "
진우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지현이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던 진우는 문득 이런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너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만약에 자신이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풀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어차피 딸아이의 몸으로 새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그녀를 아내라는 족쇄에서 풀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이제 더 이상 본의 아니게 그녀를 상처 주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자신이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진우는 슬픈 지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결심을 하고 있었다.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아주 슬픈 꿈이었는데 아마도 몹시 아파서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지현이는 아직 열에 온몸이 아팠지만 잠결에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겨우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는 아빠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다.
`아빠..?'
"이 이제.. 정신이 들었니..?"
진우는 새벽녘에 지현이가 정신을 차리자 애잔한 눈길로 지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지현이를 부둥켜안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 흐흑... 미 미안해... 미안해... "
진우는 그렇게만 이야기 할 뿐 더 이상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아...!'
지현이의 눈에도 순간 눈물이 고였다.
`아빠...'
지현이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온몸에 아빠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지현이는 문득 몇 년 전의 그 사고 이후, 자신을 간병하시던 아빠가 기억이 났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겨우 살아남은 어린 딸아이를 눈물로 간병하시던 아빠.
지금 아빠의 모습은 그때 그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던 아빠.
지현이는 그 동안 아빠에게서 들었던 서운함, 야속함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 아빠는 언제나 그때 그분이실 뿐이야...'
지금의 아빠는 그저 자신을 사랑해주시는 그 아빠인 것이다.
"아.. 우 울지 마세요... 흐흑..."
지현이는 자신을 안고 우는 아빠를 향해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자신도 같이 울고
있었다.
지현이의 작은 가슴에 이제야 긴 겨울이 끝이 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지현이는 아빠의 따뜻한 품에 안겨 마음이 안정되자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지금 아빠의 입장과 그 동안 아빠가 자신에게 주었던 사랑에 대해 생각을 했다.
또한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아빠의 모습들.. 좋았던 모습, 나빴던 모습들을 곰곰이 다시 생
각해 보았다.
크게는 주희라는 여자 때문에 생겼던 일들과 경민이 때문에 생겼던 일들.
그로 인해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하던 지현이의 작은 가슴은 어느 순간 크게 동요했다.
지현이는 어느새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아빠를 아빠가 아닌 남자로서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
사실 소녀는 이전까지도 아빠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다른 이유를 대며 애써 그것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딸로서의 아빠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자신만의 특별한 상황으로 인하여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뿐, 정말 아빠를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을 해왔다.
그냥 아빠로서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빠를.. 이성으로 사랑했던 거야...'
`그 동안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반발을 하고.. 아빠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마
음이 흔들렸던 까닭은...'
지현이는 가만히 자신을 품에 안고있는 아빠의 얼굴을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분이.. 지금 이 분이.. 내 아빠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였기.. 때문이었어...'
지현이의 내면은 작게 떨고 있었다.
이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자신의 마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따뜻하게 간호해주고 계신 아빠를 눈앞에 두고, 지현이는 이제 이 진
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아.. 아빠..'
지현이가 가냘프게 떨면서 아빠의 품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진우는 그런 지현이를 보자 더욱 애처로워 보이면서도 더없이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제 지현이가 자신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고 용서를 해주었다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진우가 지현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품에 안은 그녀의 몸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진우는 지현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녀의 두 눈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
지현이는 잠시 아빠의 시선을 마주보다가 이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진우는 그런 지현이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한 뒤에,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작은 입술을
덮었다.
"읍..!"
그러자 지현이는 다소 놀라며 아빠의 입술을 피하려 했다.
"아 안돼요.. 이러면 저한테 감기 옮으세요..."
그러자 진우는 살짝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괜찮아.. 그냥 우리.. 같이 앓아보지 뭐..."
풋..
순간 지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 참..."
진우는 이내 다시 지현이를 꼭 끌어안고 입술을 덮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현이도 얌전히 아빠의 입술을 받아들였고, 둘은 곧 뜨거운 키스를 나누
기 시작했다.
지현이는 아빠의 입술을 느끼며, 예전에 아빠와 첫키스를 했을 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 여자아이가 난생 처음 느낀 두근거림.
작은 입술의 표면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감미롭고 짜릿한 감각들.
지금도 지현이의 작은 가슴은 쿵쿵 뛰며 두근거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하아.. 아빠...'
아빠의 물컹한 혀가 지현이의 하얀 치아를 열고 소녀의 입안으로 들어와 그 뜨거운 열기를
전해주었다.
그녀는 점점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것은 단순히 몸살로 인한 열 때문만은 아
니었다.
지현이는 아빠가 전해주시는 황홀한 감각에 몸을 맡긴 채 그저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우는 지현이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키스로만 만족하고, 잠시 후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직 지현이의 몸에 열이 높고 다 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안정을 하고 그만 푹 자둬.. 그래야 아픈 게 낮지..."
진우는 그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며 지현이를 눕혀주었다.
"예..."
지현이는 왠지 어떤 아쉬움도 느껴졌지만, 아직 몸이 아팠고 피곤했기 때문에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현이가 일어난 것은 점심때가 좀 지났을 때였다.
지현이는 간병을 받고 푹 자고 나자 몸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
진우는 오전에 지현이 학교에 전화를 걸어 아파서 결석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지현이 때문에 아직 출근을 안 하고 있었지만, 오늘 회사에서 급한 업무가 있었기 때
문에 오후 늦게라도 출근해야 했다.
"자.. 그럼.. 일 빨리 마치고 돌아올 테니까.. 얌전히 누워서 몸조리 잘하고 있어..."
"괜찮으세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잖아요..?"
"괜찮아.. 새벽녘에 좀 눈을 붙였어... 그럼.. 다녀올게..."
진우는 지현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주고는 집을 나섰다.
아빠가 나가시고 지현이는 아빠의 말씀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 아..."
지현이는 문득 지난밤의 일이 생각났다.
마음속의 진실을 자각한 자신과 아빠와의 뜨거운 키스.
순간 소녀의 두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 아... 나는 이제 어떡해야 좋지...?'
지현이는 스스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할 지라도 앞으로 어떡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자신이 엄마 행세를 해오는 동안, 정말 자신이 아빠의 아내라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고, 사
춘기의 감수성을 거치면서 아빠를 이성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은 엄마의 대신이 아닌 스스로의 역할로 아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지현이는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빠의 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이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도피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그래.. 어쩌면 사실 나는 그랬는지도 몰라...'
`그러나.. 내 마음을 알았다 하더라도.. 이제 어떡해야 하지...?'
`그냥.. 내 감정에 충실해서.. 아빠를 받아들이고.. 정말 아빠의 아내가 되어버릴까..?
세상의 윤리라는 것.. 모두 무시하고... 비밀은 내 가슴속에 묻어버리고...?'
`하 하지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정말 나는 없어지는 거야... 지현이란 아이는 이제 없어지
고.. 엄마로서만 남는 거야...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럼 나는 어떡해야 되는 거
야..?'
`아니.. 아빠를 사랑하니까 그것을 감수한다 하여도... 하지만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지현이로 살아야 하잖아...'
`결국.. 둘 다 제대로 될 수 없고... 무엇보다 영원히 아빠를 속이는 것이고...'
지현이는 복잡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언제까지 이대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는 것은.. 아빠나 나.. 두 사람에게 모두 불행이 아닐까..?'
`그리고 사실 나는.. 내 자아를 찾고 싶어... 아빠에게.. 엄마의 대신이 아닌.. 나로서
사랑을 받고 싶단 말야...'
`하 하지만... 내가 내 자신으로 돌아가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할 수 없
어...'
`그래.. 나는 이미.. 내 자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이미.. 처음 이 거짓
말을 시작할 때부터...'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던 거야.. 그 동안.. 두렵고 무서웠을 때도.. 영원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거야... 그러면.. 이제 아빠를 여자로서 사랑할 수 없기 때문
에...'
`사실.. 나는.. 그랬던 거야... 하지만... 이제.. 나는... .......... '
갑자기 지현이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 그 이슬이 눈에서 한줄기 눈물로 흘러 베개를 적시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내 자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몰라... 언제까지나.. 내 인
생을 엄마 대신으로.. 살아갈.. 수도 없는 거잖아... 이제.. 아빠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나한테 들켜 버렸으니..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몰라... 더.. 늦기 전에... "
지현이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우 으윽... 으 흐흑... 흐 흐흑... 아 아빠..."
지현이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아직 몸이 다 낮지 않은 데다가 울다가 지쳐서 그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침대에 일어나 앉으니 아빠가 남긴 메모가 하나 있었다.
`너무 곤히 자서 깨우지 못했어. 밤까지 기다려도 안 일어나서 메모를 남기는 거야. 주방
에 죽 끓여놓았으니 일어나면 먹어. 그리고 열이 많이 내렸더라. 다행이야.'
지현이는 일어서서 거실로 나갔다.
몸이 이제 나았는지 한결 가벼웠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아빠가 피곤하신 지 깊게 잠들어 계셨다.
`아빠...'
지현이는 침대에 앉아 주무시는 아빠의 얼굴을 슬픈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분.. 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분..'
그렇게 한참을 곁에 앉아 아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지현이는 마침내 어떤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조용히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자기의 비밀 일기장을 꺼내서 그저께부터 있었던 일들과 자신의 마음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지현이는 적어나가는 도중에 감정을 가누지 못하는 듯 잠시 멈추기도 했고, 일기장에는 눈
물이 한 두 방울 떨어져 얼룩지기도 했다.
그렇게 다 적고 나자 지현이는 다시 좀 전에 아빠를 보고 했던 결심을 생각했다.
`과연.. 그렇게 해도.. 좋은 걸까..?'
지현이는 다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결심을 되새겼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이제.. 나로 돌아가는 거야...'
`이제.. 더 이상.. 서로 상처를 받을 수 없어... 이렇게 지내다가는.. 언젠가 또 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몰라...'
`이젠 끝내고 싶어...'
이렇게 생각을 하자 지현이는 다시 감정에 복받치는 듯 울음이 나왔다.
`이 이제.. 내 안에서 엄마는 사라지는 거야.. 이제 엄마와 이별하는 거야...'
`이제.. 아빠의 아내 역할도.. 끝나는 거야... ....... 그러나... '
`그러나.. 추억을.. 하나.. 만들고 싶어... 아빠의 아내였던 추억.. 그리고.. 아빠에
대한 내 사랑의 추억... '
`내 처음을 아빠에게 바치고 싶어... 내 처녀를.. 순결을.. 이 세상 누구도 아닌.. 내
가 사랑하는 단 한사람.. 그 분에게...'
`내..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아빠의 아내로 남기 위하여...'
지현이는 이 마음도 지금까지처럼 자신의 비밀일기장 속에 숨겼다.
지현이는 밤새 밀려드는 상념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녀는 지난밤에 자신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어느새 동이 터 오자 지현이는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오늘 당장 아빠의 얼굴을 보고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몸이 나았기 때문에 주방으로 나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우는 시간이 되어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늦게 일어나시네..? 시간이 되었는데..."
이상한 생각이 든 지현이는 안방으로 들어가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벌써 아침이에요.. 그리고 아침은 제가 준비했어요.. 저 이제 나았거든
요.."
"우응.. 벌써 아침이구나... 몸이 나았다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우으.. ."
"왜 그러세요..?"
지현이는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시지를 못하자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응.. 나도 갑자기.. 영 몸이 안 좋은데...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어머.. 키스 때문에 옮았나봐요.. 어떡해..."
"괜찮아.. 곧 났겠지 뭐.. 이런.. 일어나서 출근 준비해야 하는데..."
"아니에요.. 이마에 열이 있으시잖아 요..."
"괜찮다는 데도.."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하루 쉬세요.. 저도 오늘까지 학교를 쉬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제가 간호를 해드릴게요..."
"허 참.. 이거 교대로 아프네..."
"약 먹고 푹 주무세요.. 제가 먹던 약을 우선 가져올게요.."
진우는 좀 쑥스러워 하면서도 열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현이는 다시 주방으로 갔다.
"일어나시면 뭐 드셔야 할 텐데.."
하지만 지금 준비하던 아침 가지고는 안될 것 같았다.
냄비를 열어보니 아빠가 자신에게 끓여주신 전복 죽은 조금밖에 안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끓여들여야지...'
지현이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냉장고에는 이미 재료가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급히 시장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지현이는 깜박하고 일기장을 서랍에 넣고 미처 잠그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열 때문에 시달리던 진우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5년 전 그 사고 때의 꿈이었는데, 수진이와 지현이가 둘 다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라지는 꿈이었다.
"아 안돼.. 가 가지마... 수진아.. 지현아.. 아 아아학..."
식은땀을 흘린 채 가위에 눌려 깨어난 진우는 거칠게 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꿈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나 너무 실감나던 꿈에 열도 있어 아직 정신이 몽롱했던 그는 현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였는지 지현이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
몸이 아파 마음이 약해진 탓일까?
악몽 때문에 왠지 모르게 불안했던 그는 지현이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지현이는 그녀의 방에도 없었다.
순간 당황한 진우는 화장실이며 주방이며 찾아보았지만 지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간 거지..? 잠시 뭐 사러 나갔나..?"
그러나 근처에 나간 것은 아닌 듯 지현이는 기다려도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꿈 때문인지 갑자기 진우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호 혹시..? 나갔다가 무슨 사고라도..."
걱정이 된 진우는 급히 집밖으로 뛰쳐나가 보았지만, 이미 지현이가 보일 리도 만무했다.
"이 이런..."
진우는 불안했다.
왠지 지현이가 이대로 다시는 안 돌아올 것만 같았다.
`아니야.. 그냥 어디 멀리 나간 것이겠지..'
이렇게 애써 생각도 해보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지현이가 갈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다.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지현이의 친구들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를 썼다.
어차피 연락이 된다 하여도 아직 학교에 있을 아이들이었지만, 진우는 경황이 없었다.
이전부터 집에 드나들던 아이들은 한 2~3명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아이들 연락처가..."
그러나 그 아이들의 연락처를 알고 있을 리 없는 진우는 단서를 찾기 위하여 지현이의 방으
로 들어갔다.
지현이와 그런 일이 있었던 터라 주인도 없는 방을 뒤진다는 것은 좀 게름직한 일이었지만,
불안하고 다급한 진우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 다이어리 같은 거라도 없나 하고 책상 위에 있는 노트와 책들을 뒤적였다.
마땅하게 소득이 없게 되자, 가방이라도 뒤지려고 가방이 있는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인 진
우는 문득 시선을 멈추었다.
그가 시선을 멈춘 곳은 지현이 책상 맨 밑의 서랍이었다.
그곳은 진우가 알기에 항상 잠겨있는 그런 비밀서랍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서랍은 잠기지 않은 채 약간 틈이 열려 있었다.
"꿀꺽..."
왜였을까..?
진우는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운명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 그 안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서랍의 작게 열린 틈은 진우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진우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그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여러 노트와 물건들 위에 급
하게 넣어진 듯 한 일기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지현이가 쓰는 열쇠 달린 비밀일기장이었다.
진우가 묘한 긴장감으로 일기장을 열어보려 하였지만 닫혀 있었다.
"이런..."
진우가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다른 노트들을 뒤적이는 데, 문득 눈에 들어온 낮선 일기장들
이 여러 개 있었다.
"응..?"
그것은 아내 수진의 이름으로 된 오래된 일기장들이었다.
"아니..? 이런 것들도 있었나..?"
진우가 약간 긴장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일기장들을 열어보자 다행이 열쇠가 열린
것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일기장은 놀랍게도 아내가 예전에 쓰고있던 비밀일기장이었다.
"아 아니..!"
진우는 처음에는 그저 몰랐던 사실에 놀랍기만 했었다.
그러나 점차 일기장 안의 내용을 읽어나가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
다.
그것은 이전부터 어렴풋하게 진우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어떤 석연치 않음이었다.
두근 두근..
그 일기장에는 자신과 수진의 은밀한 부분들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서 낮 익은 어떤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그 알 수 없던 불안감이 불현
듯 실체를 보이며 진우에게 엄습했다.
`작은 입술'
일기장을 든 진우의 손이 점점 떨리고 있었다.
`호 혹시.. 아 아.. 아닐 거야... 하 하지만...'
진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부인하며 확신을 얻으려는 듯 책상 위에 있는 지
현이의 다른 노트들을 뒤적였다.
그리고 자신이 든 일기장과의 필체를 대조해 보았다.
두 필체는 판이했다.
왜 여태까지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몸이 달라졌다 해도 필체 같은 습관은 그대로 남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더구나 아내나 지현이처럼 글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하아.. 하아.."
점점 숨이 가빠오고 불안감에 빠져든 진우의 눈에 다시 처음에 보았던 지현이의 비밀일기장
이 들어왔다.
`이 이거야...!'
진우는 급한 마음에 그 일기장을 들고 억지로 열어보려고 하다가, 문득 지현이에게 증거를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상 주변이나 가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발.. 열쇠가 어딘가 있기를...'
한참을 뒤적이던 그가 마침내 열쇠를 발견한 것은 책상 맨 위 서랍 구석에서였다.
"하 아..."
진우가 떨리는 손으로 지현이의 비밀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동안의 얄궂었던 운명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현이의 일기장에 씌어져 있는 놀라운 비밀들.
특히 지난밤에 지현이가 섰던 그 글들을 모두 읽은 진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크나큰 충격에 깊은 수렁 속으로 몸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허...."
한참 뒤에야 겨우 진우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는 곧 일기장을 다시 넣고 안방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은 일
기장을 읽고 난 후에도 거의 1시간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던 거였어.. 처음부터 말도 안돼는 거였어...'
`그런데.. 이렇게 단순히 시작한.. 아이의 거짓말... 그리고 자꾸 커지는 그 거짓말에..
나는 속아넘어간 거였어...'
`아니.. 속아넘어갔다고 할 수도 없겠지...'
`평소에 아무리 아이가 책을 많이 읽었고.. 상상력이 뛰어나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
내었다 할지라도..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짐작도 사실 느꼈으면서.. 나
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도 믿으면서.. 수진이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
던 거야...'
`내가 수진이에게 해주지 못한.. 그 많은 것들이..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이런 식으로
라도..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십사하고.. 신에게 억지를 부렸던 것인지도 몰라...'
`이런 그 동안의 나의 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어...'
`나는.. 아내 대신 엄연히 살아있는.. 내 딸.. 지현이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려 했
어.. 나는 부모이면서도.. 딸의 존재를 지우면서까지.. 아내에게 매달리려 했던 거야...'
`그럼 그 동안.. 지현이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나를.. 받아들였던 것일까..?'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저지른 일이었다 할지라도.. 크면서.. 아빠가 딸인 자신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꼈을 텐데.. 얼마나 슬펐을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남자로서.. 그 어린 몸에.. 받아들이려 했던 걸까..?'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일기장에 써있는 대로.. 정말로 지현이는.. 이 아빠를.. 남자로서 사랑을 한 것일까..?'
`그렇게 해서.. 자신을.. 엄마 대신으로 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그럼 나는 그 동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동안 딸아이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 어린것에게.. 그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있었던 것일까..?'
`특히.. 그 날밤.. 그.. 그.. 오.. 이런.. 맙소사...'
`나는.. 도대체.. 얼마나 나쁜 놈이었단 말인가..?'
진우는 다시 깊은 열병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