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쯔바이핸더의 정당한 주인(2)
에스퀼리네 언덕의 남쪽에는 흔히 시청이라 불리는 텔루스 사무국이란 건물이 하나 있다.
그 사무국의 꼭대기, 트라이아나 대욕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사무실 안에서는 비단 토가를 두른 여인과 한 명의 검투사, 그리고 장신의 사내가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인의 직함은 다름아닌 시장(Praefectus Urbi).
로마 시의 행정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은 그녀는,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온갖 행사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
아마 그렇기에 저들 또한 날 찾아온 것일 테지. 시장은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사내가 처형식에서 처형인으로 일하도록 허가해달라는 건가? 현재 시청에서 소지하고 있는 그 특이한 칼날의 대검을 들고서?”
“그렇습니다, 시장님.”
코페시는 정중한 어투로 그리 답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이 사내의 무력은 굉장히 출중합니다. 아마 이걸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자 코페시 옆의 사내는 시장에게 작은 나무상자를 건넸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대한 보조병들에게 주는 시민권 보관함의 생김새와 정확히 똑같았기에 그러했다.
시장은 잠시 침묵하며 청동판에 새겨진 글씨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상자를 덮고는 검투사를 향해 심히 의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사내가 군공을 세웠다라… 위조가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나?”
시민권에 새겨진 내용은 도무지 상식과는 부합하지 않았기에, 나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군대에 따라가는 남자는 절대 다수가 창남이다. 성욕이 잔뜩 쌓인 여자들만큼 창남이 쉽게 돈을 뜯어갈 수 있는 존재도 또 없으니까.
남자는 군인이 될 수 없다. 단순히 힘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자 검투사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니까.
군대의 근본, 즉 군인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규율에 있다.
그리고 남자는 본디 지성이 부족한 존재다.
그렇기에 로마군의 규율과 체계에는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최소한 시장은 평생을 그리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로마군에서 정식으로 군공을 세웠다며 주장하는 사내가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 처형식에서 자기 소유의 검을 휘두르게 해달라고 청을 해온다니.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제가 보증하건데 이건 틀림없는 진품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내려주신 시민권이죠. 정 못 믿으시겠다면 황궁에 물어보셔도 될 겁니다.”
하지만 코페시의 말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의 답변은 확신으로 가득찬 말투에, 확신으로 가득찬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흠… 특수 군사적 상황에 대한 공로라.”
시장은 청동판에 새겨진 시민권을 한 번 보고, 글라폴레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심이 담겨 있었으나 그 정도는 비교적 줄어들어 있었다.
물론 시장 또한 최근 제2군단에서 큰 키의 사내가 게르만을 쓸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워낙에 소문이 자자했었으니.
그리고 제2군단이 로마에 당도한 뒤, 시청으로 한 대검이 넘겨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물론 보관료 지급 등의 실질적 관리는 노예들이 하기에, 무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등과 같은 자세한 사항은 거의 몰랐지만 말이다.
그러니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아예 말이 안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아예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니 이 남자가 로마군을 도와 야만인들과의 최전선에서 기이한 무예를 발휘해 적들을 쓸어넘겼다는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한 번쯤은 믿어볼 만하지 않을까.
시장에게 있어 이 생각은 꽤나 합당해보였다.
“좋다. 그렇다면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내일, 4월 8일 점심 때에 처형식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칼날 달린 전차가 나와야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처형 방식을 고려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쪽 담당 노예에게 온 이유와 이름을 얘기하면 들여보내줄 걸세.”
최소한 한 번의 기회는 줘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계약서는…”
“제 집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코페시는 시장의 질문에 공손한 투로 답했다.
그러자 시장은 글라폴레스를 바라보며 하대하는 어투로 말을 건넸다.
“단순히 효율적으로 빠르고 확실하게 죽이는 건,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네. 중요한 건 시민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느냐의 문제이지.”
한 번쯤은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겠지.
아무리 키가 크다고 한들 남자는 남자이고, 처형식에서 힘이 부족해 헥헥거리는 처형인을 보면서 즐거워할 관중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대모신 키벨레를 기리는 메가레시아(Megalesia) 축제 주간이다.
4월 4일에 축제가 시작되어 10일에 끝나니, 당연히 8일쯤 되면 비교적 관심이 좀 시들긴 할 것이다.
그래도 축제 주간에 열리는 처형식은 신들의 이름으로 부정을 정화한다는 의미를 가지니 평소에 비하면 시민들의 관심은 결코 적지 않은 편이다.
아마 한 번 내보내면 쏟아지는 야유성을 견디지 못하고 알아서 물러나게 되겠지.
그 상태에서 소유권을 팔아넘기라고 적당히 꼬시기만 한다면, 이 특이한 칼날의 대검을 손에 넣는 건 식은 죽 먹기와 다를 바 없을 게 분명하다. 시장은 그리 생각했다.
평민 남자는 지능도 부족하고 멍청한 족속이니까. 그런 하찮은 존재가 이런 예술품을 가지고 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코페시에게 감사하게나. 자네를 처형인으로 써주는 것은 오직 이 훌륭한 검투사가 가진 명성과 그에 따른 신뢰 때문이니까.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평이 좋지 않다면, 다음 기회 따위는 없을 걸세.”
시장의 무례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글라폴레스의 미간이 아주 살짝 움찔거렸다.
명백한 불쾌함의 표현이었으나, 시장은 안타깝게도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수치스럽고, 치욕적이라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자신에게 맞서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무것도 없다.
시장은 본디 황제에 의해 임명되는 로마 시의 최고위 관료들 중 하나. 감히 누가 그녀를 건드리겠는가.
다만 그녀의 경우는 일반적인 시장과는 좀 다른 임명 과정을 거치긴 했다.
전 시장이 역병으로 인해 급사하자, 혼란을 틈타 원로원과의 인맥을 이용해 시장직을 맡는 행위는 일반적인 절차와는 꽤나 거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시장은 시장이다. 그 권력을 누림에 있어 제한은 없는 것이다.
“감사하다고 하고 끝내. 부탁이야.”
코페시는 눈앞의 탐욕스러운 귀족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조용히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여기서 대들거나 화를 내보아야 불려나온 경비병들에게 끌려갈 뿐,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 진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다.
글라폴레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머리 속 논리회로를 정렬시키고, 감정을 통제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쁜 사람입니다, 시장님.”
하지만 불가능했다.
글라폴레스는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어째서?”
제어하기에는 증오와 경멸, 그리고 분노의 정서가 너무나 심했다.
그 부정적인 감정들은 영혼을 잠식해나가며 강렬한 폭력 충동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의 얼빠진 답변은, 그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제 검을 빼앗고…”
글라폴레스는 고개를 들어 시장을 똑바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제 군공을 의심했잖습니까.”
시장은 글라폴레스 주위의 기류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아챘다.
정상적인 남자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기이한 공기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시장은 이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한 분위기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나, 난 그저 법률에 의거한 합당한 행동과 합당한 의심을 했을 뿐이네.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시장은 자신도 모르는 새 말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추태를 보인단 말인가? 로마의 2인자가 된 자신이,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두렵기에?
“그저 절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겠죠.”
시장의 머리 속에서, 마치 북을 둥둥둥 울리는 듯 중후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정신을 조이는 듯 압박감이 그득한 이 북소리의 근원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공포에 휩싸여 들리는 환청인 것인지.
심정이 너무나 혼란하여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나는 데에 큰 장애가 있었다.
“…시장님.”
글라폴레스의 말에, 시장은 거의 발작하듯 소리치며 답하였다.
“나, 난 그저 법률을 따랐을 뿐이야!”
하지만 사내는 진정하는 기색이 없이, 마치 시를 읊조리듯 낭송할 뿐이었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피멍과 상흔으로 뒤덮여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상이용사에게서, 오랫동안 벗삼았던 검까지 빼앗으면…”
“일단 내 말을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힐끗 글라폴레스의 눈동자를 쳐다본 시장은 그야말로 기겁을 하고야 말았다.
그 새카만 눈동자에는 심연이 깃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상행동을 저지를 법한 광인의 눈동자였다.
이 방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뭔가, 뭔가가 잘못되었다.
저 눈빛은 일반적인 인간의 눈빛이 아니다.
건드렸다간, 뭔가 큰 화를 입고야 말 것이다.
비열함에 가까울 정도로 예민한 그녀의 생존본능이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글라폴레스, 진정해. 잠시 분노를 가라앉혀 봐.”
한편 코페시는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글라폴레스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로마의 2인자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어떤 험한 꼴을 볼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시는지 물었습니다.”
근데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건가…? 난 모르네! 정말이야! 모른단 말일세!!”
어째서인지 공포에 휩싸여 두려워하는 것은 시장이었고, 몰아붙이는 쪽은 글라폴레스였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렇게 코페시가 당황에 휩싸인 한편, 대검의 정당한 주인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듣지 않는군요.”
그러고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는 시장을 향해, 명확한 발음으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제 말을, 듣지 않는군요.”
어느새 시장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발에는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알겠네!! 어떻게든 검을 돌려줄 방법을 찾아보겠네, 무, 물론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시장의 말이 끝나자 몇 초 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글라폴레스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말했다.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만족한 얼굴로 일어나는 글라폴레스를 따라 코페시 또한 영문모른 채 일어났다.
그러자 큰 키의 사내, 곧 처형인이 될 사내는 이전의 기괴한 분위기는 완전히 거두어 버리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시장님.”
그러나 사내와 검투사가 사무실 밖으로 사라진 다음에도, 시장은 한동안 넋이 나간 채로 앉아있었다. 그 기괴한 눈빛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면서.
과연 그 자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시장은 알 수 없었다.
이런 사내는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