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왕(11)-
다음날 저녁까지도 묵경기 일행은 도착하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새벽에 도착했어야 했고
혼란스러운 전장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낮시간에는 도착했어야 되는데 그들이 오지 않
자 호동은 초조해졌다. 무슨변고라도 있는것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확인이
안된상황에서 호동은 안절부절하고 있다.
호적은 죽을 것이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충분히 탈출할수 있는 상황이 되더라도 이 원정이
실패한 책임을 지고 자결할 것이다. 그는 그런 자이다. 호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경멸한다.
병사들따위야 다시 모으면 된다. 구더기 같은 목숨들은 세상에 지겹도록 많이 널렸다. 훈련
이 부족하면 시키면 된다. 왜 내가 그들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호적 너는 죽어라 그러나 나
는 아니다. 나는 그들과 분리된 개체이고 그들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곳을 그리고 명령
받아야 되는 위치를 택했다. 죽으라는 명령도 받아야 되는 그런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그
러나 나는 틀리다. 나는 태자에게 명령을 받아야 되는 위치도 아니다. 그누구의 조종도 받
을 필요가 없는 완벽한 독립된 존재이다. 지랄맞는 말도 안돼는 일이다.
왕은 죽을수도 있고 살수도 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태자가 죽는다면 다음 보위는 누가
이을것인가? 둘째 호무는 1차원정때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왕자는 자신외에는 없다. 묵경기
가 가진 서신을 없애야 한다. 호적이 죽고 왕이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고 자신도 돌아가면
그 서신은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왕이 살아돌아가기 힘든상황에서 그서신은 다음
왕위계승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가 될 것이다. 호동은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묵경기
일행을 죽여없앨 생각을 하고 이곳에서 기다렸던것이다.
제2왕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신분. 정말 짜증나고 지겨운 위치다. 차라리 무지렁뱅이
전사(戰士)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무생각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싸움질만 하는것도 나쁜일은
아니다. 그러나 둘째 왕자는 그것도 아니다. 완전히 지배를 하는자리도 지배를 받는 자리도
아니다. 제기랄!! 이상태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정말 미치는 노릇이다. 내가 이대로 평생을
살 것 같으냐! 천만에 왕이 되겠다.!!왕이 되거나 아니면 죽어버리겠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겠다. 왕이 될수만 있다면 사악한 마귀에게 혼을 팔고 국적(國賊)이라는 부여인
들과도 손을 잡을수 있으며 고구려인 백만명이라도 죽여 버릴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왕이 되어 보이겠다.
인간같지 않은 자제심. 그리고 절망적인 많은 사람들의 무한한 존경. 나는 형을 질투했다.
정말 싫었다. 그와 같이 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한때는 무진장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지겨운 놈이랑 똑같이 될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내가 그놈과 같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그를 완벽한 인간이자 왕자의 전형(典型)으로 생각하고 모든 왕자
가 그와 똑같기를 바랬다. 그는 죽어야 한다. 이번 그의 결정은 정말로 잘한일이다. 어서 죽
어라. 빌어먹을 . 질투는 정말 짜증나는 감정이다. 나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게 하는 너는 재
발 빨리 죽어 없어져라!!
호적은 그 기마의 흔적을 추적하는 와중에 여러번 숲에 몸을 숨겨야 했다. 술취한 낙랑병사
들이 쉴새없이 들락거리며 더 이상 챙길개 없는지 개처럼 들쑤시고 다녔기때문이다. 그들을
보며 호적은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술에 떡이된채로 자기들끼리 전리품을 가지고 싸우는 저
산적같은 집단에게 고구려군이 패했다는게 수치스러웠다. 또한 아군을 이런 지경이 되게 만
든 아버지가 한층더 증오스러웠다.
어쩌튼 호적은 천신만고 끝에 왕의 가마로부터 이어진 흔적을 쫓다가 새로운 상황이 벌어
진것을 발견했다. 말발굽의 주인으로 보이는 낙랑병사들이 시체가 되서 한적한 숲속의 한쪽
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다. 호적은 사체들틈에 왕의 시체나 또는 왕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발견할수 없자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으나 포기하기 않고 주의깊게 주변을 살폈다. 북쪽에서
내려오던 말발굽들이 숲속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의 발자국과 엉켜있었다. 누군가 매복하고
있다가 이들을 기습한 모양이다. 죽은 낙랑인들에게 꽂혀있는 화살은 고구려인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곳 주변에 이렇다할 발자국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도보로 이동하는 자들이 이들을
기습한후 흔적을 지우면서 사라진 것으로 봐야 했다. 말을 탄자들이라면 흔적을 지우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말을 안타고 움직이는 자들은 거의 고구려인들이
고 화살의모양도 그렇고 습격자는 고구려인들이 틀림없을것이다. 왕이 여기서 죽은 낙랑인
들 틈에 끼여 있었을까? 그래서 고구려인들이 이들을 습격한후 왕을 빼돌렸을까? 이미 패
배하여 도주에 정신없는 와중에 10여명이 넘는 낙랑기병을 공격할 이유가 고구려인들에게
달리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왕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귀중한 것을 이 낙랑인들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호적은 다른수가 있는것도 아니어서 주변을 계속 배회하면서 낙랑인들을 죽
인 정체모를자들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낙랑군 진형
아주 웃기는 일이 또 일어 났다. 세상에 인간의 탈을 쓰고 어쩌면 저렇게 뻔뻔할수 있다는
말인가 !! 자명고는 화가 나기 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맥이 빠졌다. 무공 강평은수 세 성의
태수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잔적처리를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북방에서 힘겨운 공방전을
벌이는 와중에 지원을 요청할때는 콧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다 이겨놓은 다음에 군대를 이끌
고 나온 것이다. 게다가 지금 자명고의 막사에 서남세성의 영주격인 무공성의 성주가 와서
거만한 자세로 작전을 협의 하자고 한다. 작전을 협의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호들갑
을 떨고 있다. 자명고군의 참모들은 모두 화가 나서 경멸어린 시선을 담아 그를 바라본다.
자명고가 아무말도 않하고 가만 있자 그의 참모중한명이 무공성의 성주 최면(崔綿)에게 다
이겨 놓은 마당에 뭐하러 나타났느냐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비꼬면서 쏘아붙였다. 그런데 이
최면이라는 자는 창피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었다. 자기들도 출병하고 싶었는
데 인마와 식량이 부족하여 그럴수 없었다며 그것을 준비하느라 모진고생을 했는데 너같은
하급군관이 전하의 혈족인 나에게 무슨 건방진 태도냐고 말이다. 그것은 달리 생각해 보면
자명고에게 하는 말이나 같은것이었다. 내가 무슨일을 하든 미천한 너희들은 아무말도 말아
라 이런뜻이 분명했다. 참다 못한 자명고가 벌떡 일어났다. 그기세가 자못 살기어린 것이라
막사안이 조용해졌는데 그는 분노어린 표정으로 최면을 노려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고는 냉
소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적의 주력은 전멸했고 소수의 잔병이 도주중인데 성주께서
는 원하시는 데로 하십시오. 최면은 뻔뻔스런 태도로 자명고에게 예를 취하고 막사를 나갔
다. 장교들이 모두 화가나 욕설을 퍼붇고 하는 와중에도 자명고는 아무말도 없이 최면이 나
간 막사입구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기가막힐 따름이었으나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않았
다. 커다란 문제가 해결된 마당에 왕성(王性)인 최(崔)씨들과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또 얼마나 힘들것인가 . 또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단지 자고 싶을 뿐이었다.
묵경기일행은 낙랑군 포위망 서쪽의 한 작은 개천을 따라 북상하기로 했었고 호동은 그 개
천주변의 높은 나무위에 올라가 기다리다 참다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 갔다. 낙랑군에게 부
잡혀 모조리 죽어버렸기를 기대하였으나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은 확인가능한 일이 아니므
로 호동이 직접 처리하는것보다 더 골치아플것이다. 다른길로 빠져나간것인가? 차라리 고구
려남쪽국경의 성에 가서 기다려볼까? 그곳에서 기다리다 묵경기를 만나면 설득해 볼수 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역(戰役)에서 공을 세운자신이 왕위를 이을 적당한 사람인
지 백면서생인 고비원의 장남이 더 적합한지 그에게 간절히 부탁한다면 서신을 폐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호동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어버렸다. 묵경기는 이런일을 맡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바보같을 정도로 우직한 늙은 대신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기보다 서
신을 제가(諸家)회의에 넘기고 그 처분을 바랄 것이다. 무슨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
또다시 밤이 왔다. 이틀째 한숨도 자지 못하였으나 고구려의 단련된 무사들에게 2-3일 자지
않고 버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일은 아니었다. 다만 옆구리의 창상이 일으킨 출혈 때문에
피로가 심해져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호동은 졸지 않기위해 밤중에도 움직이며 뭔가
잡아먹을 만한게 없는지 주변숲속을 뒤졌다.
작은 들짐승 몇을 잡아 먹고 체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호동은 구덩이를 파고 안에 들어가
누웠다. 만주의 겨울은 남방보다 몇 개월더 빨리 온다. 여름이 끝나가는 이시기에 벌써 한밤
중에 쌀쌀한 기운이 돌자 체온을 지키기위해 구덩이속에 들어가 솔잎을 그위에 덮고 졸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뭔가 계속잡아 먹은게 효혐이 있었던지 현기증은 많이 가시
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숨어있던 구덩이 (개천주변)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어설픈 잠에 들었던 호동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번쩍 정신이 들고 그 소음에 귀를 기울
였다. 뭔가 규칙성이 있던 그러한 소리였다. 그는 기다리던 것이 왔음을 알아챘다.
호동이 들어가있던 구덩이는 개천이 바라보이는 곳에 파여져 있었는데 그는 거기서 머리를
모로 하여 한쪽 눈만 지상에 내놓고 주변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잡힌 체형의 인간 둘이 물가를 따라 올라오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
다. 얼굴을 알아볼수 있을 만큼 주변이 밝은 시간이 아니었으나 동그란 투구를 쓰고 그 투
구에 뾰족한 두 개의 뿔이 좌우에 나있는 것을 보니 고구려군인이 틀림없었다. 낙랑인들은
중앙에 큰못같이 생긴 침이 나와있는 투구을 사용한다. 아마 본무리에 앞서 위험을 살피는
첨병역할을 하는 무사일 것이다. 그들이 지나간 잠시후 이번에는 20여명쯤 되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물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무사로써 단련을 한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걸음
걸이에서 벌써 차이가 난다. 무사는 일정한 보폭을 가진 반듯한 걸음걸이를 유지하는데 반
해 문관계통의 자들은 어딘지 균형이 잡히지 않는 걸음걸이다. 그런식으로 살펴보니 무사가
10여명 문관이 10여명정도였다. 묵경기 일행이 틀림없었다. 대신과 내관 10여명과 그들을 호
위할 무사 10여명이 처음 본진을 떠나는 것을 호동은 두 눈으로 직접 보아서 확신할수 있었
다.
그들 전부가 호동이 숨어있던 구덩이 근처를 지나가자 그도 구덩이를 빠져 나와 뒤를 쫓았
다. 그런데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호동이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20여명을 혼자
서 없애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호동은 자신의 짧은 생각에 화가 났지만 뭔가 기회가 오리
라는 믿음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그들 뒤를 밟아 나갔다.
날이 완전히 밝자 이번에는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호동은 자신의 눈을 믿을수가 없
었다. 무리중에 왕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왕은 악에 받친 호적에 의해 공격
부대의 선두에 세워져 전투속으로 내몰렸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호적은 아버지를 죽게할
생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왜 저기에 있는것인가?
왕은 일반 전사의 남루한 복장을 하고 병색이 완연한표정으로 묵경기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
고 있었다.
왕의 출현과 혼자서 죽여버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 때문에 호동은 자신이 어떤 행
동을 해야 좀더 유리한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려 애를 썼다.
왕이 살아 있다는 것때문에 일단 그서신은 무효가 된다고 봐야 한다. 왕자신은 그 서신의
내용인 다음번 왕위계승에 관한 결정에 참여한적이 없고 호적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
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서신은 왕과 왕자들 전부가 죽는다는 가정이 충족되야 유효한
것이다. 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서신한장에 다음보위를 결정할수 있을것인가? 그렇다면 ..
왕이 살아 있고 왕자가 자신만 살아 남는다면 결론은 아주 명쾌한 것이다. 서신은 당연무효
가 되고 태자는 자신이 되고 다음번 왕위도 자신이 물려 받는다. 뭔가 꺼리찍한게 없는 것
은 아니었다. 호적은 틀림없이 죽을것이고 그외에 날고 기는 고구려의 무장들도 10에 9는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만 살아 돌아 왔다면 어떤 평을 받을 것인가? 부친은 자신
을 옹호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부친도 살아남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전제왕권이 확립되지 않
은 고구려에서 귀족들의 힘은 무시할수 없는것이었다. 귀족들은 혼자만 살아남은 자신을 보
며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르며 그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면 태자자리가 호동의 차지가 될
지 어떨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심할 경우 혼자 도망친걸로 간주하여 태자로서 부적격이라
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은 평소에 귀족들과 좋은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
쁜사이도 아니었으나 호적이 원체 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탓에 자신도 은연중 영향이 있
었던 것이다. 제기랄 어떻게 되는거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거지?
호동이 세상의 때가 묻었다고 해도 그는 아직 10대소년이었다. 복잡한 궁중의 권력 싸움에
관한 안목이 부족했다. 왕의 생존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 어떤식으로 처신해야 옳은지
갈피를 못잡는 와중에 호동은 왕과 묵경기 일행을 놓쳐버렸다. 애시당초 왕은 보는 순간 묵
경기 일행은 처리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터벅터벅 터지려는 머리통을 싸
매고 고민하며 고구려의 남방국경의 성(아란성)으로 걸어갔다. 호동이 그래도 한가지 위안을
삼을수 있었던 것은 호적이 죽었을것이라는 것이다.
호동은 아란성 근처에서 배회하다 자신의 입장을 단순하게 정리하였다. 어떻든 호적은 죽었
을 것이다. 이제 왕자는 자신 한명이다. 그리고 고전중에 간신히 부끄럽지 않게 싸우다 도망
쳐왔다. 물론 최후의 싸움에는 참여하지도 않았으나 자신이 빠져나오는 것을 본 사람도 없
을것이니 그렇게 말하기로 작심하고 성으로 들어갔다.
그가 아란성에 들어가자 성주와 신하들이 몰려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무사를 기뻐하였
다. 또한 묵경기 일행도 그의 무사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다. 부친은 병을 이유로 그를
만나주지 않았으나 신하들의 태도를 보니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아란성에는 그날이후로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 패잔병이 흘러 들어왔다. 호동은 왠지 꺼림
찍하여 이 성을 벗어나 수도로 가기를 원하였으나 국내성에 돌아갈 면목이 없는 왕 때문에
패잔병들을 재편성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꿈에서도 있을수 없는 그런일이 일어났다. 호적이 살아 돌아 온 것이다. 그날 아침
남문위에서 패잔병들이 거지떼처럼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성벽위 병사들
이 갑자기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무슨일이냐고 호동이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병사가
지금 성문으로 들어오는 저사람이 태자저하를 닮지 않은것 같냐고 한다. 호동은 벼락을 맞
은 것 같은 심정이 되어서 성문으로 직접내려가 병사들을 웅성거리게 하는 그자를 보고 확
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호동은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 돌
덩이 같은 무표정의 호적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그를 만지며
천진신명께서 고구려를 보우하신 것 같다며 호적의 무사를 기뻐한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
호동은 죄책감과 절망감 이 되섞인 심정으로 호적에게 다가가 형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이라
는둥 정신없이 지껄인다. 그러나 호적은 주위의 소란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태도로 호동과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태수에게 전하가 여기 계신다는데 사실이냐고 이말만 묻는
다.
"전하는 지금 편찮으셔서 임시침전(寢殿)에 계십니다만 위중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 흠........ 너도 살았구나 "
호동은 섬찟하다. 호동은 호적이 자신의 무단이탈과 독전대 병사들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호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안으
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호동은 몸이 좋지 않다며 저녁도 거르고 자기방에 들어가 처박혀 끙끙대고 있었
다. 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원정중에 태자에게 매사 고분고분하
지 않아서 사이가 많이 틀어져 있었다. 저 무서운 태자놈이 무슨짓을 할지도 모르고 또 태
자위도 물건너간 것 같아서 속이 뒤집힐 것 만 같았다.
호적은 그날 저녁 고구려의 국조(國祖) 주몽이 직접만들어 후세 왕에게 전했다는 환도를 닦
으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는 왕의 흔적을 쫓는 와중에 묵경기일행중 낙오한 한무사를 만나
왕의 행방에 대해 들을수가 있었다. 애초에 왕의 호위병들에게 왕을 끝장내라는 명령을 호
적이 내리자 그들중 한명이 묵경기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도저히 전하를 자신들 손
으로 해할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자 묵경기는 전투가 벌어지면 호적의 시선을 피해 왕
의 가마를 뒤쪽으로 빼내라고 하고 자신들이 왕을 모시고 탈출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많은 장수들이 전진도중에 가마가 뒤로 빠지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호적의 처사가 심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왕이 묵경기와 합류하기전에 낙랑군의 공격
을 받아 포로가 되는 위험천만한 일도 있었으나 살아남은 호위병이 묵경기일행에게 그사
실을 알렸고 묵경기는 침착하게 왕을 붙잡아간 낙랑기병을 추적하여 왕을 다시 빼앗고 탈출
했다고 한다.
호적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살아남은 왕도, 왕은 빼돌린 묵경기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호위병들도 모두가 증오스러웠다. , 하지만 여기서 다시 만났으니 못한 일을 다시 해치우겠
다고 결심했다. 자신은 이미 살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과 어려서부터 천
하를 함께 돌아다니며 고락를 같이한 형제같은 무사(武士)들을 모조리 잃고 자신만 뻔뻔하
게 살아남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리고 물론 아버지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버
지같은 왕이 살아남아 봐야 고구려는 결국 망하고 말것이라는 게 호적의 판단이었다.
호적은 목욕을 하고 깨끗한 관복으로 갈아입은다음 허리에는 직접 갈아 날이 새파랗게 선
환도를 차고 왕의 거처로 향했다. 호적의 귀환때부터 긴장하고 있던 늙은 대신 묵경기는 심
상치 않은 그의 기세를 눈치채고 왕의 거처주변의 호위 무사들에게 호적을 안으로 들여보내
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입구에 서서 호적을 맞았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태수와
호동에게 왕의 거처로 급히 오라는 전갈도 보냈다.
"비켜라!!. 묵경기.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 "
"태자 저하.. 지금 전하께서는 환우가 심하셔셔 사람을 만날 형세가 못되시옵니다. 다음기회
에 아니.....아니... 국내성에서 뵙지요"
호적은 묵경기가 자신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완전무장한 무사들이
입구주위에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을 보니 사전에 대비를 한것같다.
"이놈 비키지 못할가? 자식이 편찮으신 부모을 만나겠다는데 네놈이 무어라고 방해한단 말
이냐?"
호적은 증오심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런 늙고 보수적이며 사사로운 정에 얽매
여 국사를 처리하는 버러지들 때문에 고구려가 이꼴이 된것이라고 속으로 한탄한다.
"묵경기......"
"......"
호적은 이 비루한 늙은이가 결코 길을 열어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칼을 뽑을 결심을 하였
다.
늙은 대신 묵경기는 호적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을 그냥 놔둔단 말인가? 현왕이 고구려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지 모르는 일이나 그
는 신성불가침의 왕이고 지금 그를 죽이려는 자는 왕의 아들이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
은 국가의 발전이나 멸망이나 그러한 차원의 문제를 초월하는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
다. 묵경기는 호적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公)에 너무 얽매혀 사(私)를 전혀 모르는 이 지나치게 성실한 왕자에게 애처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公)도 결국은 사(私)를 위한 것. 사(私)는 없이 오로지 공(公)만있다면 그것은 결
국 완전히 사사로운 것이나 마찬가지 인것이다.
고구려군내에서 알아주는 무사인 호적은 발검과 동시에 묵경기의 늙은 목을 순식간에 잘라
내버렸다. 그바람에 피분수가 쏟아져 왕의 침전 문을 온통 피빛으로 뒤덮는다. 주변 무사들
은 칼을뽑기는 했으나 어찌할줄을 모른다. 호적은 살기로 충혈된 눈을 번득꺼리며 버럭 소
리를 지른다.
"이놈들!! 네놈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무사라면 길을 비켜라!! 저런왕이 계속 왕위를
가지고 있으면 이나라는 끝장이야!!. 내가 위를 찬탈하려함이 아니다. 왕을 죽이고 나도 죽
겠다. 그러니 길을 비켜다오 .."
호적이 아니라 다른 왕자였다면 다른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나 호적은 그만큼 내외의 존경
이 두터운 사람이다. 호위무사들은 그런 그가 하는일이니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
른다는 자기합리화를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칼을 땅에 떨어뜨렸고 호적은
문을 부수고 침전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상위를 보니 이부자리가 있긴한데 왕은 없었다. 호적은 침상위로 직접올라가 이불을 뒤적
였으나 아무것도 없다.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방금전까지 여기 있다고 밖의 소란에
위험을 느끼고 피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방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자신이 들어온 그문 하
나밖에 없었다.
호적은 주변을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침상밑을 보았다. 거기에 아버지가 있었다.
왕이, 그것도 위대한 만주의 대국 고구려의 왕이.. 아무리 위험하다지만 침상밑에 비굴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숨어있다. 호적은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이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그는 한손을 침상밑으로 집어넣어 늙고 추한 늙은이를 끄집어
냈다.
"애야 ...아...호적아. 살려다오... 살려다오. .이..이 .애비가 ..잘못했다.아..."
공포에 질려 비굴한눈으로 자식의 다리를 붙잡고 왕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2차원정전 흑
발이던 머리칼은 그동안의 심로(心勞)로 하얗게 새어버렸고 주름은 끝이 없이 늘어나있었다.
호적은 눈물을 흘린다.
"소자, 불효는 저승에 가서 사죄하게나이다. ."
그는 환도를 양손으로 힘껏 부여잡고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왕은 공포에 하얗게 질린 눈으
로 아들의 굳건한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부르르 떤다.
"야이 미친새끼야!!! "
그때 문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묵경기의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온 호동 이었다.
호동은 경악에 눈을 부릅뜨고 아들의 다리를 붙잡고 꿇어앉아 있는 왕과 그 아버지의 머리
를 쪼개기 위해 칼을 높이 들고 있던 아들을 보았다. 호동은 급한 나머지 문옆의 의자를들
어 호적에게 던지고 칼을 뽑아들고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호적도 아버지를 발로 차버리고
의자를 피하면서 호동의 검을 막았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어설픈 자세로 달려들던 호동은
호적의 능숙한 방어동작에 검을 놓치고 주먹에 배를 강타당해 그 자리에 나뒹글었다.
"우욱,,"
돌덩이같은 주먹에 배를 강타당한 호동이 호흡곤란을 느끼며 자리에 쓰러지자 호적은 그의
얼굴을 다시 발로 강하게 내질렀고 호동은 코가 깨지고 이빨이 우수수 부서지며 피범벅이
되었다. 쓰러진 호동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호적은 그의 목을 발로 밟으며 검을 높이 들
어 얼굴을 찌르려 하다가 주저하였다. 동생까지 죽일 필요가 있는지 갈등을 일으킨 것이
다. 그런데 그가 잠시 주저하는 사이 누군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다리를 잡아 걸어 넘어 뜨
렸다. 왕이었다. 호적이 갑작스런 왕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자 호동은 정신이 반쯤 나간 사이
에도 번개같이 일어나 그의 상체에 올라타고 양손으로 목을 졸랐다. 그러나 온몸이 강철같
은 근육으로 단련된 호적을 18세의 호동이 깔아뭉개는일이 쉽지가 않아 호적의 몸부림에
금새 옆으로 쓸어질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날수가 없었다.
살의에 제정신이 아닌 큰아들이 다시 일어날까봐 공포에 질린 왕은 가까운 탁자위에 있던
벼루를 들고 호적의 얼굴을 있는 힘껏 내리 쳤다. 한번, 두 번. 세번. 미친듯이. 양손으로 벼
루를 잡고 병든 노인답지 않은 힘으로 큰아들의 얼굴을 계속 내리쳤다. 안면부 뼈가 함몰되
면서 눈알이 튀어나오고 허연 뇌수와 피가 뿜어져나와 왕과 목을 조르던 호동의 상체와 얼
굴까지 뒤덮는다. 그러나 왕은 이사람같지 않은 아들이 되살아 날까봐 호적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고도 한참을 계속해서 내리쳤으며 호동 또한 형의 얼굴이 완전히 박살이 난후에도
덜덜덜 떨며 목을 조르던 손을 놓지 않았다.
-4부 왕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