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칼과 기름(1)
솔직히 말하자면, 난 마사지와는 그닥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오일 마사지? 받아본 적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문적인 마사지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셀프 안마 정도라면 모를까.
그래도 제대로 된 효과는 있으리라 믿는다.
오일 마사지는 분명 현대에도 존재하는 마사지 방법이니까. 효과가 없다면 존속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모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제모는 왜?”
“좀 너저분하잖아. 원래 이런 건 미는 게 깔끔하다고.”
내 질문에 답한 코페시는 잠시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약간은 작아진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빨 때 좀 불편해.”
그냥 미학적인 이유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그래. 그럴 수 있지.
다른 누군가의 털에 파묻히는 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테니까.
물론 여기선 그게 나름의 페티시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코페시에게는 그런 취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요청을 해오는 것이겠지.
“그…래.”
하지만 그 솔직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영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제모라 함은 전신의 털을 잘라내는 행위.
이를 위해선 몸에 칼을 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경우에는 아마 내 소중한 하반신에도 칼을 대야만 할 것이고.
그러나 이게 안전하리란 보장은 존재하지가 않다. 나름 칼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데, 칼날이라는 건 자칫 잘못 다루었다간 엉뚱한 사람을 좆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검도 도장에서 그런 개짓거리를 몇 번 해봐서 잘 안다. 심심해서 친구한테 호구를 씌우고는 목검으로 몇 번 줘팼다가 관장님한테 크게 혼난 적이 있었으니까.
호구를 쓰고 있어도 목검으로 얻어맞으면 아파한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었다. 대련하면서 직접 얻어맞으면서 더 절절히 깨달았고.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인 것이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지나간 옛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정리해보자.
마사지야 좀 많이 잘못된다 쳐도 멍드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제모는 좆될 경우엔 아예 고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건 영 좋지가 않다.
물론 성행위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씨가 필요하기야 하겠지마는, 단순 미용 목적을 위해 성기의 부상을 감수하는 건 그닥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란 소리다.
“아무튼, 제모는 몰라도 마사지는 꼭 받아. 근육통이 그냥 소멸해버린다니까? 칼질 하는 것도 오랜만인데, 근육은 제대로 풀어줘야 뒤탈이 없다고.”
한편 내 불안한 심리를 그새 어찌저찌 눈치챈 것인지, 코페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사지는 원래 받으려고 했어. 그렇게까지 말 안해도.”
그때 심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내 정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며, 올리브 오일에 범벅이 된 코페시를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윤기와 함께 반짝거리는 피부와, 뷰지에서 몇 방울씩 떨어지는 끈적한 기름방울 등등을.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자연히 생리적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하.”
그런 나를 쳐다보며, 더 정확히는 반쯤 발기한 내 하반신을 쳐다보며,
“너도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코페시는 음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하긴, 기름 받으면 훨씬 야해보이긴 하지. 남자든 여자든 간에.”
젠장할, 또 뽑히게 생겼네.
이 망할 놈의 하반신이 문제다.
힘도 없어서 제대로 풀발도 못하는 주제에, 성욕은 넘쳐서 지멋대로 번식 회로를 돌려댄다고.
“그런 놀랐다는 표정 짓지 말고. 나도 그런 취향 있거든?”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페시는 또다시 내게 밀착을 해버리고야 말았다.
“아직 힘이 빠진 모양이기는 한데… 으음.”
손으로 발기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내 상태가 아직 섹스에 완전히 적합하지는 않다는 걸 깨달은 탓이겠지.
“좋아, 그럼 나도 마사지 받아서 네 취향 좀 채워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내겐 예언 능력이고 뭣도 없음에도, 코페시가 무슨 말을 할 지 뻔히 예상이 되었으니.
이것 또한 나쁜 예감의 일종이라 봐야 할까.
“털 밀어.”
나쁜 예감이 맞는 것 같다.
***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난 지금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로마 숫자가 적힌 나무패를 붙잡은 채, 흥분되면서도 착잡한 마음으로 대기하는 중이다.
내 성욕과 코페시의 적극적인 설득에 넘어간 탓이다.
이게 맞는 걸까?
“아니, 그런 눈길로 날 바라보지 말라고. 대충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생각해 봐. 만약 제모 받다가 누구 하나 거세라도 당했으면, 그 노예가 무사하겠어?”
“그렇진 않겠지.”
“그럼 날 믿어. 제모 하는 사람이 한 두명도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그래, 안심하자. 별 일 없을 거다.
“그리고 넌 남자잖아. 물론 키가 크고 힘도 쎈 편이긴 하지만, 내구성의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고. 털 관리도 안하고 험하게 굴렀다간 병 같은 거 옮는다고.”
글쎄, 유스티티아에게 축복받은 2회차 인생이 질병으로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솔직히 죽는다 해도 하청으로 계속 부려먹겠다고 부활시킬 것 같다고. 유스티티아의 인성을 보면 그러고도 남는다.
빨리 정의인지 뭔지를 찾아내야지, 안 그러면 이 망할 종신노예계약을 해지할 수가 없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그나저나 코페시는 은근히 걱정이 심하다. 날 너무 나약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
물론 신경을 써주는 건 좋은 일이고, 함부로 불평할 수는 없다. 한번 창 맞고 골골대기도 했으니 아예 근거없는 걱정이라 할 수도 없고.
하지만 그렇다 쳐도 좀 과한 감이 없잖아 있다.
적극적으로 믿고 지지해주는 테스티아나 이페이아와는 좀 차이가 있는 부분이겠지.
하지만 차이가 있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 둘은 전투민족의 사회에서 나고 자랐으니, 문화적 차이가 더 없는 게 이상할 것이다.
원 역사의 스파르타와 켈트 모두 여전사로 유명했었다. 그러니 역전이 된 이 세상에서는 남전사가 낯설지 않은 문화권일 것이고.
하지만 로마는 남전사를 익숙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곳 사람들은 코페시의 시선, 또는 그보다 더 남녀차별적인 시선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겠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을 테고.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남자란 뭘까.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대체 어떤 느낌으로 보이는 걸까.
원래 세상 기준으로 치환해 본다면 아마 이해가 빠르겠지.
그리하여 빠르게 돌아간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은, 다름아닌 장신의 여전사.
키는 190cm 정도 될 것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쯔바이핸더를 휘두르고 있겠지.
난 헬창이 아니니 이 여전사 또한 근육괴물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만져보면 나름 탄탄한 근육이 느껴지는 여성일 것이다.
양 손목에는 대련 중에 생긴 흐릿하지만 울퉁불퉁한 흉터가 적잖이 있겠고, 배에도 아주 옅은 흉터 자국이 있겠지. 왼쪽 어깨에도 칼로 두드려 맞은 자국이 있을 것이다.
…뭔 놈의 흉터가 이따위로 많아?
누가 보면 내가 무슨 험악한 미친놈인줄 알겠네. 이래서 사람은 갑옷을 튼튼히 입어야 하는 거다. 좋은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튼, 마저 치환해보자면 아마 가슴과 골반도 꽤나 클 것이다. 내 하반신의 크기가 가지는 위상이 대략 이 두 개와 비슷할 테니까.
그럼 이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길가에서 160cm대의 일자형 몸매인 여자와 190cm대의 거유 골반녀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면, 과연 누구에게 관심이 쏠릴 지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무조건 후자겠지.
사회의 대다수가 전자의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더더욱.
물론 190cm의 장신이 그리 보편적인 취향은 아니다. 내 취향도 딱히 아니고.
하지만 일단 가슴과 골반이 충족되고 나서야, 비로소 키를 따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 진리와 다를 바가 없는 무오류의 명제이다.
“혹시 27번 손님이신가요?”
생각에 한창 잠겨있을 때, 노예가 코페시에게 찾아와 말했다.
그러자 코페시는 로마자 숫자가 적힌 나무패를 보이고는 일어섰다.
그와 함께 내게 말을 건네었다.
“끝나면 여기서 나 기다리지 말고, 온탕으로 가서 씻으면서 몸 좀 덥히고 있어. 아마 나도 거기 있을 테니까.”
점점 멀어져가며, 흔들리는 골반과 탄탄한 구릿빛 허벅지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저 안에는 엄청난 힘을 내는 근육이 숨어들어 있겠지. 그리고 추측하건데, 원래 세상의 남자들보다 더 많은 근육이 숨겨져 있을 게 분명하다.
근밀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면, 저 몸매에 저 정도 힘이 나올 수가 없을 테니까.
‘힘이라.’
그나저나 힘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죄인의 영혼을 통해 강화되는 축복, ‘피비린내 나는 거래’ 말이다.
아마 지금쯤 또 강화 버튼이 생겨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3명만 더 썰면 강화가 가능해지는 상태였는데, 처형식 때 8명이나 썰어버렸으니까.
이왕 기다리는 김에,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