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장군자명고(1)-
호동이 오수로 돌아온때로부터 30년전.평양부근
언듯보기에도 패잔병인듯한 사람들이 지친모습으로 나트막한 언덕아래 패가로 모여들었다.
관모나 투구를 안쓴자도 있었고 옷은헤어지고 피가 묻어있다. 어떤자는 팔이 잘렸는지 손목
아래 부근은 보이지 않고 피범벅이 된 헝겊으로 지혈만 하고 있었다.
"군기(軍旗)는 .. 군기는 어떻게 됬나?"
백발의 늙은 군관이 영낙없이 거지꼴을 한채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자에게 물었다. 그는 귀
찮다는 듯이 눈을 떳지만 상대를 보고 안면이 있던 상관인지 라 상체를 세운다.
"아 주.중중군장님.. 살아계셨군요.."
"군기. 군기 어떻게 됬어?"
늙은 군관은 울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게. 어제 싸움이 너무 격렬해서.. "
늙은 군관은 눈이 크게 커지고 화가 났는지 누워있던 젊은 군관을 발로차고 욕설을 퍼붇는
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 네놈이 군기 담당이었는데 군기가 어딨는지 몰라? 군기를 잃어버리
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돌아와. 너같은 놈은 우리 낙랑군 의 수치다. 내가 이자리에서 죽
여주마. 이개자식아"
늙은이는 무자비하게 젊은 군관을 구타했고 젊은 이는 금새 머리가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서
살려달라고 외친다. 늙은 이는 갑자기 때리는것을 멈추고 자리에 덜썩 주저앉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흐흐흑...아....내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이렇게 수치스러운 싸움은 처음이다. 군기란
군기는 모두 잃어버리고 .. 야이놈들아 . 무사답게 모두 자결해라 ..전하를 어떻게 뵐참이냐.
흐흑.."
사내는 말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차고 있던 칼을 꺼내서 목을 겨냥한다. 옆에있던 젊은 무사
는 말릴 생각도 않한채 멍하니 그모습을 바라보고 늙은 이는 그대로 칼로 목을 찔렀다. 비
명소리 하나 없이 칼은 늙은이의 가는 목을 꽤뚫고 상체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칼자루
가 눌리는 바람에 칼은 손잡이 까지 목에 박히고 피가 폭포처럼 나와 바닥을 적셨다.
늙은 이가 숨이 끊어지자 주위에 있던자들사이에서 울음소리가 나오고 하나둘 칼을 꺼내 목
을 겨눈다. 주로 군관들로 보이는 자들이었고 일반병사들은 그모습을 겁에 질린채 바라보기
만 한다. 병사들은 죽고 싶지 않았다.
이때 비쩍바르고 눈밑이 피로에 절은듯 기미가 잔득낀 장신의 사내가 패가의 문을 열고 들
어 오다 이모습을 보았다. 그는 금 방상황을 알아챘고 막자살하려던 군관의 팔을 발로 차서
검을 떨어뜨렸다.
"이게 무슨짓이야!! "
"죽을려면 어제 죽던지!. 간신히 살아나와서 여기서 죽을 참이냐?"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장신의 사내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살을 하려던 사람들을 말리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자 눈물을 흘리며 한군관이 그에게 말한다.
"이봐 군량관!. 이대로 살아돌아가도 우리는 살지 못해. 모르는가? 그중요한 성을 하룻만에
잃었으니 무지렁이 병사들이야 어쩔지 몰라도 우리군관들은 목이 달아날것야. 하긴 자네야
..어제 처음으로 그곳에 왔으니 목숨까지 잃지는 않겠구만"
장신의 사내 는 군량담당장교였는지 군량관으로 불리운다.
"우리는 기껏해야 천명이었어. 병사들도 막징집한 애숭이들이고 무슨수로 5천명도 넘는 백
제 군을 막나!!. 그리고 성자체가 위치도 않좋고 ..그리고 포한방에 성벽이 무너지지 않았나..
어떤놈이 성을 쌓았는지는 몰라도 그놈 책임이고 우리성남쪽에서 백제군이 들어오는것을 멍
청하게 그냥 보고만 있던 평원성놈들한테 책임이 더 크게 있다.전부우리가 책임질일은아니
야!. "
군량관은 사람들을 진정을 시키고 검을 모조리 빼앗아서 자기 어깨에 매달았다.
-머저리 같은 자식들 ..죽는것은 쉽다. 죽고 나면책임도 면하고 수치도 않당하니 편 할테지
그렇지만 뒷수습을 할 생각은 않하고 혼자 죽을 생각만 해?도대체 이 무사란 놈들은 이해
할수가 없군-
자신을 무사라고 생각하지 않는군량관 . 자명고 였다. 24세 자명고는 계속 떠들었다.
"밖에 우리병사들이 흗어져서 해매고 있다. 그놈들을 이대로 놔두면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
거나 굶어죽을 꺼야.. 우리군관들이 나서서 병사들을 모아서 어떻해든 후방 기지 까지 가자..
죽고싶은놈은 거기서 해두 늦지 않고 또.. 더 중요한건. 성을 그따위로 지은놈들과 평원성의
윗대가리놈들에게 책임을 물어야돼. .그런놈들이 계속 있으면 앞으로 이런일이 계속 더 일어
날거고 어쩌튼 그렇게 하자!"
원래 낙랑국의 무사계급. 쇠락해가는 낙랑국의 무사들이 그렇게 원래 의미의 무사라고 볼정
도의 기개를 가진자들은 아니었다. 자살은 패전하는 전투의 경우에 흔히 있는일이 었는데
고구려나 부여 의 전통적인 무사들이 하는 자살과는 종류가 다른 나약하고 감상적 이며 책
임회피적인 성격이 짙었다. 자명고는 그런사실을 잘알고 있었다. 전투에서 겁에 질려 도망간
장교들이 후방에서 서로를 찌르며 자살하고 국내에서는 이런것들을 아름다운 일 이라고 치
켜세우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자명고는 그런것을 혐오했다.자명고의 조리있는 말에 희망을
느꼈는지 더이상 자살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패가에 모여 있던 자들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
왔다. 그러나 자명고는 알고 있었다. 어리석게 자살하려고 했던 자들은 너무나 쉽게 그들의
의지를 꺾었지만 후방의 그들과 똑같은 상관들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란 것을...
건설된지 얼마 안된 매천성은 낙랑과 백제의 접경지대인 평양부근의 최전선보급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한수 유역을 확보한 백제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평양부근에서 낙랑군과 대치중
이었는데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매천성을 기습했다. 문제는 전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매천성
까지 백제군이 이동하는데는 매천성 남쪽의 평원성옆 계곡을 반드시 지나야 했으므로 당연
히 평원성의 낙랑군이 이를 요격하는게 상식이었지만 백제군에 겁을 먹은 평원성 지휘관이
성밖으로 출격하는것을 금지 시켰던것이다.
적이 접근하는것을 보고 매천성의 낙랑군은 성문을 걸어잠그고 농성태세를 유지했다. 매천
성 지휘관은 백제군이 후방깊숙히 들오와서 시간을 끌여유가 없었으므로 도착한 그날밤 야
습할 지도모른다고 하여 모든 낙랑군이 전투태세로 밤을 지세우던중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
어난것이다.
백제군 야습신호겸해서 발사한 포차의 거대한 돌덩이 한개가 동쪽성벽에 맞았는데 어이없
게도 성벽이 무너져 버린것이다. 고대에 포차는 분명히 성벽파괴용이였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성이 등장하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숫자가
일제히 공격해야 했으므로 거의 사용돼지 않던 시대였였는데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일이었
던것이다. 낙랑군은 단번에 혼란에 빠졌고 백제군은 무너진 성벽사이로 공격해 들어 왔으며
도저히 각개병사가 백제군에 상대가 돼지 않던 낙랑군은 순식간에 패배해 궤주했다.
자명고 일행은 우여곡절끝에 3백명의 패잔병을 모아서 대장군이 위치한 후방의 성에 도착했
다. 매천성 의 패전은 이미 알려져있었고 그들을 본 다른 병사들과 군관들이 심하게 조롱했
다.그 큰 성을 하루만에 잃고 뻔뻔스럽게 살아서 돌아왔다고 욕설을 퍼붓는 아군 병사들 틈
에서 자명고와 매천성군관들은 대장군 직속 병사들에게 포박되어 옥 에갖혔다. 옥에서 한
군관은 자명고에게 욕을 하고 혀를 깨물고 죽었다.
다음날 자명고와 그일행은 한 장군에게 끌려가 형식적인 재판을 하게 되었다. 자명고는 그
자리에서 성의 부실건설과 평원성의 비겁한 행위 . 그리고 상황의 불가피성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음을 말했다. 그리고 더붙여 자신이 평원성에 들어간것은 그날
이 처음이었지만 얼마전부터 군량수송때문에 자주 그곳에 들렸고 성의 기 반이 점토라 성의
안전성이 의심된다는 점과 성이 너무 빨리 지어져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장군들에게 여러
차레 제보 했다는 사실도 애기 했다.
재판을 주재한 장군은 그의 말을 더 들어 보지도 않고 전선도주에 비겁한 행위를 했으므로
사형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자명고는 전선도주와 비겁한 행위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그
장군에게 따졌으나 돌아온건 미친놈 비겁자라는 욕설뿐이었다.그때 한군관이 자명고가 대신
문수의 후원을 받는자란 사실을 애기했다. 그때까지 수염을 거만하게 쓰다듬으며 표독스럽
게 떠들던 장군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면서 자명고는 군량관이고 그날 처음 성에 들어갔으므
로 책임이 적다하여 장5대로 감형한다고 판결을 바꾸었다.
자명고는 눈물이 나왔다. 이래서는 안돼는것이다. 나도 죽여라고 울부짖으며 한번내린 판
결을 그렇게 쉽게 바꿀수 있느냐고 자명고는 이성을 잃고 장군에게 대들었다.
자명고가 형틀에 묶여 태형을 받는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광장에 끌려가 진에 있던 모든 낙
랑병사들이 모인가운데 목이 잘렸다. 끌려가던 그들중 일부는 너때문에 이렇게 수치스럽게
죽는다며 자명고에게 침을뱉고 눈물이 섞인 욕설을 해댔다.
목이 잘린자들에게 병사들은 침을 맫었다.
형식적인 장5대에 자명고는 그후 심하게 앓았다 . 그를 괴롭힌것은 장5대가 아니라 병사들
이 보는 앞에서 에서 수치스럽게 죽은 군관들의 주검들이었다.. 그는 무언가 높은 이상에 의
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일이 이치에 맞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은 단순한 1더하기 1는 2라는 계산식의 답을 내지도 못할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답답했고
서글펐다. 게다가 사람의 목숨. 너무나 많이본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받아온 그 목숨들..
자명고는 원래 낙랑사람이 아니었다. 한무제가 설치한 한4군이 점차 쇠락하자 4군이 점유했
던 평양서쪽은 공백지대와 같은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계 무역을 하던 유복한
가문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거란과 부여에 의해 지나(중국)와의 연락이 단절됬던 만주 중
동부의 국가들은 지나와의 교통을 열기 위해 혈안이 되있었 는데 가장 알맞은 지점이 평양
부근 해안지대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통해 필요한 문물을 수입하고 부를 위해 무역을
하곤 하였다. 아직 백제는 한수 확보에 총력전을 기 울이던 사이었고 소극적인 낙랑국(압수
-압록강-하류와 요동남부에 걸쳐 존재하던)은 분쟁을 두려워하여 이곳에 개입하기를 두려워
해서 이곳에 살던사람들은 자유롭게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할수 가 있었다. 또한 고구려나
그외의 만주중부의 국가들은 사방의 적과 죽기 살기로 전쟁을 벌이는 와중이었으므로 이지
역까지 진출하기는 무리였던 때였다.
자명고는 어린시절부터 계산이나 장사를 좋아해서 사춘기에 들어서자 자청해서 아버지의
무역일을 돕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다른나라로 특히 고구려에 가서 군인이 되
기를 원했는데 자명고는 군인에 흥미가 없었고 오로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사하기를 희망
했다 .자명고가 성장해서야 이해했지만 어린시절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가 언젠가는 결국 만
주를 지배할것이라고 말하곤했었다. 형들 역시 당시 야수처럼 생각 되던 고구려의 무사가
될생각은 꿈에도 없었고 오직 여자와 재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16세가 되던해에 동방의 소국들을 제압한 고구려가 남방으로 진출하기 시작
했고 낙랑도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평양에 동시에 진출해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
했다. 그의 집이 직접적인 싸움터가 되지는 않았지만 낙랑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는통에
군인들이 들끓고 자명고의 아버지는 할수없이 낙랑군을 지원해야만 했다.
자명고가 보기에 낙랑군은 군대가 아니었다. 자명고가 어린시절 들어왔던 전설이나 신화속
의 명예와 용기로 윤색된 군대가 아니라 물욕에 눈이먼 군기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도
적때 같은 무리들이었다. 재물을 약탈하고 마을에서 반반한 아녀자는 모조리 겁탈했다. 항의
해도 갑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낙랑군장군들은 거만하게 알았다고만 할뿐 바뀌는것은 하나
도 없었다. 낙랑의 문씨성을 가진 한 명문가문을 오랫동안 후원해온탓에 자명고의 집은 특
별 대우를 받아 병사들의 출입이 제한 되었지만 다른 집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집이 없어서
낙랑군을 원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러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낙랑군은 고구려군에 무참히 패해 북쪽으로 도망갔고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마을에 들어 왔다. 고구려군은 낙랑군과 틀렸다. 마을에 들어오지도 않은채 외곽
에 임시막사를 짓고 야영했고 병사들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거칠었지만 군기가 엄정해서 직
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물자공출도 군관한명 이 와서 이것저것 필요하니 달라고 예
의바르게 요청했으며 상황이 호전되면 몇배로 보상하겠다고 말했다. 자명고는 잠시나마 고
구려군 에 호의를 가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소한 일로 고구려병사와 시비가 붙은 마을사람몇명이 고구려병사 한
명을 구타했는데 고구려군은 다음날 마을 사람 전원을 한군데에 모아놓고 시비를 일으킨 마
을 사람을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잔인한 방법.산채로 사람의 피부를 벗겨 출혈과다로 죽
이는 방법 으로 살해했으며 마을의 촌장을 잡아서 양손을 절단하고 두눈을 파내버렸다.
그일은 자명고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전에 낙랑병사들은 물건을 훔치고 강간을 하기는
했지만 사람목숨을 해치는 일은 없었던것이었고 사람을 그런식으로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던것이다. 자명고는 고구려군의 본질을 본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오히려
좀도둑과 강간을 일삼는 낙랑군이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고구려군도 떠나고 자명고의 아버지는 더이상 이곳에 살수 없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어떤
국가의 영향도 받지않는 평양부근이 잠시나마 안전할지 몰라도 백제고구려 낙랑이 언 젠가
는사생결단으로 차지할려고 나올것이라고 하며 그때는 우리가족 전부가 죽을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이지역이 중요하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낙랑국에 들어가서 문씨가문에 의탁하면 우리집이 가진 재산으로 다시 시작하여 지
금처럼 잘살 수 있을것 이라고 말했다. 형들과 다른가족은 이국생활을 두려워하여 반대했지
만 아버지는 그렇게 해야한다며 가족들에게 이주준비를 시켰다. 아버지는 서둘렀지만 막대
한 재산을 금이나 귀중품으로 바꾸는 일이 쉽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자꾸만 시일
이 늦추어졌다.
아 사람의 운명이란 얼마나 얄굿은 것인가!. 배3척까지 마련해 놓고 며칠후에 이주하기 로
약속한 그날 정체불명의 군대가 자명고의 마을에 들이닥쳤다. 나중에 자명고가 들은 바로는
백제군에 쫓긴 원래는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적로국의 패잔병들이었다. 패배의 굴욕감
과 피로 .굶주림에 사로잡혀있는 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물건을 뺏앗고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자명고의 가족도 그때 대부분 죽었으며 자명고는 삼촌, 어머니와 조카몇명과 함께
육로를 통해 낙랑으로 간신히 도망갔다. 엄청난 재산이 불에 타고 약탈됬고 형들은 경솔하
게 대들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아버지는 불붙은 창고를 지키다가 불에 타죽었다.
아버지가 훗날을 위해 후원해온 낙랑의 명문. 문씨 가문사람들이 자명고 가족 을위해 낙랑
의 수도에 집을 사주고 물질적으로 지원까지 해주었지만 한동안 자명고의 가족은 비탄에 잠
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죽은 자들에 대한 그리움. 비록 문씨가문의 지원이 있다 하더라도
과거와는 비교가 돼지않는 생활, 이국적인 낙랑국의 문화에 대한 부적응 등으로 자명고는
괴로워 해야만 했다.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이 돼고 정신적으로 차분해지자 자명고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
했다. 새해가 되면서 17살이 됬는데 삼촌은 너무 늙었고 조카들은 젖먹이거나 그렇지 않더
라도 모두 아이들뿐이었다..게다가어머니는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계속되는지 제정신이 아니
었기때문에 명고가 실질적인 가장이되어버렸고 어떻해든 예전의 생활로 가족을 돌려 놓아야
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자명고는 장사를 시작해볼려고 했지만 과거 자유롭게 할수 있었던
여러가지 것들이 국가라는 틀안에 들어오자 여러가지 규제가 너무 많았으며 낙랑국의 관련
관리들이 요구하는 뇌물이 자명고가 마련한 밑천보다 오히려 더 많을정도 였다. 그리고 그
는 당시 혼자서 장사하기에는 너무 어렸었다.이런것은 문씨 가문에 도움을 청할수 있는 종
류의 문제도 아니었고 자존심때문에라도더이상은 그들에게 의지할수 만은 없었다.
자명고는 군대에가기로 결심했다. 군인으로 출세하기위해서가 아니었다 .경력이 필요했던 것
이다. 이방인이라 힘겨운 여러가지 일들이 군인으로서 작으나마 경력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것같았다. 그는 삼촌과 가족들에게 얼마간 군대에서 경력을 쌓은다음 문씨가문 에 부
탁해서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는 한번 군대에 들어가면 언
제 빠져나올지 모르는 그런시대 였다.가족들은 검술하나모르고 말도 잘못다루는 자명고가
군대생 활을 어떻게 하냐며반대했지만 자명고는 의지를 꺽지 않았다. 문씨가문에서 힘을 써
줘 칼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자격미달의 그였지만 군량이나 보급을 담당하는 부서의 군관
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태형을 맞고 몸이 몹시 아팠던 자명고는 전황이 안정되자 문수에게 잘보이려고 안달이난
장군들에 의해 호위까지 붙여져서 낙랑국수도 상도로 보내졌다. 17살에 군대에 들어와서 7
년 .미친 어머니는 정원의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했고 삼촌은 병을 얻어 가사를 돌볼 형편
이 아니었으므로 멀리 군진에 있던 자명고는 조카들과 삼촌을 문씨가문에 맡길수 밖에 없었
다. 그래서 현재는 남은 가족은 전부 문수의 저택에 가있었고 도착한 자명고역시 갈곳이 라
곤 조카들과 삼촌이 기거하는 문수의 거택밖에 없었지만 무력감때문에 그곳에 갈수가 없었
다 .
문수는 낙랑국의 최고 대신중한사람이었고 문씨가문의 가장이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절친
한 벗이었던 문수는 자명고를 특히 귀여워 했었다. 군문에 들어간다고 하자 그는 친히 귀한
검을 그에게 선물하면서 자네는 크게 될거야 하며 격려까지 했었었다. 자신이 전선에서 패
주했고 거기다가 병까지 얻은 모습을 아버지같이 느껴지는 그에게는 보여주기 싫었다. 그리
고 조카들과 병상에 있던 삼촌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자명고는 문수가 처음 낙랑에 도착한 그의 가족에게 선사한 지금은 빈집이 된곳에 혼자 기
어 들어갔다. 호위로 그를 따라왔던 병사들에게 약얼마를 사달라고 부탁한뒤 혼자 서 그곳
에 들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병마와 열등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눈을 떴다.
시력이 완전해 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보이는것은 온통 붉은 색이었는데 차츰 촛점이 맞
아가자 그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용이었다. 시뻘건 붉은 바다에 홀로 헤엄쳐 하늘
로 비상하려는 거대한 용이었다.
내가 죽었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들을
다시 볼수 있을테니까. 평양의 그 행복했던 시절로 다시 갈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
지옥같은낙랑에서의 생활에서도 벗어날수 있을테니까.
그는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용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 붉은 색에서 눈을 댈수가 없었다.
그의 껌벅거리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의 하얀 손길이 그의눈물이 흐르는 뺨에 닿았다. 깜짝 놀란 자명고는 고개를 돌
렸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상 옆에 한여인이 앉아서 눈물을 흘리던 그의뺨을 어루만진것이다.
붉은 용은 방안의 천정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아. 사..사모(師母)님."
문수의 세번째 부인인 옥정이었다. 그녀는 호수같이 큰눈에 웃음을 지으며 손길을 거둔다.
"깨어나셨내요. 자도련님"
"여긴.. 그러면.. 대감님 저택인가요? "
"네.... 대감께서 도련님 오셨다는 애기를 들으시고 사람들을 보내 한참을 찾으셨어요.사흘
전에 찾으셔서 여기로 모셔온거에요. 그런데 어쩌면 여기로 안오시고 그곳에 가셨어요? 대
감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데.."
자명고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피했다. 눈물을 흘린 모습을 보인게 부끄러웠고 쥐새끼처럼
피해있다가 이곳에 실려온사실이 창피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서 부인에게 예를 취할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일어나기 시작해 비틀거렸다.
옥정은 그런 그를 만류하며 다시 눕혔다. 그의 어깨를 부드러운 양팔로 안아서 침상에 눕히
는 사이 그녀의 온몸에서 은은하게 향이 베어 나왔다. 성숙한 연인만이 풍기는 사랑스러운
그것이었다
"대감께서 얼마전까지 왕궁에서 일하던 명의를 직접 불러 도련님을 치료하도록 하셨어 요 ..
의원말로는 기력이 너무 약해지셔서 그런거니까 한달정도 쉬시면 괞찮다고 그러더 군요. "
"....."
자명고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피한채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방안에 있던 물주전
자며 급히 써야할 용품같은 것이 있는곳을 자명고에게친절하게 알려주고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명고는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기품있는걸음걸이에 쪽을 지어 올린
흑단같은 머리결이 어우러진뒷모습이 단아하고 향기로왔다.. 막방문을 나가려던 그녀는 할말
이 있는지 뒤를 돌아본다. 자명고는 그녀의 뒷모습에 넋이 나간 자신이 들킬까 시선을 어색
하게 돌린다.
"대감께서는 자도련님을 남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으세요.. 도련님 조카분들도 몹시 귀여워
하시고.. 그러니 도련님도 이곳을 자기집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히 계세요. 그리고 저와 연희
도 도련님이 비록 병환때문에 이곳에 오신거지만 다시오셔서 몹시기뻐요"
"네 ..네네 ........"
그녀는 자명고를 보고 어머니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나갔다. 오랫동안 그녀의 향기가 방
안에 남았다.
그녀를 보자 자명고를 괴롭혀왔던 상념들은 금새 날아가버렸다. 그녀를 사모한다고 스스로
생각 하지는 않았다. 그런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되는 일이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문수의 부
인이 었다. 그리고 자신이 저런 고귀한 여인을 사모할 정도의 인간도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
한다.돼지도 않을일,, 논리에 밝은 그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만 하고 행
동은 하지않으면 안돼냐구?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에 억매여서 마음의 기력을 소모하는것또
한 굉장히어리석은 일이다. 자명고는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걸어 잠그었다.
그녀는 문수의 세번째 부인이었다. 전부인둘이 죽자 문수는 그의 측근중한사람의 딸을 얻었
는데 50대인 문수와 나이차이가 30이 넘는 17살의 옥정이었다. 자명고는 그녀를 낙랑국에
들어온 그때 처음으로 보게되었다. 당시옥정의 나이는 21살 이었다. 17살의 자명고는 당시
갑작스럽게 일어난 신상의 변화탓에 감정에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녀를 특별히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의 사망이후 가족들이 문수의 집으로 들어가자 군대에
들어가있던 자명고는휴가를 얻어 나올때 마다 그녀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옥정은
특별한 그무언인가로 자명고에게 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되는일이없이 고통스런 군대생활에 어머니의 죽음까지 겹친 자명고는 자기혐오가 극
에 달한 상태 였고 스스로 그런 인간다운 감정을 용납할수가 없었다. 물론 자명고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여 뭔가 이루어질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명고는 무진 애를 썼다.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기 위해.. 자명고는 그녀앞에만서면 항상 당황했고 조급했다. 낙랑의
고급문화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자명고는 낙랑의 귀족층들앞에섰을때 스스로 자신을 초라
하게생각하곤 했는데 자명고는 그런종류의감정이 옥정앞에서 자신을 조급하게 만든다고 생
각했다. 거북스러웠다.
그런데 우스은 것은 자명고를 거북스럽게 하고 그에게 열등감을 주는 그녀를 자명고는 군
대에서 참으로 많이도 생각한것이다.자기의지가 아니었다. 고통스럽고 힘겨운 날 저녁.황량
한 야지의 막사안에서 홀로 누우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내적인 영역안으로 들어왔다.
자명고는 거기까지는 막을수가 없었다.. 자명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삼촌과 조카들을 찾아볼
려고 했는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가 않았다. 저녁때 조카들이 찾아왔다.
-2부(1)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