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54화 (55/67)

EP.54 콜로세움(1)

정오의 태양은 거대한 금박 동상의 표면을 찬란히 비추었다.

코와 뺨을 가리는 그리스식 투구를 조금 이마 위로 넘겨 시원한 이목구비를 드러내고, 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를 짚고 선 동상의 자태는 실로 위풍당당해 보였다.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진 이 동상은 아마 그 유명한 여신을 표현한 것이겠지.

그리스식 이름은 아테나이고, 로마식 이름은 미네르바인 지혜의 여신 말이다.

“역시, 언제나 보아도 아름답군. 신들의 모습이란…”

한동안 여신상을 쳐다보던 테스티아는 조용히 감탄을 내뱉었다. 하긴, 신앙심이라는 쥐뿔도 없는 내가 보아도 멋있게 보이는데 고대 스파르타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확실히 여기 조각상은 맘에 든단 말이지.”

이페이아 또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나저나 저 여신상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매일매일 보는 동상이니까 별 생각이 없을려나?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 여신상 하나를 보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물론 이거 하나 볼려고 왔다 해도 말이 되는 수준의 예술작품이긴 하지만.

이 금박의 여신상이 위치한 곳 역시 로마 시의 많고 많은 광장들 중 하나인데, 다른 광장들과는 구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이 광장이 존재하는 이유, 동시에 이 광장의 중앙에 세워진 건물.

무수한 아치의 경기장, 콜로세움 말이다.

“네가 잘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라폴레스.”

“그야 당연히 잘 하겠지. 최전선에서도 시원시원하게 썰어버리더만, 고작 죄수가 대수겠어?”

두 검투사들은 날 응원하면서도, 그리 크게 걱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참고로 코페시는 이곳에 없다.

어젯밤에 아침 기도만 최대한 빠르게 마치고 응원하러 와볼려고는 시도는 할 텐데, 아마 추종자들이 붙잡고 놔주지 않을 거라 말했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도 붙잡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 4시간이나 지났으니, 처형식 할 때에는 보러 와 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원형으로 빙 둘러진 가로수들을 지나 콜로세움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며 이 거대한 경기장의 외형을 면밀히 관찰해보았다.

일단 존나게 크다.

꼭대기층에 뭐가 있는지 볼려면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대략적으로만 따져도 몇 만명은 될 것 같은데.

외벽의 구조는 세 층의 아치와, 꼭대기에 깃발이 잔뜩 꽃힌 네 번째 층의 콘크리트 벽으로 명확히 구분되었다. 콜로세움 내부는 크게 네 층으로 나뉘는 모양이지.

그리고 로마 시에 있는 대개의 건물이 그러하듯, 모든 아치는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 아치들 중, 2층과 3층을 구성하는 각각의 아치 안에는 모두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

창과 방패를 든 군인부터 시작해서 두루마리를 읽어내려가는 학자, 심지어 독수리까지 종류가 다양하였다.

그리고 절대 다수가 여자였다. 어쩌면 모두가 여자일 지도 모르고.

콜로세움 주위엔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있다고 해도 대다수가 빠져나오는 사람이었지, 들어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은 처형식이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 가량 남은 탓이겠지.

“안녕하십니까, 테스티아님. 그리고 이페이아님.”

네 개의 입구 중 유일하게 매표소가 없는 북쪽 입구로 들어서자, 경비병들 너머에서 고급스러운 옷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시장이 말했던 그 공공노예겠지.

노예의 말에 테스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페이아는…

“…내가 왜 나중에 오는 건데?”

살짝 툴툴거렸다.

“이쪽은 글라폴레스, 오늘의 처형인이다.”

테스티아의 말이 끝나고선 악수를 청했는데, 그러자 노예는 악수를 하면서도 살짝 당황하는 듯 했다.

보통 여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상식인 것일까?

“안녕하십니까, 글라폴레스님. 생각한 것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군요.”

한편 노예는 그리 말하고는, 내게 파피루스지를 하나 건넸다. 그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머나먼 동방의 이국에서 온 남전사가, 사람 키만큼 큰 검을 들고서 야만인들을 쓸어버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단지도 이렇게 멋있게 나왔더군요.”

“…예? 전단지요?”

그리 반쯤 기겁하며 파피루스지를 읽어보니, 전단지가 맞았다.

그림과 함께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심지어 그림의 퀄리티가 꽤나 좋았다.

마치 해골과도 같은 철가면을 쓴 과장된 키의 전사가 뽑혀나간 여인의 목을 치켜올리는 그림이었다는 게 문제지.

대체 내 이미지가 왜 이 꼬라지가 된 건데. 어이가 없다.

난 이렇게 야만적이지 않다고.

그래도 문구는 비교적 정상적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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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 마르타, 키벨레의 축복이 있으라! 메가레시아 만세!

머나먼 동방에서 온 남전사가 벌이는 피의 축제를 경험해보시오! 그리고 목도하시오, 사악한 죄인들을 내려치는 압도적인 정의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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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뭐해? 대답해야지.”

내 어깨를 건드린 이페이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걸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다 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전자가 무난하겠지.

“실로 영광이네요, 아마도… 그래서 제 검은 어디 있는 거죠?”

“경기장 지하의 대기실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다.

제일 중요한 게 어디 있는지는 확인이 되었다.

내 갬비슨도 어제 노예들이 가죽실로 꼼꼼히 꿰매어놓아서 아주 튼튼한 상태다. 안감도 잘 채워넣은 상태이고. 물론 상대의 무장이 극심히 형편없기야 하지만, 준비를 철저히 한다 해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우리는 위로 올라가서 지켜보고 있겠다. 만약 거기서 내 얼굴이 보인다면,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주면 좋겠군.”

테스티아는 그리 말하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스파르타인이라서 그런가, 무슨 표정을 짓던 간에 존나 멋있으면서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절정을 맞을 때의 표정은 그렇진 않겠지.

이런 여전사가, 성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면 이페이아와 물고 빨면서 보지에 불나게 비빈다니. 과연 얼마나 천박한 표정을 지을까?

아니, 시발. 이게 아닌데.

갑자기 이런 음란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검을 빼앗긴 다음부터 정신이 맛탱이가 가버린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정신 좀 차리자. 이 미친놈아.

“노력은 해보죠.”

그리 웃으며 간단히 답하고서, 노예를 따라 걸었다.

“멋있게 썰고 와! 멋있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페이아의 응원을 들으며.

내 오랜 친구, 쯔바이핸더를 향해서.

***

콜로세움의 첫 번째 열에는 로마의 특권층들이 앉는다. 원로원 의원과 귀족, 그리고 사제 등의 중요 인물들 말이다.

그랬기에 막시미아나 또한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열에 앉아, 노예들이 짐승의 피로 얼룩진 모래를 교체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 멍한 표정이군, 막시미아나.”

막시미아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원숙한 유부녀가 되어서도 장난기 넘치는 눈을 가진 오랜 친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페르피나, 오랜만이네.”

막시미아나와는 달리, 페르피나는 학문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여인이었다. 기하학과 철학을 깊이 파고들며 사색하기를 즐기는 그녀를, 천생 무인인 막시미아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은 취미 따위에 의해 갈라지지 않는 법이다.

“자네에겐 원로원의 의원들 모두가 오랜만이겠지. 그래도 최소한 얼굴은 까먹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페르피나는 그리 말하고는, 다시 멍해져버린 막시미아나를 보며 다시금 핀잔하듯 입을 열었다.

“그리 멍해져 있지만 말고,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지 좀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역병도 잠잠해졌는데, 사람 구경도 좀 해봐야지.”

“하여튼 참견은…”

막시미아나는 툴툴거리면서도 페르피나의 말을 따랐다.

즉,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노란 옷을 입은 갈리(Galli) 여섯 명이 보였다. 헝클어진 긴 머리에 화려한 귀걸이를 두른, 흉터투성이 팔의 남사제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들이 키벨레를 섬김으로서 받은 예언의 능력은 매우 정확해서 결코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능력은 오직 신앙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희생을 치루고 나서야 얻어지는 것이다.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막시미아나는 가끔씩 이것을 궁금해하고는 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니, 토가의 천이 망토처럼 머리를 두르게 입은 남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국가사제를 포함한, 공권력에 속한 사제들 특유의 의상이다.

노예가 따라주는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주도하는 저 여인은 아마 플로라의 국가사제일 테지. 4월 말에 플로랄리아가 시작되니, 그것에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리라.

로마에서 봄축제의 위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도시가 어둠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는 상황이라면 그 상징적 의미는 더욱 더 커진다.

부담스러울 것이 분명하다고, 막시미아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나저나 오늘 처형식에는 남전사가 나온다던데.”

그러던 중 은근 신난 기색인 페르피나의 목소리가 막시미아나의 주위를 끌어냈다.

벌써 서른 중반에 들어섰지만, 페르피나는 젊었을 때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혹시 그 남전사가 자네의 군단과 함께 싸웠다던 그 자인가?”

이에 막시미아나는 간략히 답했다.

“그것이야, 보면 알게 되겠지.”

어느새 모래를 치우던 노예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고, 경기의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그들 중 셋이 큼직한, 원형으로 말린 금관악기를 불어 포효시켰다.

그 포효성은 콜로세움 전체로 울려퍼졌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코르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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