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58화 (59/67)

EP.58 목욕탕(1)

그늘진 지하통로 밖으로 나서자 청명한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푸르른 가로수와 황금빛 여신상, 각양각색의 옷을 걸친 사람들도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들도 세 명 있었다.

“약간의 미숙함이 보이긴 했지만 아주 잘했다. 검술이 참 화려하더군.”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테스티아가 그리 칭찬을 건넸다.

전부터 느끼는 건데, 스파르타인에게 검술 실력으로 칭찬을 받으면 굉장히 기묘한 기분이 든다. 나머지 두 검투사들의 칭찬과는 그 무게가 확실히 다른 것이다.

스파르타인이라 하면, 일단 근본적으로 전쟁병기의 이미지가 강하다.

스파르타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평생을 혹독한 훈련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들 하니까. 거기에 영국 요리에 비견될 정도로 맛대가리 없는 식사를 버틸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일련의 비인간적인 훈련들을 견뎌내며, 스파르타인들은 힘세고 강한 전사로 길러지는 것이다.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른바 전사 종족, 또는 고대의 헬창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

물론 이 세상에서도 스파르타가 내가 아는 그런 험악한 지역의 대명사로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테스티아가 방패 2개만 들고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방패 하나와 주무기 하나 들고서 싸우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방패 2개만 들고서 적과 맞서 싸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그건 간단히 말해서 그냥 미친 짓이다.

“내가 말했잖아, 잘 썰 거라고. 살면서 저런 건 처음 봤다니까.”

테스티아에 이어 이페이아도 칭찬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 그래! 잘 하더라. 걱정은 괜히 한 것 같았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둘 사이에 서있던 코페시도 입을 열었다.

다행히 처형식에는 어떻게 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야, 강한 눈나들에게 둘러쌓여 칭찬 세례를 받는 기분이라.

좋구만.

물론 이 세상에선 남자가 약자의 위치에 있으니 그걸 감안해서 더 칭찬해주는 면도 없잖아 있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검투사들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미안, 좀 많이 늦었지?”

그런데 코페시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는 했는데… 생각처럼 안되더라고. 그래서 좀 많이 늦었어. 미안해.”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늦게 왔다고 이러는 걸까.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니 뭐, 괜찮아. 안 오고 싶어서 안 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처형식은 봐줬잖아.”

그리 답하자, 코페시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래, 이제야 알겠다.

이 세상의 남자들은 그 염병할 뒤틀린 심연의 완곡어법을 쓰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쩔쩔매는 것이겠지.

분명 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는데도 미묘한 목소리의 음계와 콧소리의 함량, 그리고 지극히 하찮고 사소한 맥락적 요소에 의해 의미가 180도 뒤바뀌는 거지 같은 화법.

원래 세상에서는 그것을 여자어라는 말도 안되는 단어로도 불렀다. 이 세상에선 남자어 정도 되려나? 어쨌든 이것도 말이 안되는 단어인 건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말을 쓸 수 있는 건 사람밖에 없지만, 여자어를 쓰는 인간은 결코 사람이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드-파운드 단위계를 단위계라 불러서는 안되며, 또한 영국 요리를 요리라 불러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냥, 그런 짓은 하면 안되는 거라고.

그런데도 이딴 개 같은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잘못이 있다는 양 길길이 날뛰며 불합리한 지랄을 해대는 인간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괜찮아. 진짜 괜찮다고.”

난 당연하게도 그런 인간 언저리의 존재가 아니다. 남자어? 좆까라 해라.

난 그런 요상한 완곡어법 따위 쓰지 않는다.

“막 서러워서 울었거나 그런 거 아니지?”

…설마 내 얼굴보고 짐작해서 그랬었던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평생의 수치로 남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난 내 눈에서 그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리지 않았다고.

그리고 애초에 내 눈물의 원인이 코페시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원인은 시장에게 있다.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장이니까.

내가 봤을 때, 그 인간 분명 뭔가 구린 게 있다. 저런 인간이 제대로 된 시장으로 청렴하게 일을 했을 리가 없다.

“진짜 그런 거 아니고, 괜찮아. 진심이야.”

아무튼 그리 제대로 답해주자, 코페시는 긴장을 풀고 한숨 돌리는 듯 했다.

하마터면 오해가 쌓일 뻔했는데, 다행이다.

내게 야밤의 공원에서 칼을 휘두르는 취미는 있어도, 대화 상대의 감정에 개지랄하는 취미는 없다.

그 상대가 전장에서 함께 싸워준 탄탄한 허벅지의 미녀라면 더더욱 그렇고.

난 착한 사람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나의 고결한 인간성에 스스로 감탄하는 사이, 테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첫 번째 처형식을 축하하는 바다. 그런 의미에서 자그마한 축하행사라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축하행사라. 진짜 뭐 이것저것 챙겨주는 게 엄청나게 많다.

내 검도 함께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잠시 씁쓸해져,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어디 갈래 그럼?”

이페이아의 말에, 잠시 모두가 고민이 잠긴 듯 침묵하였다.

“너 덥지 않아, 지금?”

선수를 친 건 코페시였다.

내 의사를 알고자 하는 듯, 내게 질문을 던져대었다.

“그렇긴 하지.”

“근육도 좀 피곤하고?”

“아마도?”

그러자 코페시는 그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목욕탕이라도 갈래?”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

일단 잠시 집에 들려, 갬비슨과 돈주머니를 방에 잘 던져놓았다.

그러고는 나 포함 네 명이서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 내부 시설에 대해 은근한 기대를 품은 채로.

로마의 목욕 문화는 유명하다. 그 거대한 목욕탕의 규모라던지 하는 건, 중세 유럽을 주로 파던 나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역시 지식으로 아는 것과 경험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목욕탕은 비미날레 언덕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50년 전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는 트라이아나 목욕탕은, 실로 거대했다. 대욕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겉으로 볼 때에는 무슨 대저택이라도 지어놓은 것 같아서 목욕탕을 두른 외벽의 끝에서 끝까지를 볼려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야만 했다.

그리 기다란 외벽 중앙에 뚫려있는, 대리석 기둥으로 지탱되는 거대한 대문 앞에는 사람들이 세 줄로 쭉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사람이 적은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검투사 세 명의 증언에 따르면 이 정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대략 세 줄 다 합쳐 120명은 있는 것 같은데. 평소엔 대체 얼마나 있는 거지.

고대 문명 주제에 뭔 인간들이 이따위로 많아?

그래도 사람들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며 줄이 짧아지는 것을 보면 대기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나저나, 질문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그렇게 대기하고 있던 중에, 테스티아가 말을 걸어왔다.

“예?”

“네 칼날의 광채, 이전에 전장에서도 보았다. 그때는 그저 단순히 헛것을 보았거나 반사광을 착각한 것으로 알고 넘어갔었지만, 점심 때 처형식에서도 그 붉은 빛이 선명히 보이더군.”

아, 맞다.

'피비린내 나는 거래' 쓸 때마다 광채 나오지. 그거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나 했는데, 보이는 모양이다.

이건 느낌이 영 좋지가 않은데.

“그…래요.”

아주 좋지가 않아.

“그 빛의 정체는 대체 뭐지? 추궁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궁금할 뿐.”

하여간 이럴 줄 알았지. 사실 합당한 반응이긴 하다.

당장 군대에서 내 동기가 총 쏠 때마다 총구가 무지개색 빔이 뿜어져나온다고 치면, 나라도 대체 뭔 지랄을 한 거냐고 물을 테니까.

하지만 함부로 진실을 밝힐 수는 없다.

테스티아의 신앙심은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함부로 신의 대리인이니 뭐니 하며 잘못 떠들었다간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능숙하게 변명을 하는 것.

“이게, 그… 동방의 기술 같은 건데! 대충 적들을 겁주기 위해서 바르는 뭐 그런 겁니다. 별 거 아니고, 그냥 눈속임이나 단순한 마술 같은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아무것도 없어요.”

“걱정한다 말한 적은 없다.”

도끼눈을 뜬 테스티아가 내 말을 정정했다.

스파르타인이라 그런 것일까.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편이었지만, 그로부터 느껴지는 특유의 카리스마 탓에 살짝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 말이 그렇다는 거죠.”

"으음..."

내 말에 테스티아는 잠시 생각해보는 듯 허공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가, 동방의 신비한 기술이라.”

다행히도 속아넘어간 모양이다. 진심으로 믿는 것 같으니.

그러나 테스티아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잠시 동안 묘하게 슬퍼보였다.

다시 무표정의 상태로 돌아간 그녀가,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네가 신들의 선택이라도 받은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만 실망해버린 듯한 어투였다.

설마 날 진짜 신이 로마군을 구원하려 내려보낸 용사일 거라 반쯤은 믿고 있었을 줄이야. 이건 상상도 못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내 정체를 밝혀야 할까? 유스티티아가 정의를 찾으라며 내려보냈다고?

아니, 너무 위험하다.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약간 비약을 섞어본다면, 도시 전체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서 사이비 광신도들이 내가 사는 집을 습격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만 내게 온갖 조언과 도움을 주었던 전우가 실망한 채 있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어째서 내게 그리 많은 기대를 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야 하려나.

"흐으으으음..."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던 사이, 우리 앞의 줄은 빠르게 사라져 아예 없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글라폴레스, 정신 차려! 앞으로 가야지! 이제 우리 차례야!"

장대한 대욕장의 정문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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