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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왕(王)(2)
첫 번째 일째 사격이 목표에 도달하기 까지 시간이 멈추어 선 것 같았다.
수많은 검은 까마귀가 해를 가리며 하늘을 날 듯이 화살더미는 크게 포물
선을 그리며 돌진하는 고구려 기병대의 선두부분에 정확히 수직으로 착탄
(着彈) 됬다.
고구려군 선두집단은 파도 처럼 우스스 쓰러져갔다. 말위의 전사들보다 기
마에 더 많이 명중했고 말이 쓰러지면서 기병은 앞으로 튕기듯이 날아가
땅에 부딪치면서 대개는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그 뒤를 따라 질주하던
기병들도 화살에 맞아 몸부림치던 말에 충돌하면서 같은 꼴을 당했다.
당한 고구려군보다 쏜 낙랑 병사들이 더 놀라서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 위력은 자명고에게 말로만 들었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명고는 대궁의 위력에
흥분한 병사들을 돌아보며 침착하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었다. 고구려군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한 병사들은 서로서로
정신차리라고 말하며 시위를 다시 당겼고 흑기가 올라가자 두 번째 사격이
시작됬다.
기병이 낙랑군의 창병대열에 접근하기 까지 8차례에 걸쳐 사격이 가했졌고
살아 남아 낙랑군 진형에 다가온 고구려기병은 500-600백 기에 불과했다.
병사들은 감격해서 어쩔줄 몰라했다. 자신들이 한 일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무서운 고구려 철기대를 자신들이 무찌른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전쟁 신(神)의 부대 같다던 고구려기병을 말이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살아남은 고구려군 기병500기는 경무장한
궁수와 창병(槍兵) 2000에게는 아직도 위협적인 숫자였다. 대열에
돌입하면 각개전투 능력이 압도적인 기병이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구려군 생존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미친 듯이 낙랑군을 향해 달려왔다.
화살로 공격하기에 너무 가까웠다.
자명고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창병선두대열에 들어가 스스로 창을 잡았다.
" 아직 끝난게 아냐. 정신차려라!! 창병전원 충돌 대빗!!!!
그제서야 위기를 느낀 창병은 창을 눈높이 까지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창을 수직으로 세워 가슴에 기대고 양손으로
선두병사의 등을 지탱했다. 기마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서 수도 없이
훈련했던 일이었다.
대궁에 공격받아 난장판이 된 대열을 헤치고 접근한 고구려기병은 분산된채
로 돌격하다 하나둘씩 창병에게 찔려 죽어갔다. 차례차례 죽어가는 전우들을
보면서도 고구려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열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돌진했다.
견고한 창병의 방진(方陣)에 분산된채 돌진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란 것을 알면서도 누구하나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기병이 창병에 살해 되고 나자 낙랑군의 정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주인잃은 말들과 부상당한 고구려군 그리고 화살이
몸에 꽃혀 애처롭게 몸부림치는 말뿐이었다.
병사들은 일제 히 함성을 질렀다. 이것이 꿈인가? 감격해서 서로를
껴안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산성에 있던 낙랑왕과 신하들도
본진에서 자기부대의 돌진을 바라보던 고구려군인들도 모두 할말을
잃었다. 눈 깜작할 사이에 기병 3000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전투 과정중에 평온했던 자명고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올랐다. 지나온 일들이 생각나려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고 그의 이성(理性)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자명고는 말에 올라서 대열을 고구려군 본진을 향해 구보로 움직였다.
정면에 말과 시체들이 널려있는 곳을 우회해서 본진에 접근해가자 살아남은
고구려군은 진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자명고는 대열을 본진에 가까운
곳에 정지 시켰다.
그는 전리품을 얻고자 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부장(部將)에게
병력100을 데리고 고구려군 본진을 파괴하라고 이르고 나머지는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본진에 있을지도 모를 군량과 물품들, 그리고
자신들이 도륙한 고구려 철기대의 시체더미속에 뒹글고 있는 값비싼
갑주와 좋은 말들에 군침을 흘리며 저것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자명고
에게 물었다. 어떤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적군 부상자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말한다. 자명고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하고 너희들에게
나중에 저것들 보다 몇배나 값진 보상이 내릴것이라고 그리고 부상자들은
그대로 놔두라고 말했다.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불만에 섞인 것을
느낀 자명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들은 군법이 있음을 모르느냐? 죽고 싶은 자는 나서라 .. 저따위
물건이 목숨보다 더 귀한자는 나서라 .....어섯~~"
그제서야 병사들은 조용해 졌다. 그는 장교들에게 병사들중에 누구라도
진을 이탈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베라고 말하고 자신은 말을 몰고
산성으로 달려갔다.
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여기저기서 고구려군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여유만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시간이 없었다.
불쌍하지만 한편으론 자기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쳤느냐. 고구려 철기대여!
자명고가 산성 성문에 도착하자 성벽위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자명고는 말에서 내려 바로 왕을
찾아갔다. 병사들은 존경과 놀람이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왕의 거처로 찾아가는 도중에 마주친 고위신하들의 표정에는 질투심이
잔뜩 배어있었다.
왕은 체면 불구하고 자명고에게 다가와 그를 껴안았다. 놀랐고 또한
감격한 모양이었다. 옆의 신하들이 전하 체통을 지키시라고 말한다.
사람 좋고 우유부단한 왕은 그 제서야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왕은 자명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고 네가 원하는 만큼의 지위와
땅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기껏 기병 3000을 없앤 것
가지고 이렇게 흥분하는 경솔한 왕을 보고 자명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명고는 왕에게 그런 것은 나중에 받아도 됩니다 라고 말하고 근위대의
지휘권을 저에게 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근위대의 지휘권?"
"네 전하. 전하께서는 이대로 압수 쪽으로 피신 하 시여 압수이남의 아군의
보호를 받으십시오. 저는 근위대를 이끌고 고구려군 본진을 공격하겠나이다."
그러자 한 신하가 코웃음 치며 비웃는다.
"일개 산성의 대장이 근위대를 지휘하겠다고 ? 네놈은 작은 승리로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근위대 대장은 상장군(上將軍) 그것도 가장 직급이 높은
상장군만이 할수 있는 일임을 모르느냐? 전하 이따위 어리석은 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마시고 어서 압수쪽으로 근위대와 이곳 수비병을 대동하시고
피하십시오.."
지금 이 판국에 직급을 따져서 뭐하겠다는 말인가? 이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이대로 피하기만 한다면 남은 성들과 백성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가만있어봐라. 이자의 말을 더 들어 보자. "
"하오나 전하.."
"그만 두라고 하지 않느냐. 너희들 말만 듣다가 과인이 여기 까지 쫓겨왔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 "
그 신하는 할말이 없는 듯 고개를 숙이고 왕은 노기어린 표정을 바꾸며
자명고에게 더 말해보라고 손짓한다.
"적의 본진을 공격하겠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하루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보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적은 이동 중에 있다고 하니 어쩌면 기회가 있을 듯도 합니다.
저희부대는 창병과 궁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공격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방어는 가능합니다만. 근위대가 필요합니다."
"고구려군은 왕이 직접지휘하고 숫자도 4만은 될 것이다 .근위대와 너의 부대
합쳐도 5천정도인데 그게 가능한일이라고 보느냐? 너는 제정신이냐?"
화려한 갑주로 치장한 늙은 장군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마 근위대의
지휘관인 듯해 보였다.
"적의 총수(總數)5만입니다만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별동대를
파견 했을 것입니다. 실제 보고도 들어와 있습니다. 시간상 그들이 전부 합류
하지는 못했을것입니다. 그리고 전부대가 다 이쪽으로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렵게 점령한 수도 부근을 그대로 놔둘 리 는 없을것이고 , 장차 수도를 점령
하기 위해서라도 얼마정도는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3만에서 3만 오천 사이 정도가 최대 일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위치만 잘 잡아 기
습하면 5천으로도 충분히 격파가 가능합니다. "
늙은 장군은 자명고의 논리적인 답변에 할말을 잃은 듯 고개를 돌려버
린다.
"그리고 전하의 호위는 어떻게 하느냐.. 네놈에게 병력을 전부빼주면 전하는
맨손으로 가라는 말이냐?"
"500기 정도 빼내서.."
"이놈.....왕행(王行)에 기껏 500기라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놈이구나.."
여기저기서 500기란 말엔 흥분했는지 모두 한마디씩 욕설을 하고 비난을
퍼붓었다. 고구려군의 위협은 자신이 별동대를 없앴으므로 없는 거나 마찬
가지였다. 그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다른 적군 별동대는 남쪽해안이나 주로
서쪽으로 가있었으므로 압수까지는 무풍지대였다. 자명고는
그들이 그가 더 이상 전공(戰功)을 세울까 염려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빌어먹은 놈들...이렇게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자명고는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전하.. 왕 행에 500기는 너무 적은 숫자임을 저도 잘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우리나라는 수도와 인근
성이 적에게 점령되어 두 개로 분단 됩니다. 다시는 재기 할수
없을것입니다. 전하.. 결단을"
왕은 한마디 말도 더하지 않고 근위대 지휘권을 자명고에게 주었다.
그리고 임시로 상장군 직함을 그에게 내린다고 말하고 결재 하기
위해 옥쇄를 가져오라고 시동에게 분부한다.
여기저기서 왕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왕은
한마디라도 더하면 처단하겠다고 흥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우유부단 하고 선하기만해서 신하들의 의견에 반대를 한적이없는
왕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왕은 흥분하고 있었다. 전투장면을 눈앞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3000의 고구려. 낙랑에게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나라의
기병이 순식간에 몰살되는 모습은 그를 극도로 흥분시키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낸 자명고가 더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옥쇄로 급히 만든 문서에 결재를 하고 자명고는 상장군에 임명됬다. 무려20단계가
넘는 승진이었다. 거기다가 왕은 근위대의 고위장교들이 자신의 호위로 따라가도록
하여 자명고가 근위대를 편히 지휘하도록 했다.
왕. 자명고가 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수도에서 제례(祭禮)가
있을 때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감정의 변화까지 느낄정도로 가까이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 생각한 것과는 달랐지만 역시 좋은 감정을 가질수는
없었다. 얼굴을 붉히며 감정을 들어내는 모습이 불안해보였다. 왕은
저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근위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와 자기부대가 있는곳으로 갔다. 그리고
전원이 말탄 기병인 근위대 각1기에 자기부대원 두사람 씩 태우고 그 자리를
지체없이 떠났다.
부대이동속도를 최대로 하여 급속히 진군했다. 가는 도중에 어디로 가는지를
부하장교들이 물었지만 그는 따라오라는 말만을 하였다.
확실히 근위대는 틀렸다. 기마 술도 뛰어나고 군기도 엄정해서 처음 부대를
지휘하는 자명고의 지시를 정확히 이행했다. 근위대의 대장이나 고위
장교들은 근위대의 정치적 비중 때문에 중앙의 썩은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무능하고 부패했지만 하급장교들과 말단 병사들은 전군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
이었다.
자명고의 부대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까지 쉬지 않고 행군하여 상도에서
직 동에 위치한 한 산의 동쪽 끄트머리 숲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3사람을
태워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말이 지쳐 쓰러져 낙오하는 병사들도 생겼지만
너희들은 잠시 피해있으라고 지시하고 부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나아갔다..
자명고는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장교들을 불러서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이산 북쪽에 호수가 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수도에서 우리가 출발한 산성까지
가는 길은 이 호수의 북쪽에 인접한 길과 지금 우리가 있는곳에서 보이는 저산
봉정(峰頂)산과 호수의 남쪽 가장자리가 만나는 지점을 통하는 두길이 있다.
적이 전하를 포착한 것(근위대가 고구려군 별동대와 싸워산성으로 피신한때)
어제 저녁이고 그 소식은 빠른 단기(單騎)의 기병이 전했다면 오늘 정오쯤에
도착했을 것이고 적 본대가 바로 출발했다면 산성까지 하루가 걸리므로
중간에 위치한 이곳을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에 지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기습한다. ... 아군은 숫자가 적지만 밤중이고 기습하는 입장이므로
승산은 충분하다.."
자명고는 고구려 군이 보급선이 단절될 위험을 무시하고 북방의 낙랑군 성들을
그대로 놔두고 남하한 점. 적국 내에 들어와 별동대를 파견하는 등 병력을 분산
시키는 위험을 감수 한 점 이 두 가지 점을 들어 적의 일차목표가 전하일 것
이라고 말하며 반듯이 적은 이쪽으로 올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별동대를
아군이 격파했다지만 산성까지는 확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두길이 있는데 어떻게 남쪽으로 지난다고 확신하십니까? 거리는 거의 비슷
하지 않습니까?"
근위대의 한 젊은 장교가 그에게 물었다.
" 남쪽으로 올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왜냐면 북쪽 길에서 가까운 곳에 아군 성이
몇 개있지 않은가. 저번에 적이 그냥 지나친 그곳 말이다(개전초에). 하지만
남쪽은 해안까지 거의 성이 없다. 기습받을 확률이 남쪽이 훨씬 적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자명고 자신은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개전 초부터 북쪽 성들은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성에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고구려 군은 높은
봉정산 과 호수가 인접하여 숲이 많고 길이 좁은 남쪽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북쪽으로 돌아가려면
호수를 돌아야하므로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다할
지형지물이 없어 적에게 발각될 확률도 높았다.
자명고는 근위대에게 갑주를 모두 벗게 하여 가벼운 무장을 하도록 했다.
이제 겨우 봉정산 동쪽 끝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고구려군
정찰대의 눈을 피해 산줄기를 따라 숲 속을 이동하여 봉정산 줄기와 호수의
남쪽이 만나 숲이 울창하고 길이 가장 좁아지는 곳에 매복할 작정이었다.
그곳에 오늘 자정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울창한 숲 속을 지나려면 무거운
갑주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길을 따라 가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사방에 고구려군 정찰대가 눈을 번뜩이고 있는 상황에서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자명고는 근위대가 갑주를 모두 벗고 말들에 재갈을 물려 한쪽 숲에
모아 묶어 놓자 위장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부대는 즉시 명령에
따라 얼굴에 진흙을 칠하고 주변 숲의 풀과 나뭇 잎등으로 온몸을 위장했지만
근위대는 쳐다만 볼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근위대 장교 몇 명이 그에게
와서 명예로운 근위대가 어떻게 몸에 잡풀과 진흙을 바를 수 있냐고
항의했다.
일반적으로 위장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투는 많이 속(俗)화 됬지만
신화시대부터의 명예를 중시하는 방식이 아직도 살아있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양군이 당당하게 야전에서 격돌하는 것이 군인들의 꿈이기도 했고
매복을 해도 숲에 몸을 숨기는 정도였지 갑주를 벗거나 몸에
무언가를 바르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최고의
정예들이 모인 근위대야 그런 의식이 강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자명고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근위대가 모 인 곳에 성큼 걸어가서
손수 얼굴에 진흙을 바르고 잡풀로 투구와 온몸을 감쌌다. 근위 대원들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자명고는 특히 무기에 진흙은 많이 칠하도록 했다. 달빛을 받아 반사되면
멀리서도 보이기 때문이었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보름달이 떠서 그런대로
식별은 가능했지만 숲속 인지라 시야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위장을 마친
자명고군은 숲을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높이 솟은 거목들과 바위 들 때문에 부상자가 속출하고 부대는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자명고는 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독려
하며 나무를 잘라내고 바위를 치우고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타나면
격류속에 몸을 담그며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었다. 어둠속이라 일은 더욱
힘겨웠다. 몇 명이 물에 휩슬려 내려갔지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40대의 자명고는 평소에도 몸이 약한 편이어서 힘겨워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도 몸 이곳 저곳에
상처가 나고 지쳐서 숨을 헐떡거렸지만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제 몸 하나 지탱하기 힘든 판에 서로 부축하며 끌고 나아갔다. 고구려
철기(鐵騎)대를 사상자 하나 없이 깡그리 섬멸했다는 자존심을 가진
그들에게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정이 거의 가까워 졌을 무렵 매복장소로 예정된 곳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소수의 병력손실만 입으며 도착했다. 자명고는 눈물이 나오도록
병사들이 고마웠다.
이제는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고구려군도 분명히 이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많은 정찰대가 들락날락할 것이다. 자명고는 날래고
눈매 좋은 병사들로 정찰대를 구성해서 자신이 직접 이끌고 매복장소부근을
샅샅히 뒤졌다. 국법에 따라 수레 두 대가 지날 갈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진
길이 호수의 물결이 부딪치는 가장자리와 거의 인접하게 나있었고 그 반대편
도로변에는 울창한 숲이 역시 길을 뒤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이루어져있었다.
자명고와 병사들은 땅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그곳을 세밀하게 정찰했다.
혹시 소수의 정찰대가 매복(埋伏)하며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것을 발견 못한 자명고는 병력을 이동시켜
배치했다. 도로에 가장 가까운 곳의 숲에 근위대와 창병대를 그리고 그뒤에
나무가 거의 없어 공중이 뚫린 갈대밭에 궁병을 배치했다. 배치가 완료되자
그는 정찰대를 사방에 파견해놓고 나머지 병사들에게는 누워서 휴식을 취하도
록 했다. 장교들은 돌아다니면서 졸고 있는 병사들을 발로 차 깨웠다.
보병에게 대궁이 위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전부터 자명고는 알고 있었다.
우선 대궁은 발사속도가 늦었다 .보통 궁이 두 세발 쏠 동안 한발밖에 쏠수 없었다.
시위 당기는게 힘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보병은 중갑보병보다 경보병이
많았기 때문에 대궁은 오히려 낭비였다. 그리고 자명고도 이해가 안가는
점이 있었다. 중갑기병과 똑같은 갑주의 보병에 활을쏴도 효과가
(중갑기병보다)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병이 자체가 고속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그 힘이 활의 파괴력을 가중시키고 보병은 그것이 없기 때문에
효과가 반감되는 것인데 자명고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활의 파괴력이 포물선을 높게
그리며 올라갈수록 더 크고 목표가 이동할수록 그것도 빠른 속도로
이동할수록 더 강하게 효과를 본다는 사실은 실험을 통해 알수 있었다.
어쩌튼 강력한 기병이 아무리 많은 고구려 군이라도 본진에는 보병이
많을 것이고(비용상) 따라서 자명고는 대궁은 첫발만 사격하고 궁병 들도
직접기습에 동참시킬 생각이었다.
이것(대궁의 약점)은 대궁의 원산지 동예의 쇠락원인과도 관계가 있었다.
동예는 대궁의 강력한 위력만 믿고 다른 기본적인 전투부대의 육성에 소홀히
하였다고 한다. 그런 탓에 고구려 군이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보병위주로
싸우자 반도 중앙의 요충지를 거의 상실하고 해안가로 쫓겨들어갔다..
동예 몰락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
었지만 이러한 군사적 문제도 원인의 하나였다.
-4부 왕(王)(2)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