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9 축복과 마법(1)
“그래서, 대체 왜 그런 건데?”
“응?”
시청에서 나와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코페시가 내게 그리 물었다. 대략 불만과 의문이 1:9의 비율로 배합된 듯한 어투였다.
아마 시장에게 내 주장을 강하게 피력한 것을 문제삼는 것이겠지.
이해는 한다. 결과적으로는 잘 끝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약간은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 행동이 정당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었어. 난 엄연한 자유민이고, 수정헌법 제2조에 따라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권리를 지닌단 말이야. 내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는 걸 그저 눈뜨고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물론 여기는 미국이 아니니, 실질적으로 수정헌법 조항의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흔히 미국은 21세기의 로마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로마 또한 2세기의 미국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에서도 수정헌법 제2조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임에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다.
아주 명백하고 합당한 주장이란 말이다.
“…뭐? 수정헌법? 그건 또 뭔데?”
하지만 코페시는 내 고차원적인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라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
고작 한 사람이 열심히 설명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래.”
코페시는 살짝 미심쩍어 하면서도 대충 동의하는 듯 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하여도 내 깊은 진심은 이해하기에 그런 것이겠지.
내 쯔바이핸더에 대한 깊은 애정 말이다.
어느 광고 말마따나, 진실되고 진정한 마음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아도 잘 전달되는 법이니까.
아아, 드디어 오랜 친구를 다시 한 번 만져볼 수 있게 된다니.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다시 한 번 함께 적의 팔다리를 베어내고 해악을 죽이게 되겠지. 피 속에 헤모글로빈이 아니라 마마이트가 흐르는 작자들 말이다.
그러나 그 무대는 과거와 다를 것이다. 난 이미 전역을 했기에, 더 이상은 게르마니아의 음습한 숲에서 싸우지 않으니까.
내 새로운 무대는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거대한 투기장의 광활한 모랫바닥이 될 것이다.
그 유명한 콜로세움, 남자의 로망이자 로마의 상징인 원대한 랜드마크에서 싸우게 될 터이니.
아마 이 세계에서는 여자의 로망이라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물론 나 또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런 건 도덕적이지 않은 일이니까,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족칠 상대는 일반인이 아닌 사형수들이다. 죄인들 중에서도 진실로 악질적인 인간 말종들이란 소리다.
더구나 과학 수사가 제대로 발달하지도 않은 이 시대에 사형수로 잡혀왔다는 건, 빼도박도 못할 현행범으로 잡혔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죄인의 영혼을 육체와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 정당한 일이다.
“…죄인의 영혼.”
그때, 무언가가 깊고 깊은 망각의 구렁텅이 속에서 다시금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초월적인 힘의 근원.
유스티티아에게서 받았던, 《피비린내 나는 거래》라는 이름의 축복 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상태창에는 10명의 죄인을 살해할 시 다음 단계가 해금된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확히 몇 명의 게르만을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10명은 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지.
‘도와줘요, 여신님.’
속으로 주문을 외우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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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한 자들의 요구》-[열람]
《지고한 자들의 축복》-[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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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상이 맞았는지, 《지고한 자들의 축복》라는 항목의 글씨체가 변한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뭔가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뭐야, 왜 그래?”
그때, 코페시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갑자기 길가 한복판에서 우두커니 멈춰 선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사실을 말해버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내가 아예 다른 차원의 다른 공간, 다른 시간대에서 한 번 죽었다가 반강제로 되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영문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떨어져서는 유스티티아와 맺은 불평등 계약에 따라 불가해한 축복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대신 정의를 찾아 헤메는 말단 용역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코페시는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마 순 미친놈 보듯 하겠지. 뻔한 일이다.
그냥 대충 둘러대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비.
“아니, 그냥… 별 거 아니야.”
“설마 뭐 헛것 보고 그러는 거 아니지?”
상태창을 헛것이라 하는 게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자의에 따라 껐다 킬 수 있으니 일반적인 환각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그나저나 은근 예리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신체 능력이 극대화된 검투사라서 감도 무지하게 좋은 것일까?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이 상태로 계속 있다간 쓸데없는 의심을 살 것 같았기에, 손부채로 땀을 식히는 척을 하며 상태창 우측 상단의 X자 버튼을 눌렀다.
그러며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처형식 들어가기 전에, 장비 같은 건 따로 신청을 해야 하나? 예약제라던가 뭐 그런 거 있어?”
이렇게 된 이상 업무상 조언이나 얻어가야겠다.
어느새 많이 익숙해져서 크게 체감되지는 않지만, 코페시는 나름 콜로세움에서 일한지 꽤 된 베테랑이다. 심지어 돈도 상당히 잘 벌고 있고.
그러니 조언을 구하기에는 이만한 상대가 없겠지. 물론 코페시는 검투사고 난 처형인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어차피 칼 들고 상대방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드는 건 비슷하지 않는가. 통하는 게 있을 것이다.
상태창에서 바뀐 내용이 뭔지는 나중에 집에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겠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상태창 끄는 게 너무 불편한데, 이것도 주문으로 못 끄나?
나중에 변경사항 확인하면서 한 번 실험해보든가 해야겠다.
“일단 네 검이야 거기서 쓰게 해달라고 말했으니 줄 거고, 대기실에 갑옷이나 투구 같은 건 거기 있는 거 여러가지 많으니까 좀 일찍 가서 이것저것 차보고 결정하면 돼. 정 결정 못하겠으면 거기 있는 노예한테 대신 결정해달라고 부탁해도 되고.”
코페시의 설명을 통해 추측해보자면, 검투사 대기실은 대략 연예인들 대기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간인 모양이다.
차이점이라면 대기실에 화려한 코스튬이 걸려있는 게 아니라 철과 가죽으로 된 무구가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겠지.
하지만 무대 의상의 내구도는 대개 낮은 편이기 마련이다. 실용성보다는 미적인 용도에 주의하는 편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검투사들의 방어구 또한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근데 거기 있는 갑옷, 효과 있는 거 맞지?”
“그야 당연하지. 그리고 말했잖아. 사형수들도 무기 들고 나오긴 하는데 죄다 허접한 것들 뿐이라고. 그거 맞고 좀 긁히거나 다칠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일반적인 검투사들의 싸움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쉬운 난이도의 전투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하긴, 사형수가 사형집행인을 죽이는 건 처형식의 의도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허용될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내 실력과 기술의 화려함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멋지게 사람을 썰어야 한다라. 하지만 그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쯔바이핸더 검술은 언제나 멋진 것이니까. 아주 그냥 대성공을 이뤄내서, 그 재수없는 시장의 콧대를 박살내어 버리고야 말겠다.
솔직히 물리적으로도 박살내고 싶기는 한데, 그건 존나 명백한 범죄라서 안된다.
제정신을 유지한 21세기인의 상냥한 마음씨로는 결코 저지를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제정신일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시장이 언젠가 또다시 내가 제정신을 잃을 정도로 무례하게 군다면, 콧대를 포함한 여러가지를 다 함께 박살내어 줄 수는 있겠지.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다. 그것도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만약의 일.
그러니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는 없겠지.
“그럼 지금은 딱히 할 게 없는 건가?”
“저녁 먹을 때쯤 되면 우리 집으로 계약서가 도착할 테니까 그거 읽어보고 서명하긴 해야지. 그거 말고는 딱히 할 건 없어.”
코페시의 말이 끝나자, 서로 간에 약간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것은 마치, 학창시절 친구와 수업을 쨌는데 정작 할 것이 없어 정처없이 거리를 헤멜 때의 기분과도 비슷한 상태.
이 애매한 잉여로움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게 되고, 재미는 재미대로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야 만다.
그런 일은 막아야만 해.
그러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뭐하지? 계획 같은 거 있어? 어디 갈 곳이라던가?”
이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코페시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야 이 목걸이 받은 김에 신전에 잠깐 들려서 사제님들한테 인사나 좀 하려고 했는데, 한 번 따라와 볼래?”
“그 이시스 신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코페시가 말을 이었다.
“거기 건물도 멋지고, 사제님들도 친절하시고 지혜로우시거든. 한 번 가봐서 나쁠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살짝 흔들리는 듯 했다. 마치 무언가 말하는 것을 꺼리며 망설이는 것처럼.
어째 묘하게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대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지 슬슬 궁금해지려던 찰나, 코페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정신적으로 좀 힘들다거나 그러면 사제님들과 한 번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난 괜찮은데…”
어제 비명과 함께 난동을 부린 것 때문에 나에 대해 약간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물론 실제로 어제는 정신적으로 좀 많이 불안정하기는 했지. 하지만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상태다. 거의 아무 문제가 없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이시스라는 여신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 말이다.
“잠깐만, 근데 그 이시스…님이라는 여신이 정확히 무슨 여신인지 알 수 있을까?”
내 질문을 들은 코페시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좀 애매해. 워낙 칭호가 많아가지고… 그나마 추려본다면 별과 바다의 여신, 그러니까 마법과 항해와 지혜의 여신 정도가 되겠지.”
마법과 항해와 지혜의 여신이라.
항해는 상관없지만 지혜는 좀 많이 필요할 것 같고, 마법에 대한 지식은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스티티아는 뭐하자는 존재인지 아는 것이 거의 하나도 없다시피 하니까. 심지어 정의를 찾으라는 개소리의 참뜻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신전 구경을 겸해 정보를 수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좋아.”
아는 것이 힘이라고.
“따라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