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축복과 마법(4)
“하나만 묻죠.”
“예.”
“지금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정원을 둘러싼 회랑 안에는 여러 방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제들의 사무실도 있었다.
그리고 난 지금 그 사무실들 중 하나에 감금되어 있다.
이런 옘병할.
이마에 핏줄이 돋아난 여사제가 느닷없이 신전 경비병들을 부르더니, 날 이곳으로 끌고 와 가둬버렸다.
어째 3월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내 뒤에서 경비병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도 최소한 밧줄은 없으니, 저번보다는 낫기는 하다.
아무래도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코페시도 이 사제가 영 극성인 사람이라고 말을 했었으니, 강경한 신앙심 탓에 내 말을 곡해해 약간의 의사소통 장애가 생긴 것이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짧고 명확하고 진실되게 답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최소한 그러면 더 이상의 누명은 뒤집어쓰지 않게 될 테니까.
“아니요.”
“아니, 아니라고요? 지금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자매님이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 알기는 하세요?!”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고요?!!”
근데 어째 말투를 들어보니 여사제가 진정되기는 커녕, 점점 더 빡쳐가는 것 같다.
난 분명 속내를 터놓고 진실되게 대답하고 있으니 아마 내 잘못은 아닐 것이다. 흔히 종교인을 대할 때에는 솔직한 태도로 대하라고 하지 않는가.
“당신과 함께 온 자매님은 거의 매일매일 아침 예배에 참석하는 신실한 신도분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훌륭한 여성분을 이용해서 간악한 흑마술을 배울려고 한 건가요, 지금?”
말하는 속도가 지나칠 정도로 빨라졌다.
이건 좋을 수가 없는 신호다. 어떻게든 진정시켜야만 해.
“사제님,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전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조용히 하세요!!”
-쾅!
그러나 여사제는 내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요란한 타격음이 방 전체를 울리며 퍼져나갔다.
“영혼이라는 건 말이죠, 본래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되는 거라고요. 올바르게 죽은 영혼에게 충분한 신앙이 뒷받침된다면 신들의 곁에도 설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성한 존재를 노예로 삼는 마법이라니요?”
여사제는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이상한 요술을 배우러 마법의 여신이라는 칭호에 이끌려 이 성소에 온 것이라면, 당장 나가도록 하세요. 뒷골목에서 어슬렁거리는 사이비 마법사들에게 가던지 알아서 하시라고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진 않았는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사제는 제풀에 지친 듯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터져나오는 분노를 모조리 발산해버린 탓에 잠시 안정기에 들어간 것이겠지.
“사제님, 이건 오해입니다.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지금이 기회다.
“제 검을 걸고 맹세하건데, 진짜입니다. 그런 흑마술을 물어볼려고 했었던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걸고서 상대를 설득한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정도로 강하게 얘기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최소한 상대가 뭐라 말하는지 궁금해서라도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니까.
여사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좋아요, 말해보시죠.”
원래대로라면 유스티티아라는 여신이 날 납치해서 이 세상에 감금시켰으니 도와달라는 얘기를 해야겠지만,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여사제에게 함부로 그런 말을 했다간 신성모독이라며 소리를 있는대로 질러댈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니 좀 비유적인 표현을 쓸 필요가 있다.
“제가 그… 한 3주 전쯤에 꿈을 꿨었단 말이죠?”
고대에 신전의 사제에게 해몽을 부탁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마 아닐 것이다.
중세에도 이교도 해몽술사들은 인기가 많았으니까. 기독교 도래 이전의 시대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니 꿈으로 내 과거의 사건들을 위장해서 표현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의심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 꿈 속에서 거대한 하마에게 치여 죽으니 정체모를 이국에서 눈을 떴는데, 절 납치한 어떤 마녀가 제게 새 생명을 줄테니 지 일을 대신하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절 온갖 해괴한 정신의 야만인들로 가득한 전장 한복판에 떨궈놓더군요. 근데 아무래도-”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어떤 해에 노출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이거군요.”
여사제는 내가 뭔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금세 알아채고선 끼어들었다.
말하는 투를 보니 이런 일을 한두번 해본 게 아닌 모양이다.
“예, 예, 정확합니다. 이 꿈이 제 잊어버린 전생의 기억이고, 마녀에게 조종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잖습니까? 그래서 그리 물어봤던 거였는데…”
그리 말을 흐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것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고도의 전술. 여사제의 분노를 풀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이게 먹혀야 할텐데.
“아, 이런. 제가 심각한 오해를 해버렸군요.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먹혔다!
그리 따뜻한 어투로 말한 여사제는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더니, 내 행태를 감시하던 경비병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러고서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전쟁에 나간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던가요?”
“이기긴 했습니다. 큰 부상을 입어서 한동안 골골거리긴 했지만 말이죠.”
“그 마녀의 일이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이 나시나요?”
“그게… 정의를 찾아오라 하더군요.”
내 답변을 전부 들은 여사제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필수적인 정보는 다 전달을 했다. 차이점이라면 날 죽인 게 하마가 아니라 트럭이라는 것, 그리고 납치의 주체가 마녀가 아니라 여신이라는 것 정도겠지.
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다. 고대인들이 트럭을 이해나 하겠냐고.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사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일반적인 악몽이나 영혼에 가해진 위해의 기억을 느낀 것이 아니라, 계시를 받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그것도 아주 특이한 계시 말이죠. 신들이 자신의 존재를 다른 것으로 위장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요.”
씨발, 뭐?
이건 진짜 소름이 돋는데.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멍해진 채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 여사제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하마에 치여 죽는다는 것, 그것은 압도적인 힘에 의한 파멸을 상징하죠. 그것은 마치 필연적인 운명과도 같아서 피할 수 없죠. 하지만 당신에게 계시를 내린 여신은 교묘한 수를 써서 그 운명을 속이고 당신을 빼내 해를 입을 수 없게 만든 것이죠.”
이건 뭔가 이상한데.
트럭이 아니라 하마라 말해서 그런가. 잘 이해가 안된다.
“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이렇게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여사제는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귀족의 일을 대행하고 있고, 매우 중요한 물건을 운반하고 있거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쳐봅시다. 이런 당신을 어떤 강도가 공격해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귀족은 무슨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아마 엄청나게 화를 내겠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른 경우를 가정해보죠. 당신이 그 높은 귀족의 호위병을 대동하고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면 강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섣불리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러자 여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서 설명했다.
“해몽을 해보자면 당신의 상황은 이 대행자와 같아요. 상황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당신이 무엇을 대행하는지 아는 자라면 아마 쉽사리 공격하지 않으려 하겠죠. 만약 공격한다면 당신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처리될 것이고요.”
그러니 정리해보자면, 누군가가 날 정의를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면 그것은 곧 유스티티아의 휴식을 방해하는 대죄를 짓는 것이기에 내가 처한 상황을 아는 존재라면 그런 개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란 소리다.
다만 여사제의 말 중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근데 제 주위에 호위병은 보이지가 않는데 말이죠.”
“호위병은 아마 축복의 형태로 당신 안에 깃들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짐작하건데 지금은 대략 기초적인 수준의 보호만을 제공하고 있을 테지요. 그 여신은 아직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이 집 해몽 참 잘하네. 축복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알아내다니.
하긴, 따지고 보면 그 게르만들도 유스티티아가 준 축복에 의해 무참히 썰려나가긴 했다.
물론 내가 받은 축복이 방어용이라 하기엔 어폐가 좀 있기는 하지.
하지만 본디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 하지 않는가. 리히테나워 검술서에서도 공방일체의 정신으로 적을 상대하라고 적혀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날 전장에다가 떨궈놓은 이유는 뭘까.
이 힘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하지만 만약 그 여신이 내린 임무를 충실히 따르고 시련을 극복해 자격을 증명받는다면, 당신은 여신께서 내리신 영적인 대업을 이루고도 남을 축복을 수여받게 되겠죠. 야만인들이 가득 찬 전장은 아마 그 시련들 중의 일부로 보이고요.”
그래서 내 능력을 강화형식으로 만들어놨던 모양이다. 유스티티아가 바라는 대로 행동한다면 시련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방식으로 설계해 놓은 것이다.
이런 악랄한 작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시련 하나로 검증이 끝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거다. 보통 신화 속 영웅들이란 미친놈들은 기본적으로 시련 두 세개는 처리하지 않는가.
그럼 다음은 대체 뭐지?
뭐 내전이라도 터지나? 아니면 로마 시 한복판에 괴물이라도 나와?
모르겠다.
어쩌면 운이 좋게도 시련 하나로 퉁치는 걸 수도 있지. 솔직히 그러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당분간은 내 검을 되찾는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고 싶단 말이다. 게으름뱅이 여신의 어처구니 없는 시험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나 명확한 계시를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죠. 저도 이시스님을 모시는 사제이지만 그분의 형상을 꿈결에서 잠시 보았을 뿐,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거든요. 당신은 분명 올곧은 삶을 살아오신 분이겠죠. 그러니 다시 한번, 오해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여사제의 진심어린 사과가, 사고에 잠식된 내 정신을 다시 현실로 이끌어내었다.
그나저나 올곧은 삶이라.
“올곧은 삶…”
이시스와 유스티티아의 올곧은 삶에 대한 기준은 크게 다른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계시를 내리는 기준이 크게 다른 것이거나.
내 삶은 올곧음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중요한 건 미래다.
이 불공정계약에서 벗어날 가능성. 그런 게 존재할까?
“그럼, 계시를 벗어나는 방법은 없나요 혹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고, 그중에서 신들께서 선택할 정도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죠.”
이건 느낌이 좋지 않은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곧 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되었다는 것, 이미 계시를 받았다면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하아…”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대체가 좆 같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냐 어떻게.
“이시스님 또한 마아트님의 대의를 따라 인류를 가르치시는 분이죠.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그리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으니 여사제가 위로하듯 말을 걸었다.
아마 그럴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내게는 반쯤 그렇게 들렸다.
근데 마아트는 또 뭐야.
“마아트요?”
그러자 여사제가 대답했다.
“그리스어로는 흔히 그분을 아스트라이아라고도 부르죠. 그리고 라틴어로는 보통…”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인 것인지, 말끝을 흐린 여사제는 연신 손가락을 튕겨대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아, 그렇죠. 유스티티아라고 부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