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계약
탈출은 불가능하다.
신전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유스티티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래도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탈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이 망할 여신은 대체 하청을 몇 군데에다가 뿌려놓은 건지, 그 고대 이집트의 이시스마저 유스티티아의 하청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다.
이게 말이나 되냐.
고대 이집트 역사라면 분명 장난 아니게 길겠지. 그러니 대략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하청을 줬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면 그냥 문명 시작하자마자 하청 맡긴 거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유스티티아가 일을 하고 있기는 했던 건가 슬슬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날 납치하기 한참 전에도 그냥 하청 맡기고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인간은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닮았으니, 아마 신 또한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존재일 테지.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유스티티아는 지금 한없이 게을러진 상태다.
근데 그러면서도 다른 우주에서 죽은 사람 끌고 와서 부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게 문제지.
이 세상을 넘어서까지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거다.
더구나 이시스의 사제도 어떠한 껄끄러움 없이 이시스 또한 유스티티아의 뜻을 따른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기도 했고. 웬만한 신보다 높은 지위의 신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내 상사가 존나게 강해서 도저히 나의 퇴사를 허락하지 않는 건에 관하여.
씨발, 퇴사하고 싶다.
이제서야 직장인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다. 이러니 다들 퇴사퇴사 노래를 부르지. 마치 대학생이 마음 한켠에서는 항상 휴학과 자퇴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벗어날 방도가 없는 것을.
탈출은 아예 불가능하고, 정의를 찾아낼 방법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나마 가능한 것이라면 하청의 하청을 맡기는 것, 즉 철학자들을 잔뜩 불러다가 하청을 맡기는 것 정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대책이다.
철학자들을 끌어모을 수단이 없다.
검투사 세 명이 나름 부자라고는 하지만, 학술단체 하나를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 돈이 많은 것은 아니다. 이런 건 귀족들의 막대한 후원금은 있어야 돌아가는 거라고.
그러니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자.
해결되지도 않을 상황을 계속 붙잡고 고뇌해봐야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 뿐이다.
끝없는 절망회로에서 눈을 돌려 따스하고 희망찬 현실로 도피했다.
탄탄한 허벅지의 부자 미녀 셋이 있는 현실, 그리고 분수대가 아름다운 정원 위에서 맑은 밤하늘에 피어난 별들이 반짝이는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 이 세 명의 여전사들이 확인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계약서의 내용이다.
검투사로서 이런 계약은 많이 해봤으니, 뭐가 문제고 뭐가 괜찮은 건지 잘 안다며 도와주겠다고 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1층 식당에 모여앉아서 계약서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고.
“좋아, 계약서는 멀쩡해.”
그 셋 중 코페시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시청의 공공노예가 들고 온 계약서 두루마리를 찬찬히 큰 소리로 읽어내려갔다.
“상대는 살인강도 셋, 아동강간범 둘, 그리고 산적 세 명, 총 8명이고 무장 상태는 날 안 선 단검. 보수는 전원 처형 성공 시 60세스테르티우스, 그러니까 15데나리우스. 삶에 심각한 수준의 상해는 무상의료 혜택 제공이나 가벼운 상처는 해당 사항 없다라… 이건 좀 야비한데.”
거기까지 읽은 코페시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근데 내가 보기에 딱히 문제될 건 없어 보이는데.
살인강도 셋에 페도새끼 둘, 그리고 산적 세 명이면 죽어 마땅한 족속들이다. 솔직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토막내 죽여도 별 죄책감은 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비위는 좀 상하겠지만.
다만 보수가 좀 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세 검투사 모두 별 말 없는 걸로 봐서는 이게 첫 처형식 기준으로는 일반적인 보수인 모양이다.
보수야 인기와 함께 올리면 되니까,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심각한 수준의 상해는 혜택 제공해준다는데, 괜찮은 거 아닌가?”
“그게 시장 마음대로니까 문제지. 난 이 인간 마음에 안 들어. 남자가 험한 일 한다는데, 의료혜택은 좀 보장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코페시의 대답은 꽤나 거칠었다.
내가 다칠까봐 걱정해주는 건가. 그 마음은 고맙지만, 내 키가 코페시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상대 무장이 워낙 허접하긴 하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혹시 생채기라도 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 아는 의사 친구가 있는데, 나한테는 할인을 좀 해주거든. 연고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그나저나 어째 코페시의 인맥이 은근 넓은 것 같다. 그 여사제와 스스럼없이 대화하던 것도 그렇고, 아예 의사를 친구로 두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짐작컨데 신앙심이 꽤나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붙임성 있는 성격이기도 하니까, 성실한 종교 생활로 사람들이랑 많이 만나면서 자연히 인맥이 넓어진 것이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검투사니까. 길거리에서 연예인 보면 친해지고 싶은 건 인간의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써먹을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마저 읽자면… 이 모든 것은 4월 8일자 금요일 오후 1시에 열리는 처형식 단 한 건에만 적용되는 계약임을 밝힌다, 라고 되어있네. 여기 서명만 하면 돼.”
그리 말한 코페시에게서 두루마리와 깃펜을 넘겨받고,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았다.
들은 것과 딱히 다른 내용은 없었다. 8명의 사형수, 보수, 의료보장 등등.
그렇게 쭉 열거되다가, 계약서 맨 밑에 가서는 붉은 색 밑줄이 그어진 빈칸이 나왔다.
“여기에 서명하면 되는 거지?”
내 질문에 테스티아와 코페시, 그리고 이페이아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름을 써넣으려 하니 온갖 생각들이 내 머리 속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난 지금 옳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물론 만약 내가 정의를 찾아도, 이 세상에서 평생을 살 수도 있는 노릇이긴 하지.
하지만 단순히 자의로 머무르는 것과 타의에 의해 갇혀져 있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디서 삶을 살아갈지 정할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저항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니 이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 뿐이다.
유스티티아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언젠가 찾아올 순간을 위해 힘을 강화하는 것.
피할 수가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으니까. 퇴사가 불가능하다면 승진이라도 해야지.
축복의 다음 단계 해금까지 3명치 영혼밖에 안 남았으니, 일단 당분간은 축복을 강화하는 데에 초점을 둬보자.
일단 검부터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맞겠지. 그러면서 겸사겸사 죄인들도 좀 썰어보고.
이시스의 사제는 이게 다 시련의 일종이라고 얘기를 했었다.
이걸 좀 희망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검을 빼앗긴 상황 또한 시련의 일종이고, 검을 되찾는 것이 마지막 시련일 가능성도 어느정도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콜로세움에 갇혀있던 야수들이 집단적으로 풀려나서 도시를 혼돈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뭔 이상한 분란 세력이 느닷없이 준동해서 도시 전체가 폭동에 휩싸이는 사건과 같은 개지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집과 내 인생 또한 피해를 볼 것이 뻔하디 뻔한 일이다.
만약 내게 미치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 하더라도, 무고한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건 불쾌한 일이다.
물론 유스티티아가 나 하나 괴롭히고자 이런 시련을 창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게으르고 비합리적으로 굴어서 그렇지, 정의의 여신은 정의의 여신이니까.
그보다는 시련이 가득한 장소에 날 던져놓고서 시험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그렇다면 그 시련 따위, 이겨내주리다.
비록 지금은 검을 빼앗기고 나약해졌지만, 난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워와 피오레 디 리베리.
요아힘 마이어와 디오고 고메스 데 피게레디오.
그 모든 소드마스터들의 강인한 정신이 나와 함께한다. 서적과 고문서, 그림과 문장 속에 깃들어 나를 인도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의 정신과 나의 육신, 유스티티아의 축복과 쯔바이핸더의 강대한 칼날이 합쳐진다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
축복을 점점 강화해나가다 보면, 그 전설적인 사를마뉴의 롤랑과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겠지.
롤랑에 필적하는 무력을 가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21세기의 남자들이 꿈꾸는 궁극의 로망이 아니던가?
그리 벅차오르는 가슴 속, 심장의 격렬한 박동을 느끼며 이름을 적어넣었다.
글라폴레스라는 이름을, 새롭게 얻은 나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