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9)

-5부 공주 낙랑(3)-

유라는 지난 1년간  많이 변했다. 노예  건석과의 관계는 그녀가 살아온 동안  배워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또래의 귀족아가씨들과는 전혀 다른 세월

을 보내며 완전한 여인으로 성숙해진것이다.   유라 자신도 그게 싫지 않았다. 뜨겁고 민감

해진 육체는 건석과의 정사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고  이제는 그것없이 사는 삶을 생각조

차 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토록 행복해 하는데 무슨 잘

못된 것이 있을까. 세상사람들이 뭐라 하든 자신도 좋고 어머니도 좋아하는 그런 관계는 유

라에게 어떠한 부정(不正)도 아니었다.

그날 오후.

"야얍!!"

오전의 황홀한 정사가 끝난후 만족스러운 잠속에 빠져있던 유라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

이 깼다. 숙민과 건석은 벌써 일어나 밖에 나가고 없다. 자주 들어본 고함소리였다. 유석(柳

石)이 뒷뜰에서 검술을 연습하고 있는 모양이다. 유석은 올해 15세가 되는 유라의 친동생으

로 유태건의 하나뿐인 아들이다. 유라는 침상에서 일어나 욕실에서 대충씻고 뒷뜰로 나갔다.  

하나뿐인 동생인데 유라는 요즈음 동생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었다. 건석에게  너무 빠져 

그외 일은 모든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혼자서 이소리저소리 지르며  놀고(?) 있는 동생이  안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도 신경써준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건석을  알기전만큼 동생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모녀가 한남자에게 빠져  정작 친혈육에게 무관심했다니 ..유라는  슬며시 죄책감이 

들었다.

어렸을때부터 너무 예쁘게 생겨 계집애라고 놀림받던 동생은 15세가 되도 여전히  갸날프고 

소녀같다. 뒷마당 정가운데서 어울리지 않게 큰 검을 든 유석은 검법형을 익히는 연습을 하

는 듯 반복해서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다. 누나가 온것도 모를정도로 열중하고 있었다. 동생

의 무예연습을 말없이 살펴보던 유라는 유석을 불렀다.

"유석아 "

"어. 누나!"

땀을 뻘뻘 흘리던 유석은 동작을 멈추고 유라를 쳐다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너 정말 많이 늘었구나! 자세가 아주 좋아"

"진짜? 진짜 많이 는 것 같아?"

누나에게 칭찬을 들어서인지 유석은 환하게 웃었다. 치마만 입혀놓으면 영락없이 소녀로 보

일정도로 미소가 예쁘다. 

"응! 유석이가 칼한번 휘두르면 오랑캐 열명은 문제 없겠다. 호호"

"헤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웃는 유석을 보자 유라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왕 기분 좋게  해주는 김에 더 좋게 해주자고 

유라는 마음먹는다.

"누나랑 대련 해볼래?"

"좋아!! 전에는 내가 매일 졌지만 이번만큼은 누나를 때려 눕힐거야!!"

"호호 . 아가씨를 때려눕히다니.. 못됐어!! 좀 봐줘!"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았던 유라는 숙민이 만류하는데도 불구 하고 유석과 함께  아

버지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런데 유석이 또래의 사내아이들에 비해 골격이 가늘고 민첩하지 

못해 형편없는 실력이었던것과는 달리  유라는 검에 재능이 있어 아버지 앞에서 두 남매가 

대련을 하면 항상 유석이 실컷 두들겨 맞고 울음보를 터트리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그렇지

만 건석을 만난이후로 유라가 검술연습을 그만두었으니 그동안 꾸준히 연습해온 유석이  자

신 있어하는 것 같다.

유라는 주변에 있던 목검을 주어들고 마당으로 내려가 동생앞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저줄 

생각이다. 근 1년간 검술연습을 안했지만 방금전에 동생의 검형연습을 보니 그때보다 더 나

아진게 없는 것 같았다. 원래 실력으로  하면 충분히 이기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매일 

얻어 맞던 누나에게 이기면 유석은 엄청나게 좋아할 것이다.

-짜식 ! 져주지 뭐-

그런데 대련이 시작되고 막상 목검을 튕기면 몰입하게  되자  딴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유

석은 칭찬을 들은데다 누나가 일년간 연습을 않한 것을 믿는 듯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해왔

는데 유라는 요녀석이 건방져 하는 기분이 들었다. 연습을 안했다고 해도 유석의 공격은 느

리고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해서 온통 헛점 투성이었다.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유라는 차

츰 져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면서 공격적으로 목검을 휘둘렀다.

"딱~~~"

순간적으로 유석의 안면에 빈틈이 보이자 유라의 검이 날아들어가 동생의 머리통을  강하게 

내려쳤다.

"으악!!!"

너무 세게 쳤는지 유석은 뒤로 발랑 넘어지면서 쓰러졌다. 유라는 깜짝 놀라 쓰러진 동생에

게 황급히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가 너무 세게 친것 같아서 때린 유라가 더  놀랐

다.

"어머. 어머.! 석아! 괞찮니?"

유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울상을 짓고는 얻어맞은 머리통을 비비고  있다. 그리곤 울기 시작

했다.

"어어엉..엉..엉 아파..아파..누나 미워!"

"미안. 미안. 에구 이런 어쩌나 "

유라는 동생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유석의 머리를 감싸안고 맞은 부위를  호호하고 

불어주었다. 

-이게 아닌데!! 에잉 그러길래 왜 그렇게 까부니?-

그날 유라는 우는 동생을 달래느라 오후내내 매달려야 했다.

저녁때 유태건이 오랜만에 집에 와서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게되었다. 유석은 낮에 대련

에서 누나에게 진 일이 아버지에게 알려질까봐 끙끙대며 안절부절  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알면 사내녀석이 매일 그모양이어서 어떻하냐고 혼이 날 것이다.  유라는 그런 동생이 귀여

워서 몰래 귀에 대고 말않하겠다고 속삭였고 동생은 그런  누나를 보고 헤헤하고 어설푼 웃

음을 지었다.

요즘들어 물이 오를대로 오른 숙민은 더욱 더 요염하고  아름다워졌다. 건석을 알기전에 유

부녀 답지 않게 순결한 처녀같던 모습이 최근에는 볼이  발그레해진 것이 숙성한 과일같다. 

유라는 그런 어머니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버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틈없이 허리를 꼿꼿히 세운자세로 아버지는 수저를 들어  밥을 입속에 넣고 기계

적으로 씹어 넘긴다. 표정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유라는 아버지가 입속에 넣은 밥알숫

자나 그것을 씹는 횟수도 항상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궁금했다. 민감하고 감성적인 어머

니와는 전혀 다른 아버지, 지금은 아버지가 이가족의 가장이지만  밤에는 노예 건석이 주인

이 된다. 생각하는것만으로 유라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아버지가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

을까? 그리고 건석이 지금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 그런데 그것

은 왠지 역겨웠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아버지에 비하면 건석은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행동하나하나가 품위가 없고 어딘지 비열하다는 인상마저 준다. 낮에는 역시 아버지가 가장

으로써 있는게 훨씬 보기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밤은 다르다. 비열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건석이 훨씬 자극적이었고 유라를 흥분시켰다. 

식사하는 동안 내내 아버지는 항상 그러하듯 별말이 없다.  식사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최고 

목표는 밥을 먹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외에 신경쓰지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그랬다. 자기

의 목표에 모든 것을 쏟아붇고 그외의 것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어머니가 불만이 많

을 수밖에... 어머니도 별말이 없고 정숙하고 지적인 평소의  모습을 하고 다소 피곤한 표정

을 짓고 있다. 밤에 건석에게 주인님,주인님하며 온갖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았다면 지금 어

머니의 표정을 도저히 상상할수 없을 것이다. 

아 아버지가 조금만 자상하셨다면 . 건석에게 조금만 기품이 있었다면.

식사가 끝나자 다른날과 다르게 할말이 있다며 아버지는 차를 내오도록 하고 가족을 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했다.

"흐음.. 유석이는 근간 성실하게 학문과 무예에 정진하고 있느냐?"

"네..아버지"

그러면서 유석은 유라의 눈치를 보았다. 유라는 씩 웃는다.

"이 아버지가 봐줬으면 하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럴 여유가 없구나.."

"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걱정마세요.."

"음 그래. "

이번에는 유라에게 말문을 연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식사후까지 식구들을 잡아놓고 있자 더

욱 피곤한 표정이다. 

"유라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혼기가 꽉찼으니 처신을 더욱 조신하게 하고 어머니에게 부도

(婦道)에 대해 가르침을 받거라"

"네 아버님"  

언제나 근엄하신 아버지가 항상 하는 말이다. 평소에 말이  없다가 어쩌다 유라에게 말을걸 

때 하는말이 항상 부도니 뭐니 하는것이어서 유라는 그것이  불만이다. 조금만 더 인정어린 

말을 해주시면 안되나? 이런이런 우리딸 정말 예쁘구나.  아이구 이리오너라 하면서 안아주

시기라도 하면 어디가 잘못되나?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었고 그런아버지의 최상의 애정표현이 그런 훈계를   하는것이란 것을 총명한 유라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부인도 수고가 많소. 하인들이 부족해 집안일이 쉽지 않을터인데.."

"괞찮습니다.. 대감님. 집안일은 걱정마세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길을 피한다. 어머니의 대답은 부하가 대장에게 보고를 하는것과 비슷

하다. 아버지는 가족을 쓰윽 돌아본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연다. 가족들을 모

아놓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거란오랑캐가 신성한 우리땅을 가까운 시일내에  침범할  것이다 . 물

론 튼튼한 이성과 나 유태건이 있으니  큰일이야 있겠냐마는 태수의 처자로서 또한  위대한 

고구려의 귀족으로써 평민이나 다른 성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해주길  나는 바

라고 있소. 우리 고구려는 옛부터 싸움이 벌어지면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나서서 싸우거나 최소한  뒤에서 전투를 도왔으니 그런 전통을 잊지 말길 바라며 그리고 절

대 이런 일은 없겠지만........."

아버지는 차를 한잔 들이켰다.

"만약.....만약에 아주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때야 말로  고구려인이라는사실이  부

끄럽지 않게 행동을 해야 될것이오."

불행한일? 부끄럽지 않은 행동? 유라는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는 긴장하며  새파래지는 것 같다.

"이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부인이 신경을  써야 될것이오.알겠소?"

"네에..대감님."

어머니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버지!!!  저도 데려가 주세요!! 거란놈들이랑 저두 싸우고 싶어요"

유석은 싸움이니 명예니 전통이니 하는 어린 소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단어들이  존경

하는 아버지입에서 나오자  소리쳤다. 네녀석 실력으론 10살짜리 오랑캐도 못죽일거야 이바

보야. 유라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이지. 석이도 올해 15세가 됬으니 싸움터에 데려가 주마"

"정말요? 와우 신난다!!"

아버지는 대견하다는 듯 유석이를 바라보며 흐뭇해 했다.

"조만간 이아버지가 부를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네에!! "

기분이 좋아진 유석과 달리 어머니는 유라와 유석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라는 그

냥 이해가 안가 얼떨떨 했을 뿐이다 .

물론 아버지는 석이를 성벽위로 데려 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이상한 일이지만 유라는 그뒤에 일어났던일이 꿈인지 생시였는지 나이가 한참들어서도 분간

을 하지 못했다. 꿈인것도 같고 기억인것도 같았던 그때  .. 전쟁이 터진 그날로부터 몇밤을 

보낸후 갑자기  아버지가 다시 집에 오셨다. 유라는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며 우리나라가 이기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싸움중에 잠시 집에 들리신줄 알았다.

덩치 큰 남자의 머리뒤에 햇살이 비치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그늘이 져서 누군인지  확실히 

볼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아버지 였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그 사람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늘진 얼굴에서 

유달리 하얀이가 빛나고 있다.  아버지는 유라에게 검을 가져오라고 말했고 그녀는 얼른 가

서 보석으로 치장된 옛부터 유씨집안에 가보로 내려온 커다란 검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껴앉

고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아버지 옆에는 우는 어머니와 겁에 질린 유석이 어머니의 허

리를 껴안고  위태하게 서있었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와 유라,유석남매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곤 뒤도 안돌아 보고 밖으로 나갔다. 

유라는 어머니에게 왜울어, 왜울어 하며 물었는데 숙민은 대답은 하지 않고  유라와 유석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 부둥켜 안고 벌벌 떨었다. 유석은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엉엉거

리며 울었다.

매캐한 뭔가 타는듯한 그런 냄새가 안방에까지  밀려들어왔고 밖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고함소리, 뭔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라도 그제서야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계속 

어머니에게 무슨일이 났는지를 물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머니는 딸을 누구에겐가 빼앗기기

라도 할것처럼 있는 힘껏 껴안을뿐이다. 

아버지가 다시 나간지 두시진(4시간)의 시간이 자나도록  세사람이 한덩어리로 서로 껴안고  

떨고 있을 때 안방문밖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유석은  더욱 겁에 질려 소리 높혀 

울고 자신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의 팔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유라는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이방저방 뒤지는 것 같은소리도 들렸다 .황급한 발걸음. 거칠게 열리는 문소

리들... 그러다가  그 소리는 세사람이 있는 방문앞에서 멈추었고  드디어 방문이 부서질 듯 

활짝 열렸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괴물도 귀신도 아니었

고 아버지가 전에 자주 데려왔던 젊은 무사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세사람

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피로 목욕을 한 듯 온몸은 피와 상처투성이었고  상투는 풀려 검

은 머리카락이 여자처럼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핏발선 눈에는 살기가 가득차 있어 세사

람은 그의눈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정도였다. 숙민은 두 자식을 그에게서 보호하려는 듯 

양팔로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감싸 안았다. 그는 한손에 핏물을  뚝뚝흘리는  칼을 들고 있

었는데 세사람을 보자 처참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태도로 검을 허리에 차며 바닥

에 무릎을 끊고 앉아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그는 그 무서운 눈으로 세사람을 똑바로 쳐다

본다. 어머니가 울듯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아랑(雅浪) 대..대..대감님은 어떻...게...되었나요."

아랑, 맞아 저사람이름이 아랑이었지. 유라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동안 젊은  무사는 

닭똥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린다. 피와 시커먼 때에 절은 뺨으로 자욱을 만들며 눈물이 흘

러내렸다.

"분하게도.. 성주님은 전투중에 전사하셨습니다.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나 배반자가 성

문을 여는 바람에.... 최후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 우리는 패했습니다. 흐흑"

그의 얼굴은 이제 피와 땀과 눈물로 뒤범벅 되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말에 이제까지 울지 

않던 유라도 울었다. 너무 무서웠다. 이제 우리는 다죽는건가? 아버지를 다시는 못보게 되는 

건가? .유석도 울고 어머니도 목놓아 더욱더 크게 울었다.

남자는 주먹으로 눈물을 쓰윽 닦더니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시간이 없습니다. 마님. 적은 조만간 이곳까지  들이닥칠것입니다. 수치스럽지 않게 마무리

를 하십시오. 성주님께서는 그 난전중에서도 저를 불러 마님과 자제분들의 최후를 호위하라

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소장도 뒤처리를 하고 마님 뒤를 따르겠으니 어서.."

아랑은 그말을 하더니 다시한번 크게 절을 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문밖에서 세사람을 지킬

려는 것 같다. 유라는 그제서야 얼마전 아버지가  애기했던 명예로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닳

았다. 

모년모월 모성이 남쪽에서 쳐들어온 나쁜 오랑캐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용

감한 무사들은 열심히 싸웠으나 남쪽  오랑캐들이 너무 강해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최후가 

다가오자 살아남은 무사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을 하였습니다.  적에게 포로가 되어 전

하와 조정과 우리나라에 부끄러움을 안겨주기보다 아름답게  죽는 길을 택한것입니다. 부인

들도 남자들에게 지지 않았습니다. 착하고 상냥했던 그 성의 부인들은 주인을 따라 작은 손

으로 작은 검을 들고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자식들을 먼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

다. 그 부인들은 약하고 힘은 없었으나 명예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이 일의 교

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비틀거리며 침실의 서랍장에 가서 작은 칼을 꺼내들었다. 은으로 장식된 예쁜칼이

었는데 어머니가 시집올 때 외할머니가 주신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저걸로 우리를 찌를것인가? 유라는 죽기 싫었다. 왜 죽어야해. 도망이라도  가봐야 

되는 것 아니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와 동생과 

자신까지 왜 죽어야 되는거지? 거란오랑캐가 성문을 열고 안까지 들어왔더라도 어딘가 도망

갈 구멍이 있을 것 같았다. 이 큰성에 우리세사람 도망갈 틈이 없을까?

숙민은 자식들앞에 선채 칼집에서 칼을  빼냈으나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어떻게 

내가 배아파하며 낳은 내자식을 내손으로 죽일수 있단 말인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귀

한 자식들을 ...내목숨보다 내 영혼보다 이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내새끼들을  ...그녀는 

운다. 그러다가 문쪽을 향해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보시오. 아랑. 이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랑이 이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갈수

는 없소? 나는 죽어도 상관없으나 차마 이 어린것들은 "

그러자 밖에서 신경질적이고 위협적인 어조로 아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후세에 수치스러운 이름을 남기실겁니까? 성주께서는  탈출하실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적진에 뛰어드셨습니다. 제발.. 마님.. 시간이 없습니다. 적이 사방을 포위하

고 있어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마님..용기를 내십시오. 힘드시면 소장

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자살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것 같았다.

나쁜새끼. 도와드리겠다고? 어머니가 못하시겠다니까.  제놈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 덩치도 

크고 힘도 새면서 힘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에게 죽으라고 하는거야? 도망칠 시도라도 해

봐야 할 것 아니야! 유라는 아랑이 죽이고 싶을정도로 미웠다. 나쁜놈!나쁜놈! 개자식!! 

어머니는 실성한 여자처럼 방바닥에 덜썩 주저 앉더니 칼을 거꾸로 잡아 목을 겨누고 눈을 

감았다. 자기손으로 자식을  죽일수 있을것 같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살아있자니 지금 상황

을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여린  그녀에게는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된단 말인가. 아이들아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못참겠구나. 숙민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울며 말하고 서서히 목을 항해 칼을 찔러 올렸다.

-5부공주 낙랑(3)끝-

-5부 公主 樂浪(4)-

유라는 그모습을 보고 더욱 화가 났다. 두아이의 어머니가  되어가지고 어떻하든 살아날 생

각은 하지 않고 죽을 궁리만 하는 어머니가 그순간만은 정말  싫었다.  그녀는 스스로 목을 

찔러가던 숙민을 막고 칼을 빼앗으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어머니!! 미쳤어요? 어머니가 왜 죽어야 돼?. 어머니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 "

"애 야. 애야....아. 흐흐흐흑"

애초부터 죽을 마음이 희박했던 숙민은 딸에게 칼을 빼앗기자 그것을 찾을 생각은 하지 못

하고 마냥 울기만 했다. 

유라는 죽기 싫었다. 오늘 아침 식탁에 올라온 산뜻한 산나물은  얼마나 향기로왔던가?  피

곤하게 무언가를 하고 나서 침상에 누워 이불속에 파묻힐 때 그 안온함은 또 얼마나 달콤했

던가? 살아있기에 이 작고 별볼 없는 모든 것이 그토록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 그리

고 건석과의 황홀한 정사. 전신의 모든 세포가 타오를 것 같던 세상 그 어떤 쾌락과도 비교

할수 없었던 그것. 그것들을 다 포기하고 어떻게 죽을수가 있어? 죽음 그 암흑 모든 것과의 

이별. 난 그렇게 못해.  그리고 모란꽃보다 더 아름다운  어머니가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왜 자기손으로 무기력하게 목숨을 끊어야하며  또 세상의 즐거움을 반에 반도 알지 못하는 

이제 15살밖에 안된 어린 유석은 왜 스스로 그 파릇한 생명을 마감해야 되는지 이해할수도 

절대로 받아 들일수 없었다.

소녀 유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렬한 삶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 절대 이대로 죽을수는 없

었다. 차라리 오랑캐의 칼에 죽을지언정 스스로 또는 어머니의  손에 허무하게 죽을수는 없

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한손으로 유석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방밖으로 나가려 하였

다. 어딘가 도망칠 곳이 틀림없이 있을  것 같았다. 없다면 유라 자신의 기필코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유라가 어머니와 동생을  이끌고 안방문밖으로 나오자 아랑이 놀란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

다. 그러다가 금새 표정에  살기가 어리면서  짜증섞인  고함을 질렀다. 들어가라고 .유라는 

그럴수 없다며 대들었고  아랑의 입에서는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때 그의 표정은 평소에 준

수하던 젊은 청년이아니라 증오심이 가득찬 추악한 노파같았다.

"더러운 것들 . 그렇게도 살고 싶으냐?  너희들은 도대체 귀족의 긍지도 모르느냐. "

아랑은 검을 들고 세사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어서들어가라..어서. 그러자 유라는 어머니에

게 빼앗았던 작은 단도를 들고 반항했다. 그러나 아랑의 검이 한번  휘둘러 지자 작은 칼은 

유라의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 나가버렸다. 

아랑은 더 이상 세사람에게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이제는 직접 죽여없앨 생각을 하는 것 같

았다. 유석과 숙민은 살려달라는 말도 못하고 덜덜 떨었으나 유라는 아랑은 노려 보고 저주

의 말을 퍼부었다.

아랑은 숙민과 유라의 머리채를 잡고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유석이 아랑에게 달라붙어 

그를 때리며 말렸으나 태산보다 더 강한 신체를 가진 아랑은 끄덕도 하지 않고 유석마저 발

로 차 안방으로 밀어넣었다.

세사람을 안방으로 밀어넣은 그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검끝이 아래로 가게 하여 숙민에

게 칼을 겨누었다. 한때는 연심을 품었던  성주의 아리따운 아내. 그러나 이제는 해야될 임

무의 대상을 일뿐이다. 이것은 무사로써 당연히 해야될일이다. 수치를 모르는 이것들에게 자

비를 내리는 것이기도 하다. 죽어라. 죽어서 십수년간의 사소한 승리에 자만에 빠져  나라를 

이지경이 되도록한 모든 고구려인들에게 경종을 울려라

숙민과 유석은 그런 그를 보며 눈을 감았다.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유

라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눈을 뜨고 아랑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덫에 걸려 

막사냥꾼에게 생명을 빼앗기기 직전의 발광하는 살쾡이 같았다.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똑똑

히 보고 싶었다.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하나뿐인 생명이  날아가버리는 것은 참을수가 없

었다.

아랑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숙민의 목을 찌르려 하였으나 그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각

은 부드러운 여체에 칼을 박아넣을 때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압력이 아니라 자신의 등이  날

카로운 물체에 관통되는 차가운 고통이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눈앞이 서서히 어두

워졌다. 그리고 암흑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무슨일이 일어난걸까!

유라는 어머니를 죽이려던 아랑이 볏단처럼 앞으로  쓸어져 서로 부둥켜 앉고 있던  모자를 

덮치자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쓰러진 남자의 등에는 창이 깊숙히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누

군가가 숙민을 해치려던 아랑에게 창을 던져 그를 죽인 것을  알았다. 겁에 질려 아랑의 시

체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숙민과 유석을 도우며 유라는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

기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 유라는 차라리 아랑의 손에 죽는게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머리에 고양인이지 사자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짐승의 안면가죽을 쓰고  전신에  갈색털d

의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은 남자가 거기에 서있었다. 거란인이다. 

그는 유라 가족을 보고 껄걸 웃었다. 늑대보다 더  포악하고 잔인하다는 오랑캐에게 잡혔으

니 이제는 아무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살고자 했던 유라마저도 맥

이 풀려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것들이 그새 내 얼굴도 잊어 먹었나? 하하하핫"

도대체 이 야만인(野蠻人)이 뭐라고 지껄이는거야? 유라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듯한 인상이다. 

거란인이 머리에 쓴 짐승가죽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자 얼굴 전체가 들어났다. 건석이었다.

유라는 너무 놀라서 아무말도 못했고 남자의 이해할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든 숙민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건석을 만나지 못했엇다. 불안하

고 초조했던 숙민과 유라가 그에게 안기고 싶어 불렀을때도 어딘가에 볼일이 있다며 나타나

지 않았었다.  거란  출신인 것은 알았지만 그전까지 한갓 노예였던  그가 전사차림을 하고 

이 자리에 나타나니 도무지 어떻게 된일인지 알수가 없다.

건석이 특유의 그 비열한 표정으로 크게 웃으며 놀란 그녀들의 표정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

고 있는 와중에 무장한 다른 거란인  한사람이  불쑥나타나서 건석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예을 취했다. 마치 신하가 왕과 대면하는 것 같았다.  야만인은 숙민,유라,유석 이 세사람을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알아들을수 없는 거란어로  건석에게 무슨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건석이 화를 내기 시작했고 그남자는 놀라고 겁에 질린 얼굴로 무릎을 끓고 고개를 조아렸

다. 무슨말을 잘못한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건석을 보고 어찌해야될바를 모르던 유라는 건석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잘하

면 살아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건석이 지금 이성에서 목숨을 잃을까 걱정해야될 고구려의 노예가 아니며 유라

가족의 생사에 영향을 끼칠 수있는  승자측에 어떤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히 나타나 고구려귀족 아랑을 한창에 죽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라는 방금 나타난 거란인의 건석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오랑캐들 사이에서도 어느정

도 높은 위치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보니 건석의 등장은 유라에게 눈물이 나도록 반가

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라는 무릎걸음으로 건석의 다리밑에 기어가 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께요."

그러면서 유라는 어머니에게 눈짓을 했다. 와서 같이 빌라고. 평소같으면 유라보다 먼저  그

에게 다가와 아양을떨었을 숙민이나 남편의 죽음과  아랑의 일 때문에 그럴 정신적  여유가 

있을리 없다. 건석하면 떠오르던 음탕한 느낌도 그순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건석은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유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다가 숙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그녀도 그에게 다가와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랑에 의해  죽을 고비를 맞았다가 간

신히 건석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것 때문에 모녀의 애원은 더욱 간절하고 필사적이다.

유라와 숙민은 울면서 온힘을 다해 애원했다. 유석도 영문을  모르면서 그에게 다가와 함께 

빌기 시작했다. 그순간 유석은 어머니와  누나가 얼마전까지 얼굴을 맞대던  천한 노예에게 

굴욕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는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수있는 강한 사내가 아니라 난생처음으

로 경험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사리를 잃은 불쌍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비굴하게 빌고 있는 세사람을 보며 건석의 눈빛은 음탕함과  탐욕스러움으

로 가득찼다가 유석을 보고 살기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눈치빠른  유라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가장 비참한 처지가 되는 것은  여자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목숨을 

잃는경우는 반대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월등히 적다.  승자인 남자들은  문제를 일으킬 소

지가 많은 패자측 남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살해해 버리지만 여자들은 여리고 저항할수 없는

데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체념도 빠르기 때문에 능욕하기는  해도 죽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첩이나 아내로 삼거나 아니면 팔아 먹는다.

어머니와 자신은 예쁘다. 건석에게 충분히 성적으로 만족을 줄수  있는 보기드문 여체를 가

지고도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래왔다. 그러나 유석은 달랐다. 적이었던 고구려 귀족의 자

식이다. 언제커서 무슨 해꼬지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남자들은 한번 당한 수치를  여간해서

는 잊지 않는다.

살까지 섞은 사이이다보니 그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유석에게 살심을 품고 있는 것을 모녀

는 알아채고 유석도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건석은 피식웃으며 유석에게 향한 살기를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유라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밖으로 끌려나와 마차에  실렸다. 건석은 세사람에

게 마차위에 엎드리라고 명령하고 어디선가 가져온 이불을 그들위에  덮었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수 없었으나 목숨을 부지 하게된 세사람은 마차위 이불속에서 어쩌튼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사람을 태운 마차는 건석과 그의부하들로 보이는 거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밖으로 

나가려는 듯 현도성동쪽에 위치한 귀족들의 거주지구를 관통하는 길을 따라 움직였다. 유라

는 이불을 들추고 밖을 살폈다. 긴장이 풀려 정신이 없는 어머니와 동생과 달리 생존욕구로 

전신이 칼날같이 날카로와진 유라는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

다.

수도 없이 널려진 시체들. 불타는 집들과 절망적인 여자들의 울음소리. 비명. 시꺼먼 연기들. 

약탈한 물건을 희희낙낙하며 자신의 말안장과  마차에 싣고 있는 거란인들.  물건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자들. 곳곳에 쓰레기를 쌓아두듯 놓여있는 인간의 머리들. 

크고 화려하던 귀족의 대저택들은 하나같이 탐욕에 제정신이 아닌  거란인들의 약탈목표가 

되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죽어서야 볼수있다는 지옥이 거기에 있었다고 유라는 생각했다. 

유라일행을 태운 마차는 중간중간 멈추어섰고 건석과 그의 병사들도 약탈에 나서  빼앗은물

건들과 사람들을 쉴새없이 마차에 옮겨 실었다. 건석무리가 약탈에 나서면 다른 거란인들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것을 보고 건석이 혹시 거란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오랑

캐들은 건석을 무서워 하였다.

그리고 유라일행이 실려진 마차에는 다른 고구려인들도 태워졌는데 하나같이 여자들이다.

살아있는 고구려 남자는 한명도 볼수 없었다. 게중에는 유라가족과 친했던 귀족부인들과 딸

들도 있었는데 평소에 이런상황이 닥치면 서슴치 않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할 것 같

은 그들도 벌벌 떨며 거란인들에게 순종하였다. 끌려오던 그들중  일부는 옷이 찢겨지고 흩

트러진 것이 벌써 험한꼴을 당했던 것 같다. 그들역시 마차위에 엎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그

렇게 하고 유라네와 마찬가지로 이불이 덮혔다.

그러다가 유라는 그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나서 소녀 유라의 삶은 끝장이 났다.  동문앞 

광장에서였다. 

완전히 부서져 덜렁거리는 동문위 성루좌우 성벽위로 말뚝 같은게 박혔있었다. 유라는 처음 

그것을 보고 항상 보와왔던 고구려군의 군기대신 이제 성의 주인이 된거란인들의 깃발이 거

기에 서있는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말뚝은 무언가 고깃덩어리같은 것을 중간에  꿰뚫고 있었다. 그 고깃덩어리가   사람이라는 

것이 동문에 가까워지면서 확연히 보였다. 건장한 남자의 팔뚝  만한 굵기의 말뚝에 사람이 

꼬치처럼 다리사이에서 등으로 관통되어있었다.  한두개가 아니었다. 성루 좌우로  수십개가 

세워져 있었고 말뚝에 꽂혀있는 그들은 눈에 익은 고구려의  갑옷을 입은 군인들 이있었다. 

게중에는 아직 살아 있는 자들도 있어 조금씩 꿈틀대는것도 보였다. 

아직 살아있는 자들중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랑은  아버지가 싸움중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오랑캐들에게 잡혔던 것 같다. 동문바로 아래에 왔을 때 성루  옆 첫 번째 말뚝에 아버지가 

꼿혀있었다. 아버지는 말뚝에 관통당하고 배에는 유라가 오늘 아침에 건네주었던 보검이 손

잡이 까지 찔려 있었다. 보검의 손잡이는 그날 유달리 빛이 났다.

유라가 아버지를 알아 본순간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어머니가 그모습을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불속에서 어머니의 눈을  가렸다. 어머니는 밖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눈을 가리고 이불자락을 들추었던 손을 내렸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자신의 남편

이나 아버지가 저런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나서 정상적으로 살수는 없다. 특히  그들

을 그렇게 만든 자에게 가족을 속이며 육체적인 사랑이나마 사랑을 바쳤던 사람들이라면 더

욱 그럴것이다. 유라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앞으로 사람이 사는 것  처

럼 살아갈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사람은 자기 한사람으로 족했다. 어머니가  저모습을 

본다면 미칠 것이다.

현도성이 함락되기 수개월전

병부의 부위라면 언뜻보기에 낙랑국의 병권을 전부 쥐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

했다. 낙랑의 군사력을 이루는 두 개의 근간인 정부군과 사병(私兵)가운데 사병세력이 거의 

7할이 넘기때문에 부위가 직접 관리할수 있는 상비군은 전부  합쳐봐야 3만정도 였다. 그리

고 이 3만중에 5천은  치안당담부서인 순경(巡警)청 소속이었으므로 실제  병부부위가 관리 

할수 있는 있는 병사들의 수는 2만5천뿐이다. 

사병은 파악된것만 7만. 그런데 사병이 이렇게 많다고 꼭 나쁜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

자가 자신의 신병경호나 세과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키우는 군대이다 보니 훈련이나  보급이 

임명제 지휘관이 관리하는 정부군보다 나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

면 이들사병집단도 조정에서 파견한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함께 싸우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정부의 과중한 군사비 부담을 줄일수도 있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理想)대로 사병체제가 운영됬다면 낙랑의 군사력이  이렇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권이 유명무실화 되면서 원래대로라면 사병의  유지비용을 소유자가 전적으로 부

담해야될것이 조정이 일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뀜에 따라 비용은 비용대로 들어갔고  또 

사병이 정부군을 넘어설정도로 커지자 국법을  어기고 가렴주구하는 귀족들의 방패가  되어 

조정은  영지내에서 벌어지는 불법행위를 제어하기 힘들게 되었으며 수틀리면 왕권까지 위

협할정도로 성격이 더욱 나빠졌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강력한 병력을 믿는 귀족들이 조정에

서 파견된 지휘관의 명을 잘 듣지 않는 경우도 많아 전투에서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

다.

또한 전적으로 사병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자 유력자들은 경쟁자들보다  더많

은 사병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만 갔으며 그 비용은 오로지 

농민들의 고혈을 착취하여 충당됬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군사적으로도 문제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귀족들에게  분산되어 

소유된 사병집단이 대규모 전투에 적합하지 않게 조련됬다는 것인데 이들은 규모가 큰 전쟁

에 대비하기 보단 일종의 잡일꾼이내지 경호원으로 성격이 굳어져서 전술적으로 뒤떨어진데

다 전쟁의 기본인 진법을 알지 못했다.

고구려도 사병이 5할가까이 되는등 외견상 병력구조는 낙랑과 유사했으나 사병을 거느린 귀

족들의 태도는 낙랑과 크게 달랐다. 고구려 5부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내에서 신병을 징

집해서 기초적인 무술을 가르친  다음(고구려인들은 대부분 놀이하듯 어렷을때부터  무술을 

익혀 그 기간이 짧다.)가장 신경쓰는 부분이 진법과 다른 부대와의 합동작전에 대한 적응력

을 높히는 것이다. 고구려 귀족들은 자신들이 거느린 사병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

이면서 한편으론 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이것이 가능했는데 낙랑에서는 사병은 권력

자의 단순한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또 고구려에서는 사병의 유지비용

을 전적으로 소유자가 부담했으며 가혹한 영지내 수탈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병문제는 그 결과가 1차 대 고구려전쟁당시 7만의 낙랑군이 출격하여 5만의 고구

려 군과 싸워 한나절만에 처참하게 패한 전투로 나타났다.  그 7만가운데 1만은 정부군이었

고 6만은 사병이었는데 정부군이야 그렇다  해도 사병집단중 상당수는 훈련이 잘된  편이었

다. 하지만 평상시 경호나 개인적인  무예훈련.혹은 소규모 집단전투에 대비한 훈련만  하던 

그들은 대규모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으며 사병집단을 거느린 귀족들은  병

부에서 파견된 사령관을 우습게 보고 자주 명을 어겼다.

병부 부위가 되어 전체적으로 이런 상황을 파악하게된 자명고는 어떻게 하면 군대를 건강하

게 육성하고 사병문제를 해결할수 있는지에 대해 몰두 하였다. 많은 사람이 ,특히  왕족들이 

많은 수의 사병은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는데 자명고는 사병문제의 핵심이 왕권위협보다 

군사력약화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왕권은 자신이 보호해야할 지고의  것이 아니라 단지 과정

이며 어떤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권의 신성(神聖)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병을 섣불리 전부 없애려 하다가는 당장에 반란이 일어날것이며  그게 가능하더라도 사병 

7만을 전부 정부군으로 편입시키자니 도저히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낙랑

방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숫자가  10만이었으므로 규모를 줄이는일도  어려운일이다. 그 

비용을 감당하자면 전국의 세수체계를 재정비하여 전체적인 군사비규모를 늘려야 되는데 그

것은  단기간에 가능한 문제가 아니었고 병부에서 해야될 차원의 문제도 아니었으며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 였다.

세금 문제는 자명고가  오랫동안 군량관으로 재직하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문제였

다. 농민들에게 죽지 않을정도만 남기고 빼앗는다. 조정에는 실제 수탈한  양보다 적게 보고 

한다.  귀족들의 영지라도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이 전답에서 생산  가능한 곡식량을 조정

에 보고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적정세금이 결정되는데 문제는 그 관원들이 귀족들의  편이거

나 귀족 자신들이라는 점이다.  실제 거두어 들인 양보다  훨씬 적은 양(실제 100섬을 걷어 

들이고 50섬만 걷었다고 보고하고 조정에 그중3할인 15섬만-국법에의해-을 보낸다)만 조정

에 보내는데 조정의 세부 관리들이 이것을 일정량  빼 돌리고 다시 군부에 들어온 것은 장

군들에 의해 얼마간 사라지고 보급관련군관들이 또 빼돌린다. 그러니  실제 돌아 오는 것은 

극히 적은 수량뿐이다.

사병을 없애고 공정한 세수체계에 의해 정부군 단일로 군사력이 통합되는것이 이상적이었으

나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자 자명고는 우선 사병규모를 제한하고 사병에 대한 조정의 지원제

도를 없앴다. 1000마지기에 사병 500이하로 숫자를 제한하면  7만이던 사병이 5만정도로 감

소시킬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으며 2만의 사병을 정부군으로 편입시키고 귀족사병에대한  지

원분으로 그 2만을 감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불안정하고 앞날을 알수 없는 낙랑에서 사병을 줄이라는 요구가 쉽게 수용되리라고  생각하

지 않았는데 의외로 이일은 간단히 해결됬다. 왕족들이 자명고의 편을 든 것이다.  왕족들은 

그들이 누구나 왕이 될수 있는 자격에 근접한 사람들이라 왕권 보호 차원에서 실제 영지나 

병력보다 권위만 큰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경쟁자인 토착귀족들(물론 왕족들도 사병을 가지

고 있었으나 토착귀족들보다는 규모가 적었다.)의 병력을  줄인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것

이다. 거기다가 왕까지 자명고를 지지하고 나섰고 사병을 아예없애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귀

족들은 할수 없이 병부의 영을 따랐다. 

그리고 자명고는 본인은 몰랐으나 자신의 명성도 이일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부

패하고 제뱃속만 채우는데 혈안이 된 귀족들이더라도 어느순간  정직한 다른사람을 믿는일

도 가능한 법이다. 자명고가 권력을 탐하기보다는 공정한 사람임을 믿는 토착귀족들도 몇몇

이 있어서 그들 소수는 자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킬 사병축소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 하지만 

이때부터 대부분의 토착귀족들은 자명고가 왕족들편에 선 것으로 판단하고 견제하기 시작했

다.

아무튼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난해의 다음해 2월에 총 1만 8천의 사병이 귀족들에게 떨어져 

나와 정부군에 편입됬으며 자명고는 이들을 병부직속의  호어사(護御師)라는 군단에 소속시

켜 일종의 전략예비대로 만들어 상도부근에 주둔 시키면서 자신이 직접 훈련시켰다. 그런데 

자명고가 수도 부근에 1만 8천의 군단을 보유하게 되자 이번에는 왕족들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자명고가 마음만 먹는다면 조정을 뒤엎기에 충분한 숫자였기 때문이

다. 그래서 왕족들은 근위대를 증강하여  유사시에 호어사 병력을 제압할수  있도록 배치를 

재조정하였다. 

그리고 보급관계 부정을 일소하여 군수체계를 정비하였다.  누구보다 이분야를 잘알고 있던 

그였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일을 할수  있었으며  많은수의 보급관련 관리들이  처벌되었다. 

왕족이나 귀족들도 관련된 자가 많았으나  자명고는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경고하고  직위를 

박탈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 하였다. 너무 가혹하게 대했다가 후한이 두려웠기 때문이

다. 

그는 사병문제와 군수문제가 대강 마무리가 되자  다음으로 인사제도를 정비하였다. 낙랑에

서 군장교의 선발은 추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추천이 있으면 병부에서  경험많은 관리들이 

모여 추천된 사람의 자질을 검증하여 적당한 직급을 주는 식인데 과거에는 귀족들이 추천만 

하면 언청이에다 두다리가 없는 불구라도 누구나 장교가 되었다.  또한 권력이 큰자에게 높

은 자리가 돌아가는등 실력에는 상관없이 인사가 제멋대로 행해졌는데 자명고는 자신과  자

신이 직접 고른 실력있는 장교들로 검인방(檢人房)이라는  인사위원회를 만들어 능력위주로 

초급장교를 등용하고 고위급의 경우도 자질과 성과를  우선해서 인사를 단행하였다. 상장군

급이상의 인사는  부위들과 승상,태위가 모여 왕앞에서 여는 어전(御前)회의 대사성(大事省)

에서 결정하므로 자명고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적당한 인물을  추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과거 낙랑 병부가 인사를 해도  전체낙랑군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았는

데 그이유는 장악할수 있는 병력이 전체병력중 3할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라면 자명고의 

경우는 사병이 줄고 정부군이 늘어났으므로  공정한 인사의 파장이 적지  않았다. 전같으면 

병력이 적으니 자리도 적어서 쓸만한 인물을 어떤 자리에 앉혀놔도 정작 사병을 많이 거느

린 귀족들이 우위를 점하여 군사관련일에 영향력이 컸으나 이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만약 자명고가  적극적이고 대담한 사람이었다면 토지문제 까지 해결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호어사라는 자명고 개인에게 왕보다 더한 충성심을 받치는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왕의 절

대적인 신임과 백성들의 존경도 받는 그였기에 하려고만 했다면 못해낼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았다. 낙랑의 모든 악(惡)의 근원은 토지문제였고 군사력 약화도 그것에

서 문제가 기인한다. 경쟁이 없는 귀족들의 대규모 토지 점유와 가혹한 수탈. 자명고도 그것

을 알았다.  낙랑국내에서 의식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일이다. 그것이 낙랑전체

의 경제력을 약화시켜 군사력도 함께  내리막길로 몰아서게 하는것도 알았다.  그러나 감히 

그문제까지 거론하지 못했다. 문수도 토지문제를 제기하다 죽었다. 병부부위는 병사(兵事)문

제가 그 담당이지 그것까지  다룰 자리는 아니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한다.  

토지제도를 바꾼다면 낙랑내 귀족의 3분지 2는 자명고를 적으로 돌릴것이며 생존을 건 가혹

한 싸움이 벌어 질 것이다. 그것은 국가대 국가의 전쟁보다 오히려 더 참혹할것이다.

조정이나 왕.국가가 바뀐다 하더라도 바뀐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자기  자리를 보전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민족의식이 약한 이시대에 정복당한 국가의 지배층이 신왕조에 충

성을 맹세하고 살아남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토지문제의 변경은 자리의  본전은 고사하고 

기반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한다. 관련된 자들은 최후까지 모든 것을 걸고  싸울 것이다. 자

명고 자신이 만약 그런 투쟁에 참여한다면  승자가 될 확률이 높을지도 모르나  필연적으로 

많은 적을 죽여야만 할것이다. 그는 이것이 두려웠으며  생각하는 것 만으로 끔찍했다. 얼마

나 많이 죽여야 할것인가. 귀양이나 퇴직시킴으로써 또는 영지를 박탈하므로써 해결할수 있

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제거해야 결말이 날 문제이다.  게다가 이러한 투쟁이 승

리로 끝나고 나서 과연 그과실이 정당하게 분배 될지 그것도 확신할수 없었다. 누구보다 흑

백논리에 집착하는 그였으나 토지문제에 관해서만은  흑과 백사이에 회색이라는 것이  있고 

시간이 기회를 만들어 줄수 있다는 극히 모순된 생각을  하였다. 토지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병부가 해야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제기하는것이 반드시 옳은 일인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 

엄청난 유혈을 피할방법이 어딘가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였다.

자명고는 이러한 일련의 군제개혁을 전쟁이 끝난 다음해 3월까지 거의 완료 하였고 이로써 

낙랑은 군사력면에서만은 망하기 직전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토지문제가 완전히 해결되

지 않는한 이러한 회복은 극히 일시적이라는 것을 자명고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할만

큼 했고 생각했고 그이상은 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낙랑의 현인들은 자명고에게 그이상의 것을  기대하였다. 요근래 낙랑에서 자명고처

럼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경우가 없었고  그의 인물됨이 곧은 것을 알던  사람들일수록 

기대는 더욱 컸다. 한번은 과거 문수의 측근으로 토지문제를  개혁하려다 실각한 노인이 찾

아와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가 본질은 피하고 수박겉핡기 식으로 일을 마무리 하였음을 환

기시키며 비난을 하였다. 자명고 역시 극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때를 기다린다고 변명을 하

였는데 그가 일개 병부부위가 해야될일이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고 때가 아니라는식으로  말

한 것은 스스로 그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데도 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하는것에 다름아니었

다. 

-5부공주 낙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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