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칼과 기름(2)
‘도와줘요, 여신님.’
-띠링!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리자, 특유의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반투명의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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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한 자들의 요구》-[열람]
《지고한 자들의 축복》-[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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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저번처럼 《지고한 자들의 축복》이란 항목의 글씨체가 변해 반짝이고 있었다는 걸 제외한다면.
저번에 이시스 신전에서 축복을 강화했을 때와 같은 상태다.
-띠링!
열람 버튼을 눌러, 검지손가락으로 쭉쭉 스크롤을 내렸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허공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 정도로 보일 것이다. 약간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별 문제는 아닐 것으로 본다.
욕탕에서 대놓고 창남이랑 뒹구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닌데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하겠냐고.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다들 타인에게는 신경쓰지 않는 느낌이니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도 있고 뭔가 열띤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뭘 하는지 쳐다보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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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된 피비린내 나는 거래(Fortior Viri Sangvinvm Artis)》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실현되는 축복. 영혼의 위상을 뒤바꾸는 매개체에 힘이 깃든다. 죄인을 검으로 살해해 영혼을 흘려보냈을 시, 일정 시간 동안 검을 통해 발현되는 물리력이 100% 증가한다. 또한 축복이 활성화되었을 시, 검이 스스로 피해를 원복한다.
(다음 단계 해금까지: 35/30)-[강화]
{흉악한 죄인은 정의의 검으로 다스려 그 영혼을 내게로 흘려보내라. 내 친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려줄 터이니.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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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버튼은 밝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 두 번째 강화라니. 감개가 무량하다.
하루하루 성장해나가는 기분도 들고.
첫 번째 강화를 위해서는 전쟁터에서 미친놈마냥 굴러야 했는데, 두 번째 강화는 일방적인 학살로 하루 만에 조건을 충족시켰지 않은가.
물론 이건 전장에서 워낙 많은 야만인 새끼들의 모가지를 따버려서, 일종의 비축을 쌓은 탓이 압도적으로 더 크기는 하다. 10명만 죽이면 됐는데 37명을 썰어버렸으니까.
아무튼 기대가 된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능력이 더해질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강화] 버튼을 꾹 눌렀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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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피비린내 나는 거래(Ultima Viri Sangvinvm Artis)》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실현되는 축복. 영혼의 위상을 뒤바꾸는 매개체에 힘이 깃든다. 죄인을 검으로 살해해 영혼을 흘려보냈을 시, 일정 시간 동안 검을 통해 발현되는 물리력이 150% 증가한다. 또한 축복이 활성화되었을 시, 검이 스스로 피해를 원복한다.
축복의 지속 시간 동안 사용되지 않은 축복은 검의 심부에 자동적으로 저장된다. 축복의 수여자는 검을 잡은 상태에서 의지힘을 통해 저장된 축복을 칼날로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저장된 축복의 지속 시간: 15/60)
{흉악한 죄인은 정의의 검으로 다스려 그 영혼을 내게로 흘려보내라. 내 친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려줄 터이니.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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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축복의 이름이 바뀌었고, 물리력 증대 비율이 50%p가 늘어 150%가 되었다.
하지만 비율 증가 정도는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아예 새로운 내용이 생겨났다는 것, 이 두 가지다.
다음 단계 항목이 사라진 데에다가 축복의 이름부터가 ‘궁극의 피비린내 나는 거래’로 바뀐 걸 보면, 축복이 아예 최종 단계까지 강화 완료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고작 2번 강화하는 게 끝이라니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딱히 실망스럽진 않다.
실로 궁극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새로운 능력이 축복에 추가되었으니까.
사용하지 않은 축복이 자동적으로 저장된다?
이것 하나만으로 이 ‘피비린내 나는 거래’의 위력은 대략 2배쯤 강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 하나를 아주 제거해버린 수준이니까.
첫 번째 적을 상대할 때, 첫 타의 위력이 약해진다는 문제점 말이다.
죄인을 죽여야 축복이 발동된다는 것은 곧 죄인을 죽이기 전에는 축복을 못 쓴다는 소리와 같다. 그러니 한 번에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이만한 것이 없지만, 일대일로 맞붙거나 각개격파를 해나갈 때에는 실질적으로 쓰지를 못했다.
첫 타는 그냥 내 순수한 힘과 기술로 어떻게든 공격을 우겨넣어서 때려야만 한다고.
전장에서 이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 번 흐름을 잘 타서 소위 말하는 ‘스노우볼’이 굴러갈 때가 아니라면 쓸 상황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족장 상대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르드하우를 썼어야만 했다. 그러다 배에 투창맞고 쓰러져서 하마터면 동귀어진 할 뻔 했었고.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물리력 150% 증대 버프라니. 이 정도는 되어야 신의 축복이라 할 만하지.
그나마 단점을 꼽아본다면 축복의 최대 비축분이 60초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죄인 한 명당 비축되는 축복의 지속 시간이 3초 밖에 안 된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죄인들을 썰어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처형인으로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축복은 자연히 쌓이기 마련이니까. 최소한 지금 가진 15초보단 많아지겠지.
물론 60초를 꽉 채운다 해도 아껴서 쓰긴 해야겠지만.
“9번 손님이신가요, 혹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마나 노예겠지.
쥐고 있던 나무패를 뒤집어 9를 의미하는 로마 숫자 IX를 보여주었다.
하여간 로마 숫자가 멋지긴 하다. 11부터 실용성이 바닥을 쳐버려서 문제지.
로마 숫자는 약간 야드-파운드 단위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문학적인 장치로는 멋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의 측면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멋진 쓰레기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
솔직히 미터법이 나왔으면 야드-파운드는 버리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대체 왜 21세기에도 중세식 단위계를 고집하는 건데.
하여튼 이게 다 사회에 살아있는 귀족이 있어서 그렇다.
귀족은 얌전히 단두대 위에서 칼날이 떨어지기나 기다리고 있어야지. 지멋대로 거리를 돌아다녀선 안된단 말이다.
“아, 확인했습니다. 전신 제모와 올리브 기름 마사지 요청하신 게 맞나요?”
한편 내 번호를 확인한 노예는 서비스업 특유의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내 요구 사항들을 재차 확인했다.
원래는 대충 맞다고 대답할 생각이었지만, 전신 제모라는 단어에서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져 한 마디 덧붙여 답하였다.
“예, 맞습니다. 근데 전신 제모에서 머리는 빼주시고요.”
따지고 보면 머리도 전신의 일부이긴 하니 명시를 해주는 게 맞을 것이다. 혹시 머리를 싸그리 밀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내가 당장 이시스의 사제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빡빡이가 되고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야 당연하죠. 그것 말고는 요청하실 사항 더 없으실까요?”
“옙.”
“그럼 따라와주시죠.”
수건이 풀어지지 않게 한번 더 단단히 고정하고서 노예를 뒤따라 갔다.
탈의실에도 있었던 것과 비슷한, 간단한 천으로 구별된 마사지실 입구를 지나자 거대한 강당이 보였다.
돔 밑에 펼쳐진 거대한 공간은 기다란 대리석 테이블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위에 알몸의 여성들이 누워 각각 한 명의 노예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대다수가 남들에게 나체를 드러내고 마사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다들 머리맡에 천으로 덮인 칸막이가 있는 걸 보면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서도 마사지를 받을 수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걸로 주위를 차단한 테이블도 꽤나 있는 편이고.
나야 당연하지만 칸막이 쳐달라고 할 거다. 남들에게 제모당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쓸데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취미 따위는 없으니까.
난 염병할 마조새끼가 아니다. 그러니 수치플레이 따위 좆까라 해라.
어쨌든 그렇게 여러 여성들과 찹찹거리는 마사지 소리를 뚫고 강당을 가로지르자, 비어있는 테이블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수건 벗으시고 누우시면 됩니다.”
“그 전에 칸막이 좀 쳐주시죠.”
“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바깥 세상과 유리된 것을 확인한 뒤, 수건을 벗은 채 대리석 테이블 위에 누웠다.
그나저나 누우면서 보니 마사지용 테이블 중간에 원형으로 구멍이 난 부분이 있었다.
위치와 크기를 감안해 추측해보자면 아무래도 성기가 들어가는 자리 같다.
엎드렸을 때 그냥 눌리면 아프긴 할 테니까.
“…굉장히 건강하시네요?”
그때 날 빤히 바라보던 노예가 약간 멍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잔근육을 보고 한 말일까, 하반신을 보고 한 말일까.
솔직히 후자 같다.
“힘은 빼시고, 편하게 있으세요.”
처음 보는 여성 앞에서 알몸으로 누워서 털을 밀게 시킨다니. 기분이 영 어색하다.
어쩌면 잠재적인 위협 때문일지도.
별 일이 없어야 할텐데 말이지.
“그럼 음모 먼저 제거해드리고, 다른 잔털 밀어드릴겠습니다.”
시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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