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목욕탕(2)
로마의 많은 대형 건물들이 그렇듯, 대욕장 역시 굳은 표정의 경비병들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다.
총 일곱 명의 사슬 갑옷을 입은 경비병들이 각 기둥 앞에서 검손잡이를 만지적거리며 서 있었고, 오른편 세 기둥 앞에 선 세 명의 노예는 돈을 세고 있거나 입장로를 낼 것을 독촉했다.
정문의 왼편에 노예가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은 들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입구가 아니라, 산발적으로 사람들이 나타나는 출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고로 테스티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저들의 엄밀한 호칭은 치안대원이기는 하다. 그렇기에 저 군인들은 목욕탕이나 신전 등 건물에 따로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시청 관할로 일하며 도시 전반의 치안을 관리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는다고 한다. 이런 공공시설 감시도 그런 임무들 중 하나이고.
그래도 어쨌든 경비 임무를 하고 있으니 경비병이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입장료와 목욕비 포함해서, 1인당 1아스입니다.”
노예들 중 가장 오른쪽에 선 이, 즉 내 앞에 선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코페시는 가죽 주머니에서 총 4개의 동화를 꺼내 내밀었다.
참고로 내가 알기로 1아스의 가치는 대략 1/4세스테르티우스 정도 된다. 그리고 1세스테르티우스는 1/4데나리우스니, 1아스는 1/16데나리우스가 되겠지.
물론 그렇다 해서 1아스가 정확히 얼마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 아는 것은 아니다. 딱히 비싼 금액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뭔가를 직접 사본 적이 없어서 감도 안 잡힌다.
언젠가 시장에라도 한 번 가봐야 하나.
그나저나 이 망할 놈의 로마 화폐는 대체 왜 4진법을 따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좋게 10진법으로 통일하면 안되나?
“총 네 명… 예, 들어가시면 됩니다.”
한편 잠시 우리 넷의 얼굴을 슥 살펴본 노예는 그리 말하며 길을 터주었다.
정문 뒤에는 흔들리는 등잔불로 밝혀지는 어두운 회랑이 있었다.
그리고 이 회랑의 기둥 너머로, 거대한 야외수영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천장 없이 맑은 하늘 아래에 위치한 직사각형의 욕장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커서,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는 표현을 해도 부족하지가 않았다.
웬만한 소형 광장에 비견되는 크기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저 규모만으로 압도하는 종류의 건축물은 아니었다. 장식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욕탕은 일전에 보았던 그 식물조각으로 머리가 채색된 열주와 회랑으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세 기둥에 하나 꼴로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물에 젖은 듯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의 표현과 채색은 심히 사실적이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21세기 조각이 아닐지 착각할 정도였다.
이런 거 하나 짓는데 돈이 얼마나 들까. 대략 이번 전쟁 배상금으로 받았다던 300만 데나리우스 정도는 들지 않았을까 싶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런 목욕탕이 도시에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로마 시 전체로 따져보면 도시 계획에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되었는지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대체 이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나오는 거지? 이집트 속주?
“좀 크긴 하지?”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코페시의 물음에 난 그리 답했다.
앞서 말했듯, 이건 물로 채워진 광장이라 해도 믿을 수준의 규모였으니까.
또한 광장에 비견될 정도로 사람도 많았다. 당장 보이는 인간들만 해도 100명은 우습게 넘을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욕장의 공간에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마치 21세기의 워터파크에 놀러온 듯해서 은근히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로마가 서구 문명의 시초라 하는 건가 싶다. 이런 웅장한 건축물이라니.
로마가 멸망하고 나면, 이런 장대한 건축물이 세울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하는 데에는 천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겠지.
얼마나 아까운 일이란 말인가.
물론 시기상 로마 망할 때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예술적인 욕탕도 한 줌의 돌무더기로 변하게 된다니.
그런데 그리 생각에 잠겨 있으니, 뭔가 이상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면 위에 드러난 사람들의 모습이 일정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가슴의 크기도, 머리 길이와 키가 극명히 달랐다.
설마.
“…여기 혼탕이었어?”
여자와 남자가 함께 욕장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옷을 죄다 벗은 채, 알몸으로.
“아니, 그럼 공중목욕탕이 혼탕이 아닐 수가 있어?”
내 질문에 코페시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정말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혼탕이라니. 이건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난 혼자서 뜨신 물 들어가서 편히 쉬는 그런 건 줄 알았지.
그러다가 적당히 나와서 달달한 포도주나 먹으면서 노가리나 까다가, 노곤한 느낌으로 집에 기어들어가 한창 게으름 부리다 잠에 빠져드는 것을 상상한 거였다고.
허벅지만으로도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데, 대놓고 젖통과 뷰지까지 보아버리면 그야말로 풀발을 해버릴 게 뻔하다.
그런데 혼욕을 한다는 것은, 그 풀발한 자지를 검투사 세 명도 똑똑히 보게된다는 것 아닌가?
이게 맞나?
“뭐야, 왜 귀가 빨개졌어?”
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뛴 탓인지, 잠시 멍해진 정신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흠칫해서 귀에 손을 대어보니 실제로 뜨거워져 있었다. 명백한, 혈류량의 증가.
“…풉.”
여전히 반쯤 멍한 상태에서 날 빤히 바라보던 이페이아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새파란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야한 생각이라도 했어? 여자들 알몸 볼 생각하니까 좆에 피 쏠리나 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페이아의 음담패설이었다.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어투에, 그 특유의 껄렁대는 목소리.
“그러게. 또 발정났나 보네, 자기야?”
거기에 장난스러운 말투로 몇 마디 덧붙인 코페시는 킥킥대며 웃었다.
그러고는 내 목에 입을 가까이 대더니 말을 이었다.
“테스티아 가슴도 보고 싶은 거야? 막 젖통에 얼굴 파묻고, 빨고 싶어? 어제 나랑 그랬었던 것처럼?”
함께 흘러나온 숨결이 목을 간지럽혀, 나른한 느낌과 함께 잠시 소름이 돋았다.
이 묘한 느낌과 난데없는 음담패설이 겹쳐 심히 당황스러웠다.
그랬기에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 그게 말이지.”
“으흠, 흠.”
근데 나뿐만 아니라 테스티아도 덩달아 당황한 것인지, 그녀 또한 헛기침 소리를 내며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섹드립 자체에 내성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남자 앞에서만 그런 걸까.
이페이아와 보지에 불나게 비벼댄다는 코페시의 말을 감안하면 아마 후자일 것 같다. 이페이아가 떡칠 때 얌전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근데 저 둘의 관계는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냥 꼴리면 바로 떡치는 친구의 개념인가?
“농담이야. 보고 싶으면 마음껏 보라고.”
그렇게 한참동안 목에 숨을 불어넣던 코페시가, 마침내 목에서 입을 떼고는 말했다.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내 얼굴을 잡고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돌렸다.
그 상태로 말한다.
“나도 니 꺼 마음대로 볼 테니까.”
-쪽.
느닷없이 목에 키스를 해버린다니.
저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노골적인 애정 표현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목욕탕의 입구 한켠에서 하기엔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느껴질 정도로.
실제로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가는 더 민망해질 것 같았기에, 난 어쩔 수 없이 코페시의 두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얼굴이 물리적으로 붙잡혀 있기도 했고.
한 쌍의 청록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 눈썹 아래에서, 완벽히 조화를 이룬 채로.
그 지중해빛 눈동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묘하게 흔들리며, 또한 흐려지는 듯한…
“하긴, 테스티아 가슴이 맛있게 생기긴 했지. 근육이 많아서 탱탱하거든.”
“크흠, 흠!”
하지만 그 오묘한 감정은 곧 깨어지고야 말았다.
작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테스티아의 헛기침 소리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계속 코페시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간 그만 분위기가 어색해지고야 말겠지.
재빨리 주제를 돌릴 필요성이 있다.
“근데 탈의실은 어디있어?”
“아, 맞다. 탈의실.”
내 말에 코페시는 손가락으로 왼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남자들 탈의실은 저기, 왼쪽에서 첫번째 방에 있어. 근데 옷 맡겨놓으려면 돈 내야 하니까, 이거 받아가고.”
-짤랑.
동전 한 장이 그을린 손에서 튕겨져, 내 손바닥에 안착했다.
붉은 빛이 도는 동화였다.
아마 1아스짜리 동전이겠지.
“다 벗으면 탈의실 앞 기둥에서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갈 테니까.”
코페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오른편으로 향했다.
“...아니지, 잠깐만.”
하지만 그러다, 다시 방향을 틀어 내게 달라붙었다.
마치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와 같이, 껴안듯 날 붙잡았다.
그 상태로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네 몸도, 네 마음도.”
날 제외한,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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