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질투
여름방학이 며칠 앞으로 곧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저녁때쯤 지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외할아버지가 그녀를 보고 급히 부르셨다.
"여보게.. 마침 지현이 들어왔네.. 바꿔줄 테니 받아보게.. 얘.. 네 아빠 전화다.."
"아빠요..?"
오랜만의 아빠와의 통화였다.
아빠는 가끔 강릉으로 전화를 하시는 것 같았지만, 거의 지현이가 없을 때 전화를 하셔서
지현이가 받은 적은 거의 드물었다.
지현이는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 동안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왠지 떨리곤 했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동안.. 잘 있었어..?"
"예... 잘 계셨어요..?"
"응.. 나는..."
그렇게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여름방학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친구인 인영이와 경민이네 무리들까지 가세해서 방학 때 뭐할까 고민중인 것 같았지만, 사
실 지현이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내일이면 아빠가 오신다..'
며칠 전 전화에서 아빠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 동안 지현이가 강릉에 내려온 후에 아빠는 한번도 강릉에 오지를 않으셨다.
아니 아빠뿐만 아니라 지현이도 겨울방학 때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빠는 일을 핑계로 강릉에 오지 않았었고, 엄마의 기일 때나 설날에나 장기해외출장 중이
셨으니, 둘 다 모두 구실은 충분했다.
솔직히 지현이가 강릉에 내려온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그 일 때문이었으니..
외가에서는 요즘 아빠 사업이 잘되는가보다고 말씀들은 하셨지만, 그래도 지현이가 안쓰러
워서인지 혀를 끌끌 차시고는 하셨다.
하지만 사실은 지현이나 아빠나 차마 서로의 얼굴을 보기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아직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었으므로.
그렇다고 지금도 아주 괜찮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안정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 동안 지현이도 글쓰기를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기간, 거의 아홉 달 가까운 기간은 지현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
라, 내면적으로도 많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홉 달이었다.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긴 시일이었다.
그리고 지현이가 태어나서 아빠와 이렇게 오래 헤어져 본 적이 없는 그런 기간이었다.
지현이는 문득 올해 새해를 맞던 때의 지난 일이 생각이 났다.
남들은 2000년이라고 서로 들뜬 분위기일 때도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2000년이 될 때.. 무엇을 할까요?"
작년 여름, 지현이가 진우의 등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며 했던 말이었다.
어제 TV에서 요즘 연인들이 밀레니엄이라며 새해맞이를 '추억만들기'로 계획한다는 이야기
를 본 것이 문득 생각나서였다.
"새해..?"
"예..."
"그런 걸 벌써부터 생각해..?"
"TV를 보니까.. 애인 있는 여자들은 벌써 밀레니엄이라며.. 추억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다나
봐요.. 그래서요... 그냥 요.."
"왜..? 우리도 뭐 할까..?"
"글쎄요.. 괜찮아요.. 꼭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야.. 뭐 무리는 아니지 뭐... 돈 있는 사람들이야 해외로 나가겠지만.. 보통 사람들
이야.. 스키장이나 정동진 같은데 가서 해돋이 보는 정도겠지... 안 그래..?"
"그렇겠죠.."
"그럼 별로 어려운 것 아니잖아... 어차피 당신 집이 강릉이니까.. 미리 가 있다가 정동
진에나 나가보지 뭐..."
"어머.. 그럴까요..?"
"그러자.. 어차피 처가에서 금새인데..."
"헤에.. 그래요 그럼..."
지현이는 그때 아빠와 둘만의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무척 행복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들떠 기대를 했던 새해였었지만, 결국 2000년이 되는 날 지현이는 혼자였다.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2000년이 막 되어 시끌벅적하게 벌어지는 각종 행사들을 TV로 보던 지현이는 문득 외삼촌에
게 물었었다.
"저.. 외삼촌..."
"왜...?"
"지금.. 이 시간에도 시내에서 정동진 가는 버스 다닐까요..?"
"정동진..? 아니 이 밤중에 왜..?"
"그냥요..."
"아하... 너도 거기서 해돋이보고 싶니..? 오늘 거기 사람 장난 아니게 많을 텐데.."
"아니요.. 뭐.. 꼭.. 해돋이 때문이라기보다..."
"에이.. 그래 좋다.. 이따가 동트기 전에 삼촌이 차로 데려가 줄게..."
"괜찮아요.. 그냥..."
"괜찮기는.. 에구.. 우리 예쁜 공주님이 가고 싶으시다는데... 미숙아.. 이따가 같이 나
가자... 아버지는 어떠세요..?"
외삼촌이 지현이를 부둥켜않고 얼굴에 수염을 비벼대며 웃었다.
미숙은 외숙모의 이름이었다.
외삼촌은 외숙모를 늘 이름으로 부르고는 했다.
"에구.. 지현이 숨막히겠어요.. 저는 뭐 좋아요..."
"한 밤중에 어디를 나간다고... 그만들 자지.. 애 데리고 니네들끼리 다녀와라..."
외할아버지는 그만 주무시러 들어가셨다.
"그럼.. 태영이도 깨워서 데려갈까..?"
"아이 참.. 곤히 자는 애를 왜 깨운다고 그래요.. 날도 추운데 감기 걸리게.. 그냥 우리
끼리 가요.."
그렇게 해서 지현이는 외삼촌 부부와 함께 정동진에 해돋이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동틀 녘에 삼촌 차로 도착한 정동진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에휴.. 여기도 예전 같지 못해... 전에는 한적하고 좋았는데..."
삼촌은 해돋이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이 곳이 불만스러우신 지 작게 투덜거리셨다.
"지현아.. 춥지 않니..?"
"아니.. 괜찮아요..."
지현이는 걱정해주시는 외숙모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조용히 눈앞에 펼쳐진 차가운 바
다를 바라보았다.
"하 아..."
그 바다를 보면서 어린 지현이의 가슴 깊은 곳이 왠지 모르게 저려왔다.
지현이의 두 눈에 작게 이슬이 맺히는 것 같았다.
결국 지현이 혼자 보게 된 해돋이.
주변에는 외삼촌 부부가 있었고, 또한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곳에
서 혼자였다.
지현이는 그곳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었다.
새해를 맞던 겨울의 바다에서..
그리고..
'아빠가 내일 오신다..'
'과연 아빠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그 동안 어떻게 변하셨을까..?'
'내 모습도 아빠에게 많이 달라 보이 실까..?'
이렇게 상념에 잡혀 있는데 인영이가 등뒤에서 지현이를 탁 쳤다.
"얘.. 무슨 생각을 그리 하니..?"
깜짝 놀라 제정신이 든 지현이가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아 아무 것도 아니야.."
"혹시.. 경민이 생각이니..?"
"아니야.. 그런 것은..."
지현이가 당황하며 부인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경민이나 윤식이는..?"
"어머 얘.. 그 애들 아까 자기네 반으로 갔잖아.. 아주 넋이 나갔던 모양이네.. 좀 있으
면 다시 올 거야..."
"으응.. 그랬구나..."
"그나저나 방학식도 끝이 났는데.. 우리 어디 갈까..?"
"............"
"얘.. 어디 갈 거냐니까..?"
"저... 미안하지만.. 나 급한 일이 생각났거든... 나 먼저 갈게.. 정말 미안해.. 애들한
테 이야기 좀 잘 해줘..."
"어..? 야... 그럼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어.. 지현아..."
지현이는 갑자기 생각난 듯 친구에게 사과를 하고는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침부터 계속 아빠 생각만 나는 것이 왠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혼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
다.
"후 우..."
그렇게 나온 지현이는 터벅터벅 운동장을 걸어가면서 그냥 한숨이 나왔다.
'나 오늘.. 왜 이런지 몰라...'
그렇게 지현이가 교문을 막 나섰을 때였다.
".......!"
지현이가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학교 앞에 서울 번호판을 단 낮 익은 차가 한 대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 밖에는 한 사람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 하루종일 지현이의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지현이의 입이 마침내 약간 젖은 목소리로 열렸다.
"아 아빠..?"
진우는 예정보다 하루 일찍 강릉으로 왔다.
그렇다고 그냥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예정보다 진행 중이던 일이 하루 일찍 끝이 났기 때문이고, 왠지 지현이의 얼굴이 빨리 보
고 싶어서였다.
그 동안 몇 달 동안이나 얼굴 보는 것을 피해왔으면서, 새삼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다고 스
스로 생각을 하면서도 갑자기 지현이가 그리워졌던 것이다.
진우는 본래 여름방학에는 지현이를 만나야겠다고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지현이와 헤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는 자신의 마음도 안정을 찾
아 지현이를 만나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2학기에는 지현이를 다시 서울로 데려와야 하므로, 이 문제를 상의하느라 겸
사겸사 강릉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 먼저 도착을 한 강릉이었다.
진우는 처가에 전화로 도착을 알려주고는 그냥 지현이가 다닌다는 중학교 앞에 와서 기다리
기 시작했다.
오늘이 방학식 날이라니 학교는 일찍 파할 것이라 좀 서둘렀다.
'지현이는 그 동안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키는 많이 컸을까..?'
진우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면서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그런 연인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현이가 그의 앞에 마주섰다.
낮 설은 교복을 입은 지현이의 모습.
지현이는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인지 더욱 성장이 눈에 띄는 것 같았다.
9개월 여 간의 헤어짐.
불과 그사이에 지현이는 훌쩍 커버렸다.
전에는 작다고 느껴졌던 지현이의 키가 어느새 그의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몸매도 이제 여성으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아직 풋익은 과일 같은 여자아이의 몸에서, 이제 알맞게 솟아오른 젖가슴이나
몸 전체에 흐르는 여성의 곡선 등이 마치 알맞게 익어 가는 처녀아이의 몸을 향하고 있었
다.
또한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수진을 닮아 가는 얼굴.
그토록 그리웠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 동안.. 잘 있었어...?"
진우는 첫마디를 하면서 왠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예... 저.. 저도요... 잘 지내셨어요..?"
그것은 지현이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응.. 그럭저럭... 아.. 참.. 나 나는.. 이제 괜찮은 것 같아..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 저.. 저도요..."
지현이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 다행이네..."
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일도 너무 좋지만.. 그간 너무 얼굴 보기가 힘들었어... 지현이도 지 아빠 무척이나 보고
싶었을 텐데.."
장인어른은 오랜만에 들른 사위와 술잔을 나누면서 그 동안의 소홀함을 나무라셨다.
그러나 사실은 간만에 진우의 얼굴을 봐서인지 기분이 무척 좋으신 듯 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자주 들르겠습니다.."
"아냐.. 됐어... 일이 바빠서 그런 것을 뭘... 참.. 그나저나 이제 지현이는 데려갈 건
가..?"
"예.. 이제 2학기에는 데려가려고요.. 어차피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시켜야 하고..."
"그래..! 그렇구만... 지현이 지 애비하고 떨어져 지내는 걸 보면서 그렇게 안쓰러웠는
데.. 또 막상 데려간다니까 서운하기도 하네... 그 동안 우리 지현이 보는 재미로 살았는
데..."
"앞으로 자주 데리고 오겠습니다.. 장인어른..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에이 참.. 아버지도... 아.. 그런데 지현이는 언제 데려가실 겁니까..? 형님.."
옆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처남이 물었다.
"글쎄..? 2학기부터 서울에서 다니게 하려면 방학중에 전학을 시켜야겠지만... 여기에서
2학기 좀 더 다니게 할 수도 있고... 지현아... 네 생각은 어떠니..?"
진우가 지현이에게 의사를 묻자, 옆에 있던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대답을 했다.
"저는.. 그냥 여기서 1~2달 더 다녔으면 해요... 여기서 사귄 친구들도 있는데... 갑자기
방학 때 가기도 좀 그렇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나저나.. 자네.. 오랜만에 지현이를 보니 어떤가..? 그 사이에 정말 많이 크지 않았
나..?"
장인어른이 대견한 듯 지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으시자, 진우는 빈 술잔을 따라드리며
대답했다.
"예..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어요..."
그러자 미숙씨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며 옆에서 거들었다.
"지현이도 이제 다 컸지 뭐예요.. 시집 보내도 되겠어요.. 애가 이쁘니까 지 좋다는 남자
애들도 있는 것 같아요..?"
"예..?"
"아..! 왜 얼마 전에 그 녀석 말야..? 키가 멀대 같이 큰 녀석..? 요즘에 지현이 쫓아다
니는 것 같던데..."
"맞아요.. 얼마 전에 전화도 오더라구요.."
"......! 아.. 그 그래요..? 하 하핫..."
진우는 처남과 미숙씨의 그 말에 순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얼굴이 굳어진 것은 옆에 앉아있던 지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예요..! 외숙모.. 외삼촌.. 그 애는 그냥 학교에서 아는 친구예요..."
지현이는 당황하여 정색을 하며 애써 변명하려 하였다.
"어머.. 얘는.. 이렇게 정색을 하니..? 지난번에 그 애 이야기 들어보니 네가 남자친구 되
는 것 허락했다는데...?"
"오호.. 그래...! 너도 그 녀석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처남이 그 말에 재미있다는 듯 지현이를 놀리고 있었지만, 지현이는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
어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것... 그냥... 아 아빠.. 정말이에요..."
진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런 진우의 표정을 보고 장인어른이 재미있다는 듯 툭 치며 말씀하셨다.
"하 핫... 자네 표정을 보니... 어디서 웬 놈이 딸아이를 채가려고 한다는 말에.. 긴장이
되는 모양이구만... 하 하..."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긴... 나도 지금 자네 마음 다 알지... 그게 다 딸 가진 애비 마음인 걸... 하지
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나중에 지현이가 커서.. 정말 결혼하겠다고 사귀는 남
자 데려와 봐... 그때는 그 놈이 정말 도둑놈처럼 보이지... 하 하..."
"예... 하 핫..."
"아마.. 이제야 수진이가 자넬 처음 데려왔을 때.. 내 심정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걸..."
"그 그렇군요... 역시 자식은 키워봐야지..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 핫.."
진우는 그렇게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어쩐지 마음속은 개운치 않았다.
지현이는 정말 난감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아이 참.. 외삼촌도 그렇고 외숙모도.. 정말 짓궂으시기는..."
지현이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소리들을 한 두 분이 정말 야속했다.
"아.. 어쩌지..."
그녀는 아까 아빠의 굳은 얼굴이 생각나자 걱정이 되어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 날인데.. 이게 뭐람...'
그때였다.
똑 똑...
"누 누구세요..?"
"나야..."
"아... 들어오세요..."
아빠가 방에 들어왔지만, 지현이는 왠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기... 아까 그 이야기 말인데..."
"아... "
지현이는 순간 동요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무마하듯이 아빠의 말문을 막았다.
"저 저... 그건요... 그리 신경 쓸 필요 없으세요.. 그냥.. 두 분이 뭔가 오해를 한 거예
요.."
"그래...?!"
"예.. 그 아이는 그냥 학교에서 아는 아이예요.. 우리 학교 남녀공학이잖아요.. 저.. 서
울에 있을 때도 학교에서 아는 남자애들 있었잖아요.. 그냥 그런 거예요... 여자친구들이
랑 같이 어울리는..."
"그래.. 그렇구나..."
아빠는 수긍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미안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아서... 그렇다고 내가.. 의심한
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야... 그냥.. 처남이나 미숙씨가 하두 그러니까.. 어떤 남자아인
가 좀 궁금해서..."
"아 아니에요..."
"그럼.. 나 좀 피곤해서 먼저 쉴게..."
그리고 아빠는 좀 멋 적은 듯 방을 나가셨다.
"후 우..."
지현이는 아빠가 별 문제를 삼지 않고 나가시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현이는 아빠에게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 왜 이럴까..?'
지현이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진우는 회사일 때문에 강릉에 오래있지 못하고 이틀만에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현이가 일단 납득이 되도록 해명을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그 지현이의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그에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지금쯤 지현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었다.
지현이는 이제 한참 싱그럽게 물이 오르며 더욱 아름다워졌고, 당연히 남자아이들의 눈에
띌 것이다.
또한, 지난 수개월 동안 자신과는 떨어져 지냈다.
당연히 그녀나 또래의 남학생들이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조건과 이유가 충분했다.
물론, 지현이는 또래의 딸아이가 아닌 어른인 수진이의 영혼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녀는 지
금 중3의 아름다운 여학생인 것이다.
진우는 문득 예전에 지현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느꼈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어떤 서글픔에 관한 기억.
풋풋한 젊음을 시작하는 나이의 지현이와 이제 40대의 나이인 자신과의 현실적인 벽.
그 부러움마저 섞인 어떤 서글픔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지현이를 좋아한다는 남자아이들에게는 그런 현실적인 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진우에게 있어서는 어떤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진우는 진우대로 중년의 인생을 살아가고, 아내는 아내대로 새로운 어린 인생을 살
아가며, 영영 그녀를 잃게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방학중에라도 데려와야 할까..?'
진우의 그 불안감은 이제 어떤 초조함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이대로 지현이를 자신이 없는 그곳에 놔두어도 될까 하는 불안감, 초조함이었다.
진우가 불안감 때문에 일손은 놓고, 다시 몇 시간이 걸려 강릉을 찾은 것은 그 다음 날 저
녁이었다.
그리고 처가 근처에서 지현이를 바래다주러 따라온 그 남학생을 처음 본 것도 그 날이었다.
진우가 그 장면을 본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그는 강릉에 도착하여 처가 근처까지 오게되자 막상 다시 망설여졌었다.
며칠만에 뒤바뀐 자신의 이런 변덕을 처가 식구들이나 지현이가 어떻게 생각을 할까?
그래서 근처 길목에 차를 세우고는 한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길 뒤편에서 낮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현이다..!'
지현이의 목소리를 듣고 일단 차 문을 열려던 진우는 순간 이어서 들리는 웬 남학생의 목소
리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
백 미러로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 남자친구로구나..!'
진우는 어떤 이유에선지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볼까봐 차안에서 몸을 웅크
려 숨고 말았다.
다행인지 지현이는 그 남학생과 서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진우의 차를 눈치채지 못하
고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저 앞 골목 입구에서 두 사람은 헤어지려는 듯 걸음을 멈추어 섰다.
진우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근처의 차안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 남학생은 키가 큰 편에 무척 인상이 좋은 아이였다.
두 사람은 진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진우의 차까지 조그맣
게 들려왔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 집에 거의 다 왔잖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돼..?"
"안돼... 집에서 눈치 보인단 말야.. 너 땜에 내가 전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아 아냐.. 그건 알 것 없어..."
"뭐..? 칫..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어..! 기분 상했니..? 미안해..."
"냅 둬... "
"어.. 야아.. 많이 화났니..? 남자애가 토라지기는... 그만 화 풀어..."
"그럼 화 풀 테니까 소원을 하나 들어줘.."
"뭔데...?"
그러자 그 남학생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지현이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나.. 지금.. 지현이 너에게.. 키스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줘..."
"......!"
지현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기는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순간 뛰쳐나가려다 애써 자제하고는 지현이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나.. 다른 남자애들처럼 갑자기 도둑 키스를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지현이 너와의 첫
키스를 그러고 싶지는 않아.. 허락해 줘..."
"............"
그 남학생은 계속 말을 이었지만, 지현이는 갑작스런 그의 요구에 무척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아 안돼.. 아직은.. 나.. 아직..."
"........."
"아직은..."
"후우...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래도 나는 네 공식 남자친구 아니니..?"
".............."
"아냐.. 미안해... 갑자기 이런 소리해서 좀 놀랐지..?"
"아냐.. 내가 미안해..."
그렇게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다.
그러자 그 남학생은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장난스런 말투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꼭 물러서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
"..........!"
"응..? 알았지..?"
지현이는 남학생이 그렇게 분위기를 풀어주자 잠시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 장난스런 미소로 재촉을 하자, 지현이도 곧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 아이 참... "
그러나..
진우는 멀리서 지현이의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망치로 뒷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아름답고 수줍은 미소였다.
그리고 예전에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지어주던 그런 그리운 미소였다.
진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그저 멍하니 있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한가지 사실만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지현이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었다는 것을..
저 남학생과의 일을 자신에게 숨기려 했다는 것을..
진우가 다시 앞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이미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헤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곧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현이에게 다가가고 있는 진우의 마음은 이미 두 가지 감정만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질투'라는 감정과 또 하나 '두려움'이라는 감정.
40이 넘은 불혹의 나이에 어린 남학생으로 인하여 이런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진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현이는 경민과 헤어지고는 아직도 빨갛게 상기된 볼을 어루만지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 경민이도 참... 다음에도 그러면.. 나 어떡하지...?'
그때 좁은 길 뒤편에서 차 한 대가 미끄러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현이는 길을 비켜주기 위해 무심코 차 쪽을 바라보다가 순간 소스라치며 놀랐다.
"아앗...!"
그곳에는 지금 며칠 전 서울로 가셨던 아빠가 다시 돌아와 계신 것이다.
그는 차창을 내리고 지현이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
"어 어쩐 일이세요...? 여기..."
아빠는 대답 대신에 차 문을 열고는 말했다.
"타... 다른 곳에 가서 할 이야기가 있어..."
지현이는 그런 그를 보며 자신의 온몸이 작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아빠가 방금 전 경민과 함께 있던 자신을 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키스를 요구하는 경민의 이야기도 들으셨을지 모른다.
'아..! 어떡하면 좋아...'
지현이는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차를 운전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계셨다.
그리고 차안을 무겁게 흐르는 침묵은 어린 지현이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어떻게... 아마.. 경민이의 말을 모두 들으셨나봐..'
'아빠가 뭐라고 하실까..?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지현이가 고개를 숙이고 그런 생각들을 하며 속으로 불안해하고 있을 때, 문득 차가 멈췄
다.
깜짝 놀라 창 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경포호 주변이었다.
"여기서 이야기 좀 하자..."
"네..."
"............."
아빠는 다시 잠시동안 무슨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마침내 결심을 하신 듯 말씀을
하셨다.
"나.. 생각이 바뀌었어..."
"무슨...?"
"방학중에 전학수속을 하자.. 2학기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그렇게 할 테니.. 방학중에 서울에 올라오게 준비를 해 둬..."
"하지만... 그건.. 이전과 이야기가 틀리잖아요..."
"이야기는 바뀔 수 있는 거야... 어차피 중3 때 서울로 돌아올 것.. 1~2달 빨라지는 것
뿐이야..."
"그래도 저하고 상의도 없이 이렇게..."
"그럼.. 좀 더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그 그건.. 그냥... 갑자기 친구들과 헤어질 준비도 안 되었고..."
"친구..? 그 남자친구 말이야...?"
".......!"
"그 남학생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기 싫은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런 건... 경민이 때문이 아니에요..."
"경민..인가 보지..? 그 남자친구 이름이..."
"저.. 아까 보신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까 경민이가 나 바래다 준 거 보신 거
죠..?"
"응..."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몰라도.. 그냥 바래다 준 것일 뿐이에요... 그냥 친구예요..."
"오해가 아냐..."
"오해예요.. 학교 다니다보면 아는 아이들도 있는 것이고.. 친구도 사귈 수 있는 것이잖아
요...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요즘에는 남자애들이 그냥 아는 여자애들 에게도 키스를 요구하니..?
"아....!"
'역시나.. 들으셨던 거야..! 어 어쩌면 좋아...'
"하지만.. 그 키스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야..."
"그럼...?"
"아까.. 그 미소..."
"......?"
"당신 자신은 못 느꼈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 남자애에게 보여주었던 그 미소..."
"......!"
"작고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게 어떤 의미라는 것인지 나는 알아..."
".........."
"왜냐하면.. 나도.. 당신의 그 미소를 보아왔으니까..."
"그 그건..."
"그 아인.. 이미 당신에게.. 단순한 학교친구가 아니었어..."
순간 지현이의 작은 어깨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일단.. 당신은.. 그 아이 일과 관련해서..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거야..."
"............"
"물론,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지나 모르겠어... 이미 주희 일로 당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지는..."
"하 하지만..."
그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변명조차 못하고 아빠의 말을 듣고만 있던 지현이가 항변하는 표
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 저에게도.. 사생활은 있는 거예요... 학교생활도.. 친구들도.. 그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맘대로 하시면.. 이곳에서의 제 사생활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것만은 알아줘... 이건 궤변에 나의 자기합리화가 될 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한
행동에 결과를 책임을 질 수 있지만... 당신은 그럴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당신은 지현이가 아니야... 딸아이가 아니라고.. 당신이 하는 행동은.. 비록 딸의 몸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도... 그것은 딸애의 인생이 아냐.. 결국 당신이 원해서 하는 거잖
아..."
".............."
"만약에.. 지현이의 영혼이 돌아온다면... 당신이 한 행동의 결과는 모두 그 애가 뒤집어
써야 해..."
'아.. 아니예요... '
지현이는 마음속으로 아빠의 말을 부인하고 있었다.
"만약에.. 지현이의 영혼이 돌아와서.. 엄마가 자기의 몸을 가지고 마음대로 한 일들을 알
면 어쩌겠어...?"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동안.. 그토록.. 힘들어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잖아..."
'나 나는 엄마가 아니에요...'
"물론.. 나는 지금 질투를 느끼고 있어.. 우스운 일이지만.. 이 나이에 어린 남자애한
테... 하지만 단순히 질투 때문에 이러는 것만은 아냐..."
"............"
"이성교제나 그런 것.. 잘못하면 딸애의 장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신중해 줘..."
'아니에요... 아빠... 제 제가 바로 지현이라구요.. 이건 바로 제 인생이라구요...'
하지만 지현이의 입에서는 차마 이 말이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저 두 눈에 안타까운 이슬이 맺히며 이렇게 항변할 뿐이었다.
"하지만.. 너 너무하세요..."
결국, 그렇게 지현이는 방학중에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 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빠와의 재회였는데..
이렇게 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우울한 재회가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